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방으로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피곤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언제나 힘들었다.
황자와 황녀 성격을 보니, 황제 부부가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만약 두 아이에게 사춘기가 심하게 온다면, 황제의 빛나는 백금발은 바닥과 하나가 되겠지. 그 예쁜 머리가 빠지는 건 좀 슬플지도.
쓸데없는 잡생각을 치우고 몸을 옆으로 돌려 시계를 바라보자, 시간은 어느새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리다스는 언제쯤 오려나.
시간이 꽤나 지났을 텐데, 아직 안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일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내 눈에 아까 가져온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나는 바구니에서 주스를 마시고 남은 두 개의 보냉병을 꺼냈다. 그리고 방 한쪽에 서 있던 시녀를 향해 말했다.
“커피 원액이랑, 우유 그리고 얼음을 좀 가져다줄래? 아, 가능하다면 생크림도.”
“알겠습니다!”
내 말에 시녀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내가 부탁한 모든 것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말씀하신 대로 가져왔어요!”
시녀는 물건들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 정도로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원액을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진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우와….”
이렇게 진한 향이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재료만 섞으면 되었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라떼를 완성해 보냉병에 담았을 때는, 이미 방 가득히 커피 향이 퍼져 있었다.
나는 보냉병을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보냉병에 붙은 마정석은 반영구적인 성질이 있으니, 아마 얼음도 녹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해두면 마시고 싶을 때, 마시겠지.
커피를 모두 만들고 나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하품을 뱉은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은 아이들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자정이 지난 새벽.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말고 방안 가득 퍼진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라떼를 마시지 못했군.
그 사실을 자각하자 피곤함이 더 몰려오는 것 같았다.
겉옷을 벗은 그는 방의 불을 켜는 대신, 침대 옆 스탠드의 버튼을 눌렀다. 황실에 도착하자마자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에, 어서 빨리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불이 켜졌고 침대에 누워있는 피오라의 모습이 바리다스의 눈에 들어왔다.
“으음….”
갑자기 밝아진 주위에 잠자고 있던 피오라가 표정을 구겼다.
놀란 바리다스가 다시 스탠드의 버튼을 눌러 방의 불을 껐다.
어두워진 방 안을 대충 둘러본 그는 표정을 구겼다. 방 안에 침대가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할….”
작게 중얼거린 그가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건 보냉병에 붙어 있는 보석이었다.
반짝임의 정체를 확인한 바리다스가 보냉병을 잡아들자, 피오라가 적어둔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 열심히 하세요.
조금은 딱딱해 보이는 쪽지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든 모양이었다. 쪽지를 읽은 바리다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으니 말이다.
피오라가 누워있는 침대를 한 번 바라본 그는 생각했다.
오늘 잠은 다 잤군.
차라리 일을 모두 끝내는 게 났겠다고 생각한 그는 라떼를 들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황제는 바리다스를 위해 집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방을 따로 내어주었는데 종일 서류를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쉰 뒤 피오라가 만들어 준 라떼 중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남은 하나를 컵에 따랐다. 그러자 금세 방 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이, 조금이나마 더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듯했다.
그렇게 바리다스가 의자에 앉은 순간, 누군가 노크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리스, 아직도 안 자고 있어?”
저 리스라는 애칭은 여전했다, 표정을 구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후배를 보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는 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바로 옆에 준비된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바리다스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아킬레스의 모습에,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찬 바리다스는 커피를 마시며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관심을 안 주면 알아서 나가겠지.
자칫하면 황실 모독이 될 수도 있는 생각을 거침없이 하며 바리다스는 커피를 마셨다.
그런 바리다스의 생각을 모르는 황제, 그러니까 아킬레스는 아까 바리다스와 하지 못한 대화를 더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피오라에 대해서도 말이다.
아킬레스는 피오라가 아이들에게 해준 말들을,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던 기사들을 통해 들은 참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 레이안이 찾아와 앞으로는 말썽을 안 부리겠다고 사과를 했다. 죽어도 말을 안 듣던 그 말썽꾸러기가 말이다.
자신의 말도 안 듣는 아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단기간에 녹이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오라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바리다스의 허락을 받아야겠지.
그때, 바리다스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테이블에 놓인 보냉병이 들어왔다.
그 안에는 커피 같아 보이지만, 조금 더 불투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도 진한 커피 향이 가득 차 있었다. 황실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주로 사용하는 커피 향이었다.
아카데미 시절, 커피는 쓰다고 죽어도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손을 뻗어, 커피로 추정되는 것이 담겨있는 병을 잡아들었다.
“이거 마셔도 돼?”
그의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황제 앞에서 이렇게 표정을 구길 수 있는 건, 그뿐일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다스는 단호하게 그에게서 병을 뺏어 들었다.
“안 됩니다.”
얼마만에 마시는 라떼인데, 쉽게 내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 아킬레스는 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매우 귀찮아하며, 그냥 마시라고 말할 텐데, 저게 뭐길래 바리다스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왜?”
반짝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본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포기 안 하겠군.
저 푸른 눈을 반짝이며 황제가 되겠다고 말한 그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까.
“한 잔 만입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아킬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맛있길래, 그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바리다스는 컵을 하나 더 가져와, 커피를 따라 주었다.
“고맙네.”
바리다스에게서 컵을 받아든 아킬레스는 고민 없이 커피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눈이 커졌다.
뭐야, 이거.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진한 맛이었다.
이 부드러운 목 넘김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물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거라면 커피를 황후, 아니 아필레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 책봉식 전에 개최하는 티 파티 때문에 아필레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떠오른 아킬레스는 입을 열었다.
“이 커피, 누가 만든 거지?”
하지만 바리다스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하기 싫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아킬레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황녀, 아니. 네 약혼자가 만든 것인가?”
여전히 그가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며 바리다스는 표정을 구겼다.
역시, 주는 게 아니었다.
피오라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잡아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킬레스는 시종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시종에게서 편지지를 받아든 뒤 무어라 휘갈기더니 바리다스에게 내밀었다.
그 편지에는 황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아무리 그여도 거부할 수 없었다.
“황제 일가와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영광으로 여기도록.”
“그런 영광 필요 없습니다.”
편지를 받으면서도, 바리다스의 표정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그에 비해, 아킬레스는 누구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근 아필레는 아들 레이안의 말썽과 티 파티 준비로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늘 밝고 아름다웠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는 걸 곁에서 지켜보려니, 저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피오라가 도와준다면, 아필레의 짐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킬레스는 피오라에게 무엇으로 보상해 줘야 할지 고민하며, 바리다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양할 거 없고, 네 약혼녀를 꼭 데려오도록 해.”
제 할 말만을 던진 뒤 상쾌한 표정으로 방 밖을 나가는 아킬레스를 보며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킬레스가 주고 간 편지에는 내일 저녁식사에 차일드 가를 초대한다고 적혀 있었다.
황자, 황녀와 피오라가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리다스는 피오라를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피오라가 자처한 일인데 말이다.
* * *
이른 새벽. 나는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침대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더 푹 잔 것 같았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생각했다.
잘 잤다. 오늘은 뭘 하지?
평소라면 아이들과 함께 놀았을 텐데, 주위가 조용하니 좋긴 했지만 조금 쓸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황실 남매랑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내가 마음대로 붙인 별명인 황실 남매를 생각하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뭐, 어차피 만나게 되겠지.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데 바리다스는 안 들어온 건가.
방에 침대가 하나라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 많나 보네.
복도로 나간 나는 무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수도를 구경할까, 아니면 황실을 조금 더 둘러볼까. 아, 황실 도서관이랑 마탑에도 가 보고 싶은데.
내가 고민하며 걷는 사이, 내 뒤로 칠드런과 시녀 셋이 붙어 줄을 지어 걸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부담스러웠다.
칠드런으로도 충분한데. 어쩌겠어. 이게 여기의 규칙인걸.
“황실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나요?”
내 말에 시녀들 중 가장 키가 큰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네, 귀족들에게도 개방된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럼 황족들이 가는 도서관은 따로 있다는 말이네.
그곳도 구경해보고 싶지만, 박물관에도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 있는 법이니까.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거기로 안내해 주세요.”
그렇게 도서관을 향해 걷고 있던 도중 칠드런이 나를 불렀다.
“황녀님.”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도 괜찮아.”
내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황실 기사단에 다녀와도 될까요?”
아니, 겨우 그런 걸로 고민한 거였어?
어차피 황궁은 황실 기사단이 아니면 검을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칠드런에게도 많은 경험이 필요하겠지.
황실 기사단은 훌륭한 기사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그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당연하지, 많이 배우고 와.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보냈다고 하고.”
내 말에 칠드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을 향해 달려갔고,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