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자스민의 생일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형수님!”
눈을 뜨자마자 아이들이 동시에 나를 불렀고, 렌과 레몬은 내 품에 뛰어들었다. 무언가 데자뷰를 느끼며 나는 렌과 레몬을 양팔에 안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몬이 소리쳤다.
“자스민 생일인 거 아시죠, 그죠!”
“알지.”
대답을 하며 내가 아이들에게 올라오라는 듯 침대를 두드리자 아이들은 침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크기가 매우 커 아이들이 다 앉고도 자리가 남았다.
그때 레몬이 내게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어때?”
상자를 열자 보석으로 만든 보라색 꽃들이 유리병에 가득 꽂혀 있었다. 아름다운 꽃을 본 내 눈이 커졌고 그 모습을 본 레몬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스민에게 줄 선물이야.”
아이들은 각자 준비한 선물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그린은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책을, 렌은 초콜릿과 사탕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토마는 커다란 인형을 선물할 것이라 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선물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토마가 입을 열었다.
“형수님, 얘들아. 형님이 오늘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아이들은 지금까지 바리다스에게 단 한 번도 생일 축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바리다스도 그들에게 생일 축하를 바라지 않았고, 그랬기에 아이들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올해 자스민이 피오라에게 생일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더 이상, 생일을 축하해 줄 어른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조금은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가 자신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가족인 내가 사랑하고 아껴주고 있으니까. 그간 아이들이 느끼고 있었던 공허함이 조금씩 메꿔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쌍둥이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스민의 생일인 걸 기억해주신 건가?”
“그런 거 같아.”
렌을 돌아보자 그녀도 마찬가지로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빨리 점심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드리는 힘이 약한 걸 보아, 자스민이 분명했다.
동시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형수님, 저희 있는 거 말하면 안 돼요!”
“놀라게 해주고 싶단 말이야.”
“점심 때까지, 형수님이 자스민이랑 있어 주면 안 되나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레몬과 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아이들이 잠가둔 문고리를 열고 나가자 자스민이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형수밈, 언니랑 오빠들이 다 없어…….”
라고 하는 자스민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웃음을 참은 나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 오늘 바쁜가 보네.”
능청을 떨며 자스민의 등을 두드려 주자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방문에서 작게 들린 덜컹 소리에 그쪽을 바라보자 아이들이 문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 준 뒤 나는 자스민을 안고 복도로 향했다.
어디로 가 있을까.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날씨가 매우 좋았다.
정원으로 가 있으면 되겠네.
“오늘 우리 자스민 생일인데, 속상하겠다. 그치.”
내 말에 자스민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자스민을 안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다들 금방 올 거야, 그전까지. 나랑 산책하지 않을래?”
내 말에 하늘을 올려다본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긍정한 것을 확인한 나는 시녀 한 명에게 정원으로 쿠키와 마카롱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정원에 준비된 의자에 앉은 자스민은 울먹이며 마카롱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자스민, 착하지? 뚝.”
내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자스민은 많이 속상한 듯했다.
이걸 어쩌지. 이 정도로 서운해할 줄 몰랐는데.
자스민이 이렇게 서러워하니, 무언가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저번…생일에는 엄마랑 아빠가 아침부터 같이 이써 줬는데, 엄마랑 아빠, 보고 시퍼어….”
나는 죄인이다.
누가 뭐라 해도 지금부터 나는 죄인이었다. 뭐가 됐든 지금부터 전부 다 내 잘못이다. 그렇게 악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건만, 자스민을 울리다니 나는 악녀가 분명했다.
그때 자스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빠!”
내 뒤에 있는 바리다스를 향해, 아빠라고 소리치며 말이다.
* * *
바리다스는 이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울고 있는 자스민과 그녀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피오라, 피오라가 자스민을 울렸다고 딱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피오라가 누굴 울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스민을 안아 들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피오라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그 말에 피오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바리다스를 올려다봤다.
“제가 나빴어요, 자스민을 울려버렸어요, 어떡해….”
피오라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일부러 자스민을 울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스민이 원래부터 울보인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민, 그만 울고 뚝 하렴.”
그답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와 민이라는 애칭에 자스민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놀란 얼굴로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바리다스는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자스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생일날에, 주인공이 울면 못 쓰지.”
다정한 바리다스의 모습에 자스민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엄마, 아빠가 안 보고 시퍼?”
* * *
자스민의 말에 나도 모르게 놀라 바리다스를 바라보았다. 바리다스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자스민을 보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절대 좋은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자스민은 바리다스의 품에 안겨 있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보고 싶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하다니. 그도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감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거나.
“마음은 이해하지만, 민. 이런 좋은 날에 울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슬퍼하실 거야.”
말과는 다르게 전혀, 슬픈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바리다스와 너무나 대조되어 보이는 태도에 한 편으로는 오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자스민은 그의 말에 위로를 받은 것인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바리다스의 목을 껴안았다.
“아라써, 이제 안 울게.”
그녀의 웃음에 그제야 바리다스는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빙의한 뒤 처음으로 소설 속에서 묘사했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는 한 팔로 자스민을 안은 채, 반대 손을 내게 내밀었다.
“더 늦게 전에 돌아가죠.”
그가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까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그에게서 느끼는 것은 명백한 위화감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전대 공작, 아이들과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말이다.
다시 한번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원작을 똑바로 읽었어야 했다. 그것도 최소 두 번은!
결국 나는 어색하게 바리다스의 손을 맞잡았다.
몇 번이고 잡았던 손인데, 오늘따라 조금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식장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토마와 렌 그리고 쌍둥이를 본 자스민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생일 축하해, 자스민.”
아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고 준비한 선물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들을 받아 든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밝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고마어!”
뒤이어 바리다스가 준비한 선물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인형 말고도 더 준비한 것이 많은지,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장난감 성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식당 한쪽이 바리다스의 선물로 가득 찼다.
“생일 축하한다, 자스민.”
그의 말에 자스민은 바리다스에게 달려가 그의 볼에 뽀뽀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바리다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자스민은 웃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감사해여.”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선물을 줄 차례였다.
나는 어제 사 온 완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자스민은 내게도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볼에 뽀뽀를 해 준 뒤 입을 열었다.
“열어바도 대여?”
“당연하지.”
내 대답에 자스민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묶인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완드에 달린 보석이 반짝이며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완드가 마음에 든 것인지 자스민의 두 눈이 커졌다.
“완존 예뻐, 고마워 형수밈!”
자스민이 좋아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키가 작은 자스민의 반 정도 되는 길이의 완드는 조금 커 보이긴 했으나, 무거운 편은 아니니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다행이네.”
내 말에 자스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나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형수밈이 해주는 건 다 좋아, 드레스도 딸기 우유도 생일 선물도 전부. 형수밈이 와서 난 진짜로 행보캐.”
너무나 사랑스러운 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 * *
모두가 피오라와 자스민의 훈훈한 모습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오직 한 명 바리다스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딸기 우유가 뭐지?
이름만 들어도 달콤할 것 같은 이름에 그의 시선이 아이들과 자스민의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분홍색의 음료로 향했다.
저게 딸기 우유인가.
바리다스가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보며 딸기 우유를 가리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색의 음료가 배달되었다.
그 음료에서 느껴지는 달콤하고 강한 딸기 향에 바리다스는 홀린 것처럼 한 모금 딸기 우유를 들이켰다.
처음 맛보는 달콤함과 고소함에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어느 주방장의 작품이지?
라고 그가 생각한 순간, 피오라가 입을 열었다.
“딸기 우유, 입맛에 맞아요?”
피오라가 만들어 준 커피와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니,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라떼만큼, 달달하네요.”
* * *
현대인 만큼이나 익숙하게 신조어를 쓰는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리다스의 취향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가져다주지 않았는데. 그는 내 생각보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젊은이들이 사이좋네.”
레몬이 속닥였고.
“그러게 보기 아주 좋아.”
그린이 맞받아쳤다.
“근데, 내가 바쓸 땐 형수밈이 아까운 거 가타.”
자스민이 말했고 토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렌은 말했다.
“자스민, 오빠한테 생일 선물로 형수님을 달라고 하는 건 어때?”
“나쁘지 않네.”
아이들은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