35. 자스민의 생일
“형수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자 자스민이 내 침대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일렀다.
그런데 자스민이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일어났대.
“무슨 일이니?”
내 질문에 자스민은 히히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일 무슨 날이게!”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은… 그러게. 토요일 아닌가.
공작가에서 반 백수 생활을 즐기다 보니, 내게 요일 개념 따위는 사라져있었다. 내가 고민하던 그때 자스민은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입을 열었다.
“기대할게!”
그렇게 소리치며 자스민은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일 무슨 날이냐고 묻는 질문과 기대한다는 말. 이건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내일이 자스민 생일이구나.
무얼 해 줘야, 좋아하려나.
자스민이라면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특별하면서 자스민이 좋아할 만한 선물이라.
으음, 아무리 고민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쩌지?
* * *
피오라가 자스민의 선물을 고민하던 그때, 다른 일로 고민하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리다스는 평소 즐기던 차를 마시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아니야.
피오라가 만들어 준 커피는 더 달콤하고 쌉싸름하면서 깊은, 그런 맛이었는데.
다시 한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엔 별것도 아닌 일로 그녀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자꾸 그 맛이 입에 맴돌아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오라가 만든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면 일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침없이 피오라의 방으로 향한 그가 노크를 하려는 순간 문이 확 열리며 누군가 품속으로 들어왔다. 아래를 보니 피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이게 뭐람.
옛날 만화책에서나 나올법한 클리셰적인 상황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자스민의 선물을 사기 위해 시내에 가려 했을 뿐인데, 왜 내 방 앞에 바리다스가 있지?
“무슨 일이에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내게서 조금 멀어졌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바리다스도 자스민의 생일 선물로 고민을 하는 거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바리다스가 자신에게 찾아올 일은 그것뿐이었다. 자스민의 취향은 아무래도 자신이 더 잘 알 테니 말이다.
“자스민의 생일 선물 때문이죠?”
* *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바리다스는 무어라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자신은 동생들의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일도 챙기지 않는 그는 태어난 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아끼는 피오라 앞에서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피오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저도 선물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일이 많이 밀려 있었다.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아주 많이.
만약 지금 자리를 비운다면 일이 몇 배로 불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오라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죠.”
내뱉은 대답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 * *
바리다스와 함께 시내로 향하는 마차에 탄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부터 갈래요?”
장난감 가게, 꽃집, 디저트 가게, 주얼리샵이나, 살롱. 보석 같은 건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문화가 다르니까. 자스민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또 뭐가 있지.
내가 자스민의 선물을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바리다스가 마차를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이미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뒤였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라는 말에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가 선 곳 바로 앞에는 커다란 인형 가게가 있었다. 작고 평범한 곰인형부터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바비 인형까지, 정말 가지각색의 인형들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바리다스는 손으로 인형이 진열된 곳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의 손가락이 직선을 그리며 진열장을 한 번 훑었다. 딱 봐도 비싼 인형들이 모여 있는 줄이었다.
저게 진짜 부자인가. 한 번씩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자들이 저러는 거 보고 아무리 부자라도 왜 저래. 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하는구나.
곁눈질로 가게 주인을 바라보자 그의 눈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준비되는 즉시 공작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웃는 `그의 미소에서는 강한 자본주의의 느낌이 났다.
그런데 바리다스는 알아서 잘 고르면서, 왜 자스민의 생일 선물을 같이 골라달라고 한 거지.
설마, 다른 부탁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에게 부탁을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부탁이었으면 그가 알아서 말했겠지. 일단, 나도 자스민 선물부터 사자.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본론으로 돌아온 나는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드레스는 지난번에 사 줬고 장난감은 별로인 것 같고. 그러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내 눈에 케이크 가게가 들어왔다.
하지만 자스민의 생일 케이크는 이미 공작가 주방에서 만들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딱히 사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선물을 고민하던 내가 한숨을 내쉰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게 있었지.
“마도구 상점으로 가 주세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제국에 단 다섯만이 존재하는 마도구 상점은 수도에 두 곳, 테릴 후작가와 에피도스 백작가가 다스리는 영지에 한 곳씩, 그리고 차일드 가의 영지에 하나가 있었다.
마도구 상점은 마도구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몇몇 것들은 오직 마법사만이 관리할 수 있기에 마탑에서 직접 운영하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도구 상점에서 자스민에게 생일 선물로 줄 만한 건 없는 것 같았다.
마력이 없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은 많았으나, 그중에는 아이들이 사용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때, 도착한 것인지 말이 마차가 멈추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보이는 하얀색과 금색의 마도구 상점은 신비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웅장했다.
나는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장소였다.
문 앞에 서자 공중에 떠 있는 종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울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실내 역시 화려하고 신비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전등 역시 고정하는 것 없이 홀로 하늘에 떠 있었다.
실내 구경을 한창 하던 그때, 점원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나와 바리다스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내가 누군지 눈치챈 것인지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무얼 찾으시나요?”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완드를 볼 수 있나?”
그런 내 말에 바리다스와 점원이 눈이 커졌다. 마력을 더욱 편하게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완드는 요즘은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마법사의 필수템이라 불리던 것이었다. 요즘 마법사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마력을 지닌 어린아이들이 마력을 조절하거나 마법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우는 역할을 했다. 물론 마력이 없다면 그저 기다랗고 예쁜 지팡이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마법을 사용할 줄 아십니까?”
초대 가주는 마법사였지만, 차일드 가는 그의 아내의 영향을 받아 마법보다 검술 쪽에 더 가까운 가문이었다. 마력은 거의 유전이었기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차일드 가에서 뛰어난 마법사가 많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깨고 차일드 가에서는 마법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초대 가주의 영향인지 가문에서 한 명씩 마법사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마지막 기록이 이백 년 전이었다.
자스민은 무려 이백 년 만에 나온 차일드 가의 마법사였다. 그것도 천재 마법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뇨, 자스민에게 줄 건데요.”
* * *
당연히 피오라가 유리지아의 오르골을 자스민에게 선물할 것이라 생각했던 바리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자스민에게 완드를 선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대가 이백 년 전에 끊겼다는 것을.
완드는 위험한 물건도 아니었고 디자인이 예쁜 것들도 많았기에, 장난감이라 생각해도 되는 것이고 말이다.
자스민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바리다스는 생각했다.
그녀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예쁘게 장식된 완드들이 보였다.
이제 완드는 마법을 편하게 사용하는 것보다 장신구에 가까운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자스민이 좋아하겠군.
* * *
나는 진열되어 있는 완드들 사이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줄기와 꽃잎, 그리고 한가운데에 보랏빛의 보석이 달려, 마치 꽃처럼 보이는 것을 골랐다.
“이걸로 하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완드를 내가 고르자 점원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진열된 완드를 빼내었다.
“네, 바로 포장해드리겠습니다. 다른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어린 아이용 마법 서적이나, 다른 것들도 구경해 보고 싶었지만 바쁜 바리다스의 시간을 더 뺏기는 미안했다.
“충분해.”
내 대답에 그녀는 공중에 손을 넣고 휘적이더니 가죽으로 만든 기다란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완드를 넣은 뒤, 보라색 끈으로 묶어주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갑자기 공중에 공간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주머니와 끈이 나왔다.
마법이라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신비로운 것이었다.
“다음에 또 방문해 주세요!”
점원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나는 주머니를 손에 소중하게 품은 채 돌아섰다. 그런 내 눈에 작은 오르골이 들어왔다.
상아로 만들어진 흰색의 오르골 안에서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한 쌍의 백조가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것인지, 오르골 특유의 소리가 아닌 피아노 선율이 들리고 있었다.
오르골에서 들려오는 곡은 몇 주 전, 렌과 토마가 연주해 준 그 곡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 나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사도록 하지.”
그런 내가 오르골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바리다스는 그것을 들고 점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빠르게 결제를 한 그는 내게 오르골을 내밀었다.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 상황에 나는 멍하니 오르골을 받아들었다.
“더 가지고 싶은 게 있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것도 과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받았긴 했지만 솔직히 이것도 엄청 비싸 보였기에, 부담스러웠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갑시다.”
* * *
피오라와 함께 마차에 탄 바리다스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더 늘어나 있을 서류를 떠올리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오라를 찾아온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고 말이다.
그가 뭐라고 부탁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바리다스, 피곤해 보이는데 돌아가서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우연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읽은 거 같은 피오라에 말에 바리다스는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올라가는 입꼬리를 저지하며 대답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라떼가 진짜 마음에 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