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다과회
공연의 시간이 꽤나 길었기에, 극장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돌아가죠.”
아이들의 선물은 다음에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달려온 기사들이 나와 바리다스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안내해 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테이블에 황제 일가가 모여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안이 살짝 웃으며 내게 인사했고 리리안도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제국의 태양과 달, 그리고 작은 태양과 별을 뵙습니다.”
우리의 인사에 황제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에게 인사를 마친 우리가 자리에 앉자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된 요리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했는데, 요리의 놀라운 비주얼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빙의한 뒤로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말이다.
진짜 정말로 피오라의 몸이 아니라 내 몸이었다면, 나는 분명 10키로 이상은 더 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넣었다.
역시나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최고의 맛이었다.
애초에 학부모 면담은 자주 해 봤기에, 딱히 긴장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내가 즐거운 식사를 즐기던 도중,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녀, 내 그대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나?”
정신을 놓고 식사를 즐기던 나는 깜짝 놀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네. 얼마든지요.”
그런 내 반응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황제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둘은 아이 생각이 있나? 황녀라면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데.”
황제의 말에 나는 먹던 음식을 뿜을 뻔했다.
바리다스를 돌아보자, 그는 저게 뭔 헛소리냐는 듯 황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고 말이다.
나 생각을 잘못했나? 학부모 면담이 아니라 상견례에 나온 것 같았다.
아니, 그리고 저희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요. 거의 무조건 성사되는 결혼이긴 한데. 그렇긴 한데!!
자녀계획을 물어보는 건 너무 빠르지 않냐고요, 시아버님… 아니, 학부모님!
고민하던 나는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아직 신혼을 즐기고 싶어서요!”
개소리긴 했지만 내 말에 황제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대답을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완벽한 개구라였어. 라는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으며.
바리다스는 저런 걸 왜 받아 주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났고 황실 남매는 먼저 나가려는 것처럼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아이와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레이안이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부디 책봉식에 꼭 참석해 주세요.”
그의 말에서는 지난번과 다르게 결의가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작게 웃으며 레이안의 손을 잡았다.
“꼭, 참가하겠습니다.”
내 말에 레이안은 환하게 웃었고 그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 있었다.
* * *
피오라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리다스는 똑똑히 보았다.
어린놈이, 감히.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니.
그는 피오라의 손에 끼워져 있는 약혼반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두 아이가 떠난 후, 시종들은 분주히 음식 그릇을 치우고 다과를 세팅했다.
황실이라 그런지 디저트도 남달랐다.
좋은 향과 달콤한 맛에 감탄하며 내가 차를 마시던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황녀, 부탁이 있어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내 말에 황후는 작게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다과회에서, 그대가 만든 커피를 사용하고 싶어요.”
커피…? 무슨 커피?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때, 내 머릿속에서 어젯밤 바리다스에게 라떼 두 병을 만들어 준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드셔본 거구나. 대충 짐작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라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대가 그 커피를 라떼라고 부른다면, 그게 맞겠죠.”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커피를 물이 아닌 우유에 타는 그렇게 어려운 생각도 아니었고 만들기 힘든 음식도 아니었으니.
근데 왜 다과회에? 다과회는 커피보다는 차를 선호하지 않나?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필레가 입을 열었다.
“이번 책봉식에 프레탄 왕국의 왕비가 참석한답니다. 그 전에 있을 다과회를 포함해서요.”
왕국의 왕비라면 대우받아야 마땅하긴 했다.
근데 왜 하필 커피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필레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취미가 여러 가지 종류의 커피와 초콜릿을 먹어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대의 라떼라는 음료가 필요해요.”
그러고 보니 프레탄 왕국이라면 그곳 아닌가.
아프리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은 것 그 왕국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카카오와 원두 생산국이었다.
카카오와 원두라….
마침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거, 두 가지 모두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전생에서 배운 것 중 한 가지는 이거였다.
인맥은 쌓아둬서 나쁠 것 없다.
그렇게 나의 지시하에 움직일 두 명의 파티쉐가 도착했고 우리는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네 명과 마주하게 된 두 파티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둘이 실수하지 않길 바라며, 천천히 요리를 지시했다.
라고 하기엔, 나도 긴장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건 가나슈가 든 초콜릿 봉봉과 자허 토르테였다.
“초콜릿을 넣은 케이크 시트를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초콜릿을 두 개의 냄비에 따로 중탕한 뒤, 하나에는 크림을 넣어 주세요.”
두 명에게 따로 지시를 내린 나는 라떼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물 대신 우유를 사용해 커피를 만들자,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이 세계에서 우유는 어린아이만 마시거나 디저트를 만들 때만 사용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듯했다.
그리고 위에 크림과 초콜릿으로 장식하자, 라떼의 비주얼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필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떼를 완성한 나는 그들에게 라떼를 내밀었다.
라떼를 한 모금 아신 아필레의 눈이 커졌다.
“아킬레스가 지금까지 먹어 본 중에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고 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믿어보길 잘했군요. 마음에 들어요. 혹시 레시피를 구매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게 살 정도의 레시피인가.
물론 커피 그리고 우유와 설탕의 비율 정도가 중요하긴 한데, 겨우 이 정도로 팔기에는 내 양심이 아팠다.
“그냥 사용하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우유랑 홍차를 함께 마셔도 맛있어요.”
내 말에 아필레는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잡았다.
한국에서는 중학생도 알 정도로 별거 아닌 레시피인데, 그녀는 라떼가 많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 정도면 프레탄 왕비도 만족할 거예요.”
“다행이네요.”
그때, 초콜릿이 다 중탕이 된 듯했다.
가나슈는 많이 만들어보지 않아, 정확한 비율은 모르지만 들어가는 재료는 기억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초콜릿 크림에 버터를 조금 추가한 뒤, 조금 더 녹이자 내가 알고 있는 가나슈의 맛이 났다.
만족스러운 풍미에 미소를 지은 나는 초콜릿 틀을 가져와 중탕한 초콜릿을 겉면에 바른 뒤 굳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콜릿이 굳은 것을 확인한 나는 그 사이에 가나슈를 채운 뒤 다시 위를 초콜릿으로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콜릿이 완성되었고 그때, 다른 파티쉐가 다가와 케이크 시트가 다 구워졌다고 했다.
한 번에 맛보는 게 더 났겠지.
시트만 구워지면 자허 토르테는 금방 완성되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반으로 자른 시트에 미리 만들어져 있는 살구잼을 바른 뒤, 중탕하고 남은 초콜릿으로 아이싱을 만들어 위를 덮은 뒤, 휘핑크림으로 마무리했다.
복잡한 디저트는 만들지 못하지만, 간단한 디저트들의 레시피는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직접은 만들지 못할 뿐.
나는 완성된 자허 토르테와 쇼콜라 봉봉을 한 접시에 담았다.
이번에도 똑같이 세 명의 몫을 만들었고 말이다.
황제와 황후는 다과회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서, 바리다스는 그냥 단 걸 좋아하니까.
나는 접시를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꽤 예쁜 비주얼에 모두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곧이어 자허 토르테를 먹은 세 명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킬레스가 감탄했고 아필레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바리다스를 돌아보자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 것으로 보아 그의 마음에도 든 듯했다.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던 그때, 쇼콜라 봉봉까지 먹은 아필레가 입을 열었다.
“이 레시피는 정말로 사고 싶군요.”
아펠레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모두 맛있는 디저트였고 이 정도의 레시피라면 살 가치가 충분했으니 말이다.
“이 레시피를 공개하되, 벌어들이는 수입의 20%를 황녀에게 주는 것은 어떨까요?”
저 정도면, 바리다스와 파혼하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수락했을 조건이지만, 나는 파혼 할 생각이 없는 걸.
어차피 공작부인으로 살면 저 정도의 돈은 있든 없든 상관이 없기에,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 저는 딱히 필요가….”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양하는 것보다는 다른 좋은 곳에 쓰는 게 낫겠지.
나는 빠르게 말을 바꿨다.
“없으니, 제 몫은 수도에 있는 고아원에 기부해주세요.”
그런 내 말에 아킬레스와 아필레의 눈이 커졌다.
바리다스는 왜인지 미소를 지었고 말이다.
“황녀는… 정말 천사인가요?”
아필레의 주접에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킬레스와 바리다스도 아필레에 이어 입을 열었으니 말이다.
“황녀의 마음은 모든 귀족이 본받아야 마땅하군.”
“역시 좋은 사람이야, 그대는.”
아니, 그만 좀 해. 민망하다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은 아마 사과만큼 빨개졌을 것이 분명했다.
“황녀 덕분에 이번 다과회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필레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금박과 함께, 황실의 문양이 박혀있는 편지는 딱 봐도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편지를 받아들자, 아필레는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며칠 뒤 있을, 다과회에 꼭 참석해줘요.”
다과회라,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사교계 활동을 한 것도 없기에 딱히 눈치 보일 것도 없었고 말이다.
“네, 꼭 참석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나는 레시피를 적은 뒤, 그녀가 준비해온 계약서를 읽었다.
기부하겠다는 내 말에 아필레는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하며, 수익의 30%로 기부 금액을 늘려 주었다.
그녀는 내가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까지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뒤, 황제와 황후의 배웅을 받으며 궁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죠.”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그런 것인지,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칠드런은 많이 배웠으려나, 그랬으면 좋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리다스는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방 밖에 서 있었다.
“안 주무셔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거기서 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천천히 방의 구조를 되집어 봤다.
그제야 나는 방 안에 침대가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왜인지 침대가 크더라니. 그래서 어젯밤, 바리다스가 잠을 못 잔 거구나.
늦게 눈치챈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아직 약혼 사인데, 같은 침대를 쓰는 건 좀 빠른 거 아니냐고!
침대가 하나만 있는 방을 하나만 내어 준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방을 달라고 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나 때문에 밤을 새웠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그래도…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좋은 꿈 꿔요.”
그런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으며 대답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 * *
방 밖으로 나온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을 할 뻔했다. 본인이 이성적이여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는 다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