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바리다스의 영지보다 몇 배는 높은 건물들과 마차 그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가 수도구나.
드미트르와 헤어진 뒤, 무려 5일 정도를 더 달려 우리는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에 한 가운데에 있는 황궁은 그림 속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왕궁의 모습이었다.
창밖으로 멍하니 황궁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바리다스가 말했다.
“내리시죠.”
어느새 멈춘 마차에서 내린 바리다스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마차에서 내리자,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이렇게 바로 만나러 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닌가?
잘 생각해 보니, 희소성으로 따지자면 바리다스도 제국의 몇 없는 공작이니 별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사들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황궁의 실내는 외부 만큼이나 화려했다. 나는 르브르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커다란 석고 여신상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엄청나게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외쳤다.
“바리다스 차일드 공작님과 피오라 드 데이먼 황녀님이십니다!”
그러자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 쌍의 남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금발의 남자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황제면 뭔가, 커다란 왕좌에 앉아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 화려해진 것을 제외하면 공작가의 응접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근데,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내가 고민하던 그때, 바리다스가 먼저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그의 인사를 따라하며 나는 드레스를 살짝 들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인사가 끝나자, 황제는 손을 들어 의자를 가리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흔히 말하는 기품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그가 지구에서 살았다면 인간 루이X똥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네, 공작. 그리고 피오라 황녀.”
목소리마저 기품이 묻어져 나왔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황제의 모습을 훑었다.
내 시선은 그의 머리카락에 향해 있었는데 아이들도 그렇고, 이 세계 사람들의 머리색은 대부분 독특했다.
하지만 황제의 머리 같은 색은 처음 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햇빛을 머금은 것만 같아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제님, 잘못 태어나신 것 같은데요. 지구에서 태어났으면 샴푸 광고와 루이X똥 광고 전부 다 섭렵하셨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때 황제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군, 황녀.”
그, 저랑은 초면이긴 해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걸로 화답했다.
그런 내 미소에 황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후는 수줍은 듯 웃으며 내 눈을 피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 개쯤 생겼다.
그런 황후의 모습을 본 황제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공작이 약혼을 했나 했더니, 이유가 다 있었군.”
아 설마, 황후 언니. 내가 예뻐서 그런 거예요?
황후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인정하긴 했다. 피오라의 외모라면 여자 남자 안 가리고 꼬실 수 있었으니까.
그럼 나는 인간 프X다 할래.
“과찬이세요.”
하지만 겉으로 저런 소리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내숭을 떨었다. 다만 속으로는 피오라 얼굴 최고, 존예, 여신. 등등의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소년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제를 똑 닮은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그는 우리가 보이지도 않는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황제의 팔에 매달렸다.
“아빠! 나 대저택 사줘!!”
이게, 황실 스케일인가.
하는 짓은 부모에게 조르는 평범한 꼬마와 차이가 없었지만, 원하는 물건의 스케일이 남달랐다.
그런 아들이 부끄러운 것인지. 황제는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그를 팔에서 떨쳐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손님이 있으니, 나중에 오려무나. 레이안.”
하지만 레이안은 그런 거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손님이 있으니 믿고 더 저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바닥에 드러눕더니 팔다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할 때 주로 쓰는 기술 중 하나인, 일명 땡깡이었다.
정말 차일드 가의 아이들이 정말 얌전한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왜 리리안은 사주면서 난 안 사주는데, 나도 사달라고!!!!!”
그 모습에 예전 유치원에서 말 안 듣던 아이들이 떠올라 ptsd가 올 것 같았다.
두통을 느낀 나는 황후와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그녀도 레이안 때문에 꽤나 고생을 해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안의 눈에는 뵈는 것이 없는지 그는 계속 발을 동동 구르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바리다스의 표정도 결국 찌푸려졌고 참지 못한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피스의 팔을 붙잡더니 소리쳤다.
“가만히 좀 있어!”
황족이고 나발이고, 애들은 애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은 어떻게 혼내도 끝까지 말썽을 부린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씨, 아빠 미워!!”
저 패턴은 지구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쟤 황태자 되는 거 아니었어?
…나라 망했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레이안이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황제는 이제 손님이고 나발이고 자식 교육이 우선이라 판단한 것인지, 옆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잡아 와.”
기사들이 방 밖으로 나가자 한숨을 내쉰 그는 나와 바리다스를 돌아보았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라고 말하는 그의 머리는 아까보다 색이 바랜 것 같았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닮아, 쾌활하군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황제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돼?
하지만 황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웃음을 터트리더니. 입을 열었다.
“…후배나, 아들이나 교육을 잘못 시켰군.”
“아쉽게도, 폐하께 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군요.”
그 둘의 대화에 나와 황후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제와 공작의 관계라기엔 필요 이상으로 친밀해 보였다.
둘이 무슨 사이야 대체?
그녀도 내게 그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그때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레이안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황후가 그에게 손짓하자, 그는 황후의 품에 레이안를 내려 주었다.
레이안은 울먹이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엄마아….”
하지만 황후도 이번에는 화가 많이 난 듯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를 뒤집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엉덩이를 향했다.
찰싹!
꽤나 많이 때려 본 것인지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레이안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손님. 있을 땐. 그러지. 말라고. 했.지!”
방금까지도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다른 사람 앞에서 맞은 것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나와 바리다스를 바라보는 레이안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렇게 엉덩이를 한 열 대쯤 맞은 레이안을 울먹이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후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울먹이는 레이안을 무시한 채 우리를 돌아봤다.
사납게 찌푸리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유해졌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네요.”
라고 말하며 호호 웃은 그녀는 레이안을 잡아 우리 앞으로 끌고 왔다.
레이안은 주먹을 꾹 쥐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머리를 한 가닥으로 곱게 묶은 한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실의 문양이 있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황녀다, 라고 말이다.
그녀의 등장에 레이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모습에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동생이자 황녀인 리리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앗, 손님이 계셨군요. 제 1황녀, 리리안이라고 합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우아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생각했다.
황제가 인간 루이X똥이라면 그녀는 인간 샤X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레이안을 무시한 채, 황제와 황후에게 걸어갔다.
“아버지, 저 이번 책봉식이 끝나면 에메랄드 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야. 이번에는 궁궐이야?
나는 다시 한 번 황실에 스케일에 감탄했다.
“레이안이 황태자가 되면, 이제 루비 궁으로 옮겨 갈 테니 제가 그 궁궐을 가지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흠, 하고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리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황제를 껴안았다.
레이안을 바라보자 진짜 왜 자신의 말을 아버지가 안 들어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의 양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진짜, 나라 망한 것 같은데.
레이안이 황제 되기 전에 아이들 데리고 데이먼으로 도망갈까.
내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리리안과 레이안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안과는 다르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안에게 입 모양으로 소근 거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잘해야지, 멍청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황족이든 뭐든 남매는 남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이좋은 아이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갔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 황제는 나와 바리다스의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그들에게 속으로 응원의 말을 전하던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공작과 황녀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건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그의 말에 대기하던 시종이 다가왔고, 황제는 그에게 손짓했다.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해주게.”
그렇게 우리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안내되었다.
준비된 방에 도착한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그렇게 신이 난 나는 방을 구경하고 드레스를 정리하느라, 준비된 방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