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방 정리를 마친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천장에 달린 번쩍이는 샹들리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바리다스는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가버린 뒤였고, 이곳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이들도, 로나와 레나도 애초에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나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멍하니 상들리에에 달린 보석 수를 세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궁 관광이라도 할래.
나는 책상 위에 준비된 종을 울리자 한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샌드위치랑, 음료수 좀 준비해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바구니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다른 시녀들이 나를 따라오려 했으나, 오랜만에 혼자 있고 싶었기에 나는 그들을 거절한 채 혼자 방 밖으로 나갔다.
해가 뜬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적당히 부는 바람은 선선했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나는 예뻤다.
이게 영화가 아니면 뭐가 영화냔 말이냐. 아, 이어폰만 있었으면 분위기 좋은 노래 딱 틀고 가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황궁에 관련된 정보는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정원을 걷고 있던 그때, 햇빛 아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건….
저 독특한 금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안이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굳이 말을 걸거나 아는 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내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레이안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성이 생겨 버렸다.
오지랖에다, 직업병이 맞지만 울고 있는 애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나는 레이안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왜 울고 있니?”
내 질문에 레이안은 나를 올려다보더니, 바로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갔고 내가 슬슬 다리가 저리다고 생각할 때쯤,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왜, 안 가?”
평소 같으면 어른한테 반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겠지만 그는 다른 아이들과 자라온 상황이 달랐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태어나 언제나 존중받으며 살아온 데다가, 황족이 다른 사람에게 존칭을 쓸 일도 적었으니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너는 혼 좀 나야겠다.
부드럽게 웃은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그야,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니까.”
내 말에 레이안은 내 손을 쳐내더니, 표정을 구겼다.
자신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가 될 사람이야. 그냥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너 같은 귀족이 함부로 말을 놓을만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그러면 어쩌게, 나는 아까 니가 조르는 거도 다 봤는걸.
“그래.”
내 대답에 그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무지해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하지만 그는 말을 더 이어나가지 못했다.
내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그의 입에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내가 그냥 귀족은 아니어서, 데이먼 제국의 제 3황녀. 피오라라고 해. 꼬마 황자님.”
내 말에 샌드위치를 문 레이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아예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네.
이걸, 제국에 희망이 있다고 봐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황녀님께서 말을 안 해준 겁니다.”
제국 망했어. 희망 없어. 이 나라는 끝이야.
조금이나마 버릇을 고쳐 보려 했지만,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답이 없었다.
“그래, 뭐 그렇다 치자.”
내 대답에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깔아 내 시선을 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반말을 한 점은… 죄송합니다.”
나에게 사과하는 레이안의 양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의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예 답이 없지는 않네.
어리다는 것이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리다는 말로 그 사람을 변호하곤 한다.
어리다는 말은 아직 미숙하다는 것이고, 모두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직 어린아이들을 보살피고, 이해해주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 왔으니까.
떡잎부터 글러 먹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군.
조금은 레이안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망하면 안 되지, 내 아이들이 살 곳인데.
내가 그렇게 뛰어난 교육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의 마음은 잘 안다고.
나는 어느샌가 샌드위치를 오물거리고 있는 그에게 오렌지주스를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용서해 줄게. 대신 왜 울고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하지만 레이안은 망설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곳에 있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데이먼 제국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레이안도 귀족이나 황족들에게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결국 내 말에 넘어간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빠는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해요.”
너무 귀여운 이유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 나이대 아이들이 고민하는 건 여기나, 지구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위치나, 배경을 생각하며 내가 무어라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멍청한 소리하고 있네. 레이안.”
찬란한 백금발을 반짝이며 리리안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본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레이안의 얼굴을 붙잡으며 말했다.
“밖에서 굶는 아이들을 생각해 봐, 그에 비해 너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는지.”
그런 그녀의 말에 표정을 잔뜩 구긴 레이안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얼굴을 흔들었다.
“이거 놔, 리리안.”
하지만 그의 말에도 리리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흥, 미워하긴 뭘 미워해.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황태자가 되었으면서, 복에 겨웠어 오빠는.”
그녀의 말에 레이안은 이를 갈더니 리리안의 손을 잡고 바닥으로 떨쳐냈다.
그런 레이안의 행동에 리리안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내가 원해서 황자로 태어났어? 나는 황태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고!!”
라고 말한 그는 도망치듯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런 레이안의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리리안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위로해 주지 마세요. 오빠는 현실을 알아야 해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은, 너무 어린아이고 한 명은 너무 빨리 현실을 체념해 버렸다.
황제 부부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역시 자식들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아직 어려, 벌써부터 왜 굳이 어른이 되려고 해?”
내 말에 리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레이안을 찾아 그가 떠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레이안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나무 아래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레이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아?”
내 질문에 레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옆에 걸터앉자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고민을 말해도 다들 황태자가 복에 겨웠다는 소리를 하지?”
내 말에 레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 말 만큼 나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든 힘든 상황은 오기 마련이다. 그 상황에서 위로를 해주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불행이나 그 사람의 행복을 이유로 대며, 네가 왜 힘드냐고 하는 것 말이다.
“나쁜 사람들이네. 힘든 건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오는 일인데 말이야.”
레이안에게는 고민을 들어줄 친구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택한 방법이 바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겠지.
레이안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말해보렴, 네가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내 말에 레이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가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더 지내고 싶어요. 난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왜 황태자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그러면 넌 뭐를 하고 싶은데?”
하지만 뒤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봤을 땐, 넌 황태자가 되기 싫은 건 아닌 거 같아. 그저 알리고 싶은 거지, 황태자라는 자리보다 아직 부모님의 사랑이 더 필요하다고.”
그의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황태자가 되면 자신의 행동이 더 중요해짐을 알았기에, 일부러 부모님 앞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서 말썽을 부린 것 같았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니, 그렇게까지 철이 없거나 교육을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레이안은 흔히 말하는 애정 결핍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레이안은 침묵으로 나의 말에 긍정했다.
“정말, 황태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그래도 아직 조금 더 엄마 아빠랑 지내고 싶어요.”
시무룩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네가 황태자가 된다고 해서, 두 분이 너의 부모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관심이 없으면 혼내지도 않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내 말에 레이안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무리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는 걸요.”
“아까처럼 말을 하면, 누가 들어 줘. 진지하게 말을 해야지. 솔직하게 원하는 걸 말 해봐.”
레이안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눈물이 가득 묻어져 나오는 그 말은 레이안의 진심이었다.
“…대저택이나 궁궐 같은 거 다 필요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제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조금만 더, 어린아이로 있고 싶어요.”
드디어 들은 레이안의 진심이 담긴 대답에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을 하는 그가 기특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레이안은 반항하지 않고 내 손에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토마와 그린이 떠올랐다.
레이안은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 같았다.
“친구는, 그래. 나중에 시간이 있다면 공작가에 놀러 오렴. 좋은 친구들을 소개해 줄게.”
내 말에 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데이먼 제국의 황녀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그 초대에 꼭 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비 황태자님의 말씀,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내 말에 레이안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만이 지을 수 있는 맑은 미소에 나는 생각했다.
나라, 안 망하겠네.
레이안이 부모님과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가 두고 온 바구니를 건네주더니, 입을 열었다.
“저 멍청이에게 현실을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약간 렌을 닮은 것 같았다.
조금 많이 직설적인 렌 말이다.
“그래.”
“저 멍청이가 황태자가 되지 않으면 제가 황제가 되어야 하니 말이죠.”
그런 귀찮은 걸 왜 해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 내 행동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오빠에게 그런 말은 나빠.”
“오빠다워야 오빠라고 하는 거랬어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남은 샌드위치를 그녀에게도 준 나는 입을 열었다.
“시간이 있으면, 너도 공작가에 놀러 오렴. 너와 잘 맞을 것 같은 친구들이 있단다.”
“그 초대, 기꺼이 받아들일게요.”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도 공작가에서 거의 나간 적이 없을 텐데, 친구가 있을까?
어릴 때부터 사회성을 기르는 건 중요한 일이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