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황태자 책봉식과 수도
미쳤다.
황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실 도서관은 위엄에 걸맞게 웅장하고 화려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책장들에는 금장 표지를 뒤집어쓴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그 사이로 투명한 샹들리에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만, 저거 진짜 보석인가?
새삼 빙의된 뒤 어째 하는 일이라곤 관광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딱히 상관은 없지. 바리다스한테 수도 구경도 하고 싶다고 해야겠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기에 나는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자리를 잡았다.
꽤나 두께가 있는 소설책이었는데, 한 귀족과 평민 여자의 사랑을 다룬 로맨스 소설이었다.
여기서도 이런 소재가 먹히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내용에 집중하게 된 내가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뒤로 당겼다.
깜짝 놀란 내가 책을 덮고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해가 됐다면, 미안해요.”
어차피 계속 책을 읽다 보니, 눈과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기에 나는 책을 덮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인가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황제가 내게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할 이유라면, 황실 남매가 내 얘기를 한 건가.
“혹시, 그러면 황자와 황녀 전하도 오시나요?”
바리다스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겠네.
아이들을 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황제고 황후고, 딱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게는 익숙한 학부모 면담,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읽던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둔 뒤 도서관 밖으로 나가자, 그가 에스코트를 하려는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수도를 둘러보는 건 어떻습니까?”
같이 가준다면, 나야 좋기야 했지만, 딱 봐도 피곤해 보이는 바리다스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어제도 밤을 지새운 게 분명했다.
“저야 좋죠, 근데 피곤해 보이는데 쉬시는 게 낫지 않아요?”
“상관 없습니다.”
상관 있어 보이는데.
나는 평소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을 띠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 같이 가도 되나.
무언가 어젯밤 야근한 직장인 친구와 놀러 가는 느낌이라 조금 미안했다.
“같이 가시죠.”
아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렇게 말해버리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결국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밤새 일 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다스가 부른 마차가 도착했다.
무려 황실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말이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는 무척 화려했다. 넋을 잃고 올려다보고 있으니 마차에서 한 기사가 내려 내게 예를 차렸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기사단장, 필레스라고 합니다. 폐하께서 오늘 하루 동안 안전하게 모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기사단장뿐만 아니라 기사 셋에 시녀까지 둘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나라도 이건 부담스러운데?
약간 부자 학부모 집에 찾아가 과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건 바리다스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혀를 한 번 찬 그는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너만 남고 나머지는 필요 없으니 돌아가도록.”
그렇게 마차를 운전할 필레스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졌고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근데 기사단장이나 되는 사람을 마부로 써도 되는 거 맞지?
인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마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나간 김에, 드레스도 사러 가죠.”
아, 드레스를 사야 하는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쇼핑을 딱히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드레스를 구경하는 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하지만 그 생각은 쇼핑 30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드레스를 무려 9번이나 갈아입은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평소 친구들과 쇼핑을 할 때도 가장 먼저 지치는 편이었던 나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죽여 줘.
열 번째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뭐가 제일 나아요?”
내 눈에는 다 비싸 보였고 사는 것도 바리다스였기에, 나는 선택권을 바리다스에게 넘겼다.
그래도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정도는 있겠지.
“다 어울리네요.”
아니 그렇게 입에 발린 말을 해 버리면 더 모르겠잖아.
진짜, 뭐 사야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다 주시죠.”
왜 이런 걸로 고민하냐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와, 이거 완전 그런 거 아니야? 그 막 드라마에서 나오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줘. 이런 거. 근데 이거 생각보다 많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바리다스는 이미 결제를 마친 뒤였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내가 왕궁이 필요하다고 해도 사줄 거 같은 그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나는 혹여나 그가 다른 것들도 사러 가자고 할까,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마침 하고 싶은 것도 생각났고 말이다.
“수도 구경하면서 디저트 먹을래요?”
바리다스 마음에도 드는 의견이었는지, 그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퍼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환하게 웃었다. 디저트를 먹는 것보다, 쇼핑에서 벗어난 것이 좋아서 말이다.
살았다…!
멀리 갈 것은 아니기에, 마차를 세워 둔 채 나와 바리다스는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 진열장 속에 여러 가지 디저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카롱부터, 티라미수, 에클레어, 휘낭시에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고였다.
역시 디저트의 본고장은 유럽인 건가. 다 먹어보고 싶어.
하지만 다 먹지 못할 것을 알기에 고민하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어떤 걸로 주문할까요?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전부요!”
대답을 한 뒤에야 나는 아차 싶어 입을 막았다. 디저트들이 너무 맛있어 보인 나머지 생각 그대로 내뱉고 만 것이었다.
그런 내 말에 피식 웃은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전부는 혼자서 못 드실 텐데.”
그의 말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진짜. 망할 무의식.
내가 그렇게 속으로 이불 킥을 백번 쯤 하던 그 순간,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전부 포장해 줘.”
아니 다 못 먹어! 못 먹는다고, 음식 남기기 싫은데. 못 먹을 거라면서 왜 시켜!
내가 바리다스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선수를 쳤다.
“그리고 모두 반으로 나눠서 포장해 주고.”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바리다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다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백만 번쯤 쳤다.
최고야, 바리다스 당신… 로맨스 남주 맞구나. 나 살면서 이렇게 설렌 거 처음이야. 정말로.
바리다스가 반씩 먹어준 덕분에, 나는 그 디저트 가게의 모든 디저트를 맛볼 수 있었다.
전부 맛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휘낭시에였다. 초콜릿이 들어간 것과 바닐라 맛 두 가지였는데, 이건 진짜로 최고였다. 진짜로 엄청 맛있었다.
“진짜 맛있었어요.”
만족스러운 식사에 웃으며 입을 열자 바리다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 특히 휘낭시에가 맛있지 않았나요?”
진짜, 바리다스 당신 최고야. 뭘 좀 알아. 남주 할 만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직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뭘 할까 고민하던 그때, 공작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이들 줄 선물, 미리 사 둬야겠다. 수도에서만 파는 특별한 물건 뭐 없으려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에게 줄 만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하는 건 이미 다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서비스로 나온 쿠키를 먹으며 고민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시내에서 아이들의 선물을 고른다, 열심히. 그리고 그 마음을 선물에 담는다.
진정한 선물은, 마음이니까…!
절대로 내가 선물을 못 골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니라고.
그냥 먹는 걸로 선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휘낭시에 아이들도 좋아할 텐데.
하지만 이걸 가져가기엔 공작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다른 선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수도에서 가장 큰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한다는데 보러 가시겠습니까?”
…선물, 천천히 골라도 되겠지?
뮤지컬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가 보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괜찮겠지.
“네, 가고 싶어요.”
마차에 오른 나는 바리다스와 함께 극장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근데 이거 완전 데이트 코스 아니야? 카페, 영화, 밥… 그러네, 이거 데이트 코스잖아.
근데 코스는 데이트인데, 데이트가 아니네.
약간, 디저트 취향 잘 맞는 친구와 놀러 온 기분이었다.
어차피 바리다스도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잡생각을 쿨하게 넘긴 나는 뮤지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뮤지컬은 로맨스 장르다고 하던데, 역시 로맨스이려나.
공연장에 도착하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바리다스를 알아본 것인지 그를 힐끗거렸지만, 섣불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나도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뮤지컬은 로맨스였다. 관객들 대부분도 커플이었고 말이다.
그것을 보니 친구와 멜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주위에 커플들만 가득했던 옛날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나도 남자랑 왔다. 비록 다른 사람이랑 이어질 남자지만, 아무튼 남자는 남자라고.
의문의 뿌듯함을 느끼며 우리는 시종에게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쁘게 생긴 망원경과 함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이런 자리를 박스석이라고 하던가, 이런 극장은 한국에 거의 없었기에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이 올랐고 한 남자가 나와 인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공연을 시작합니다.”
뮤지컬의 제목은 <뮤지컬의 유령>, 지구에서 유명한 모 공연이 생각나는 제목이었다. 내용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유령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장미를 계속 들고 나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문제는 뮤지컬의 분위기가 내 생각보다 많이 무서웠다는 것이었다.
귀신 역을 맡은 배우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자꾸 막 튀어나와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로맨스라며, 멜로라며. 왜 나는 무서운데!
이제 와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쫄보였다. 그것도 엄청난 쫄보.
귀신이 무섭기보다 이런 으스스한 분위기 자체를 싫어했다.
그때 불이 꺼졌고 여자 주인공의 뒤쪽에서 유령 역을 맡은 배우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나는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소름이 돋은 내가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무서운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개 쫄보였을 뿐.
오버한 것 같아,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 내가 다시 시선을 무대 쪽으로 돌린 순간 유령이 여자 주인공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내 눈을 가려주었다.
“무서운 장면이 끝나면, 말해줄게요.”
진짜, 정말로 민망해서 죽고 싶었다.
어린아이도 안 무서워하는데, 왜 나만 무서워해.
“…감사해요….”
지금 당장 극장에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 뒤로는 남자 주인공이 귀신의 정체를 밝히고 여자 주인공을 구해준 뒤 키스로 끝내는 정석적인 결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양쪽 옆자리에서도 키스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말이다.
민망하진 내가 바리다스를 힐끗 바라보자 그도 들은 것인지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왜 민망함은 내 몫일까.
한참을 지나도 끝나지 않은 키스 소리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차라리 아까 귀신 나오는 장면 볼래,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