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39)화 (39/207)

38.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수도로 떠난 지 삼 일째. 나는 마차 안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울창한 숲이나 높은 가을 하늘도 하루 이틀 보니까 좋았지, 삼 일 동안 같은 것만 보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마차의 덜컹거림은 얼마나 심한지, 차라리 만원 지하철을 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멀미가 나올 것만 같아,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리다스가 나를 배려해 매일 마을을 거쳐 밤을 보내고 갔기에, 힘들다고 마차를 멈춰달라 하기는 미안했다.

마차 안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창밖에서 바리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으니, 거기서 잠시 쉬다가 가도록 하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봐온 마을들보다 작았지만, 무언가 알프스를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에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예쁜 마을이었다.

그때 귀족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바리다스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인자해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도련님, 그 호칭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바리다스가 공작이 된 이후, 그를 도련님이라 부른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리다스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드미트르.”

드미트르?

그의 이름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에서 읽은 것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면 꽤 비중이 있는 사람일 텐데….

그때 내 눈에 드미트르의 허리춤에 채워진 칼이 들어왔다. 귀족이 평소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그때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 그 사람이구나.

바리다스가 다니던 아카데미는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집에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런 바리다스를 방학 때마다 돌봐 준 것이 바로 그의 먼 친척인 드미트르였다.

원작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되었다.

그는 바리다스에게 스승이었고, 친구였고, 아버지였다.

그랬기에, 바리다스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그가 원작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내가 죽이던가?

대부분의 악의 원인이 피오라다 보니, 이젠 저절로 내가 모든 사건의 범인 같았다.

그때 드미트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 분은…?”

그의 갈색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그의 인자한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무언가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안 죽였어요! 아마도요!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외치던 그때 바리다스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아주 살짝, 얹어진 그의 손을 바라보던 그때, 바리다스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제 약혼녀입니다.”

그의 말에 드미트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눈에 보여,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둘이 많이 사이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드미트르의 말에 바리다스는 결정하라는 듯 내 쪽을 바라봤다. 

나도 마을 구경을 더 하고 싶었기에 딱히 상관없었다. 그리고 드미트르가 왜 죽는지에 대한 단서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오지랖이긴 하지만, 바리다스에게 소중한 사람이니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저는 좋아요.”

내 대답에 드미트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계시는 동안,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드미트르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그가 지내는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약간 성당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미트르는 저택으로 가는 동안, 나에게 바리다스의 옛날 얘기나 자신이 다스리는 마을에 대해 소개를 해 주었다. 그의 언행은 부드러웠고, 행동에서 나를 배려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고 드미트르는 우리의 앞에, 바리다스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르가 준비한 식사가 나왔다.

금가루가 뿌려진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붉은 리본으로 묶인 오리, 거기에 사과를 물고 있는 새끼 돼지 구이까지.

영화에서만 봤지, 이런 걸 현실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를 위해 많이 신경을 쓴 것인지 접시마저 광이 날 정도로 반짝였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해요.”

내 인사에 드미트르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내게 스테이크를 건넸다.

“어서 드시지요.”

드미트르가 준비한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고기는 살살 녹는 것 같았고 샐러드는 담백하게 맛있었다.

내가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그때 기사 한 명이 바리다스에게 다가왔다.

“공작님, 에드워드가 날뛰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인 에드워드는 바리다스가 외국의 왕에게 선물 받은 족보 있는 명마였다. 하지만 야생마 기질이 남아있어 날뛰는 것을 좋아했고 그때는 오직 그가 강하다고 인정한 바리다스만이 말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공작가에 두고 올 수 없어 언제나 데리고 다니긴 했지만 가끔 한 번씩, 이렇게 날뛰고는 했다.

결국 바리다스는 에드워드를 제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무언가 시아버지와 둘이 남은 느낌이 들어, 나는 드미트르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무어라 말할지 고민하던 그때, 드미트르쪽에서 커다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쿨럭!”

기침 소리에 깜짝 놀란 내가 드미트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드미트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는 이미, 그의 입가에 묻은 피는 사라진 뒤였다.

내가 물어볼 틈도 없이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드미트르가 죽는 이유가, 결코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바리다스의 앞에서 차마 그에게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응접실에는 바리다스의 방과 같은 시원한 민트 향이 퍼져 있었다.

그 향이 둘의 사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려 주는 것 같아 나는 드미트르의 눈치를 보며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드미트르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오랜만에 도련님이 우려 주신, 차가 마시고 싶습니다.”

바리다스와 차라니 무언가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 잠시, 드미트르를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는?”

바리다스와 드미트르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바리다스가 방 밖으로 나갔고 드미트르와 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내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드미트르가 입을 열었다.

“보셨지요?”

여기 남자들은 왜 이리 눈치가 빠른지.

나는 머뭇거리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행동에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 그는 입을 열었다.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 그렇구나.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드미트르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건, 원작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았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 같은 건 없습니다. 도련님도 이제 혼자가 아니고 말이죠.”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제가 없더라도,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 따위는 없는 정략혼이었다. 그 사실은 드미트르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바리다스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떠난 뒤에, 바리다스가 무너질 것을 알기에. 그의 모습에,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저라도 괜찮다면…노력해 볼게요.”

내 말에 드미트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방 안에 화한 향기가 올라왔다. 차를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해 본 터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그가 타온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방 안에 퍼져 있는 강한 민트 향이 입안에 부드럽게 퍼졌다.

민트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차는 꽤나 입에 맞았다.

“맛있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드미트르도 마음에 드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우려낸 차를 음미했다. 이 시간이 아주 소중한 것처럼, 순간순간을 담아두려는 듯이.

* * *

다음 날, 우리는 드미트르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바리다스는 왜인지, 에드워드가 아닌 마차에 나와 함께 탑승했는데, 이건 수도로 떠난 첫날을 제외한 삼 일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눈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 드미트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별 얘기 하지 않았어요.”

나의 말에 바리다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드미트르가 지은 미소와 닮은 그런 슬픈 웃음이었다.

알고 있구나.

바리다스는 드미트르가 생각하는 것 보다, 그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뭘 그리 숨기려 하는지.”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네요, 예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는 드미트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괜한 거짓말로 둘의 사이를 망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저야말로 괜히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바리다스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위로받아야 할 건 그인데, 오히려 역으로 위로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오래 살 거다, 이겨 낼 거다. 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는 멀지 않은 미래에 죽을 것이니까.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드미트르 씨는 바리다스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해 보이셨어요. 정말로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는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춘 그는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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