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이른 아침, 바리다스의 집무실에 크림슨이 방문했다. 그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편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 편지에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크림슨의 등장에 바리다스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편지에 찍힌 황실의 인장을 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열자,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돈을 얼마나 쓴 거야.
쯧, 강한 장미향에 표정을 굳히며 낮게 혀를 찬 그는 창문을 연 뒤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읽은 바리다스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험악해져 있었다.
편지에 담긴 잡다한 내용을 제외하고 본론만 말하자면, 곧 있을 황태자 책봉식을 위해 모든 귀족이 수도로 올라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차일드 가의 영지에서 수도까지는 일주일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좁은 마차 안에 종일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치가 떨리는 것 같았다. 어지간한 일이면 미루겠지만, 황태자 책봉식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바리다스가 편지를 내려놓으려던 그 순간, 뒷면에 숨겨져 있던 작은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편지를 든 바리다스의 표정이 굳었다가 미묘하게 풀어졌다.
아내분도 꼭 데려오도록, 친애하는 후배에게.
하아.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빠질 수는 없겠군.
그래도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볼 생각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크림슨, 언제든 수도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어차피 가야 할 거라면, 빨리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먼 여행길을 피오라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어보러 가야겠군.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김에, 그 커피도 부탁하고 말이야.
자스민 생일 파티 이후로 피오라는 하루에 한 잔씩, 바리다스에게 라떼를 만들어 주었다.
그 덕에 바리다스의 방은 그가 즐겨 마시던 박하 차의 향이 아닌, 연한 커피 향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 * *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그의 방문에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리다스.”
이름을 부르자, 바리다스는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한 뒤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처럼, 라떼를 만들어 달라고 방문한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무슨 일이에요?”
“며칠 뒤 있을, 황태자 책봉식 때문에 수도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일에 맥이 빠지는 거 같았다.
수도라면 거리가 꽤 되니, 이 주 정도는 안 돌아오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저만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겁니다.”
이어진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차일드 가의 영지에서 수도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조선시대에 한양까지 과거 보러 가는 거도 아니고, 일주일이라니.
그래도 그의 앞에서 차마 싫은 티를 낼 수 없었던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빨리 준비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역시, 그의 눈치는 백단이었다. 내 가식적인 웃음을 꿰뚫어본 그는 괜찮다는 듯 덤덤한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 힘들다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 * *
바리다스는 알고 있었다. 차일드 가에서 수도까지 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이다.
숲에 위치한 차일드 가의 영지는 숲과 산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수도까지 가는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마차를 타도 진흙탕 돌밭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고 그랬기에 그는 수도로 갈 때, 마차보다 말을 선호했다.
하지만 피오라가 말을 탈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 그녀는 포장된 도로가 나오기 전까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곱게 자란 피오라한테는 꽤나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선배, 아니 황제에게 무어라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피오라가 입을 열었다.
* * *
“아뇨, 같이 가요. 저도 차일드 가의 일원으로서 참석할 의무가 있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내가 아이들에게 항상 해주는 것처럼, 그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바리다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커피, 한 잔 부탁해도 될까요?”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 서러울 뻔했다.
“당연하죠.”
수도로 갈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사용인들이 드레스와 장신구를 챙긴 것이 다였다. 책봉식과 연회에 참가할 때 입을 옷은 맞춤 제작했고, 다른 날에 입을 드레스는 수도에 올라가서 구매하기로 했다.
나는 방 한쪽에 자리한 새로 맞춘 드레스를 바라봤다.
여러 가지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드레스는 나 비싸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심지어 바리다스가 선물해준 목걸이는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작게 세공된 수백 개의 다이아가 목 주위를 감싸는 형태였는데 그것보다 몇 배 비싸 보이는 커다란 블루 다이아가 가운데에 다섯 개 달려 있었다.
절대 잃어버리거나 망가트리지 말아야지.
나는 그 목걸이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아무리 봐도 그게 내 몸값보다 비쌀 것 같았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자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대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내일이구나.
내일 이제 바리다스와 함께 수도로 향한다. 일주일을 마차에서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지만 한 편으로는 수도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어느 나라든 수도가 가장 발전하기 나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스민은 훌쩍이며 내 품에 안겼고 레몬과 그린은 내 옷 소매를 잡았다.
“안 가면 안 대…?”
수도로 가는 것이 결정 난 이후로 며칠을 설득했지만, 아이들은 내가 떠나는 것이 싫은 듯했다.
아마,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이겠지.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내가 평생 아이들의 곁에 있어 줄 수도 없었으니, 이건 언젠가는 겪어봐야 하는 일이었다.
“안 돼.”
내 단호한 말에 자스민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수밈 미어!”
자스민을 따라 렌이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쩐담.
그래도 자스민에 비해 쌍둥이는 담담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그의 우는 모습을 본 레몬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야아, 왜 울어… 너가 우니까 나도….”
그렇게 두 아이는 내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 겨우 한 달 떨어지는 것인데,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 충격이 너무나 큰 모양이었다.
그때 남은 아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젓하게 지켜보고 있던 토마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그렇게 울면 안 되지. 형수님은 아주 잠깐, 한 달만 비우시는 거라고. 돌아오실 거야.”
토마의 말을 보증하듯 나는 양손으로 레몬과 그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멀리 가는 거도 아니고, 오래 떠나는 거도 아니야. 편지도 계속 쓸 거고 연락도 계속할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말자.”
내 말에 레몬은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매일 연락해줘야 해.”
그렇게 말하며 레몬은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안 보내줄 것처럼 말하더니, 상자 안에는 작은 수정구가 한 쌍 들어 있었다.
원작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이건 마탑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연인들을 위해 출시한 것으로 한 쌍의 구슬을 나눠 가진 사람들끼리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이거라면 거의 매일 아이들과 연락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고마워.”
나는 웃으며 레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렌이 자스민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다시 마주한 자스민은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민아, 나 안 볼 거야?”
“안 간다구, 하면….”
라고 말하는 자스민의 목소리는 잔뜩 운 듯, 쉬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럽고 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 기억에 갇혀 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자스민을 품에 안았다.
“매일 연락할 거고, 편지도 자주 쓸게. 그러니까, 응?”
내 말에 자스민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라써… 약속이야….”
오래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멀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떠난 일이 강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약속할게.”
내가 새끼손가락을 펴 내밀자 자스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는 이런 문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나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뒤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해.”
그런 내 행동에 자스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이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도, 나랑도 약속!”
“형수님 나도!”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귀여운데 너희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가, 죽어도 돌아올 거야.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 * *
다음 날, 짐을 실은 마차와 내가 탈 마차가 공작가 앞에 준비되었다.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크림슨.”
내 말에 크림슨은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나는 한 명씩, 아이들의 이마에 입을 맞춰준 뒤 마차에 올랐다.
그때 자스민이 달려오더니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안 울게, 말썽 안 부릴게. 착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자스민이 말을 했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로니까, 꼭 도라와. 약속이야.”
양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하며 자스민이 애써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기특해,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손을 내밀었다.
“그래, 약속할게.”
내가 손가락을 걸자, 자스민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며, 마차가 출발했고 나는 창문을 바라봤다. 공작가의 저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손에는 레몬이 준,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멍하니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건 왜 하는 건가요?”
바리다스는 새끼손가락만 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생각이 나, 웃음을 터트린 나는 똑같이 새끼손가락만 핀 채 그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미로 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나와 맞닿은 그의 손가락에 힘이 조금 들어간 거 같다는 생각은 내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