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다과회
황성에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던 나는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나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시종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내 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프레탄 왕국의 왕비께서 오늘 제국에 도착한다고 하십니다.”
아하, 그래서 다들 바빠 보였구나.
그러고 보니, 황궁에서 너무 여유롭게 지내느라 잊고 있었다.
이제 곧 다과회겠구나. 칠드런에게 그날은 호위를 맡아줘야 할 것 같다고 미리 말해놔야겠네.
요즘 칠드런은 매일 아침마다 내게 인사를 하고 나갈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훈련장으로 사라졌다. 상처가 늘어서 오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많이 배우는 건 좋지만, 조금 더 몸을 신경 써 주면 좋을 텐데.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되었다
.
나는 천천히 도서관으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며칠 전 읽은 책에서 프레탄 왕국의 사람은 매우 이국적이고 아름답다고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우연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사용인들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귀족도 만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간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빙의한 뒤 처음 보는 이국적인 피부색에 시선을 위로 돌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그녀의 두 눈은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미친 외모였다.
그녀의 외모에 넋이 나간 내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자,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한 뒤, 책을 들고 사라져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나타났는데 그들조차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도서관 안에 들어온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니 진짜, 이건 너무 예쁘잖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겨.
역시 책은 거짓말 안 하네. 나는 프레탄 왕국의 사람이 아름답다고 쓰여 있는 그 책에 몇 마디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우, 엄청. 진짜로, 정말. 이 정도의 수식어를 더 말이다.
예쁘면 다 언니니까 언니라고 할게요. 언니도 다과회 꼭 와요. 내가 디저트를 준비한 건 다 언니에게 주기 위해서가 분명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만난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레탄의 왕비가 아름답다고 황궁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타. 한때는 백작 영애였으나 지금은 한 나라의 황비가 된 인물이었다.
처음에 도서관에 있던 것은 길을 잃어서 오게 된 것이었고 키는 164, 머리카락 길이는 134, 도착해서 차를 마신 횟수는 24회… 등등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녀에게 반한 사용인들과 귀족들에 의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레이타에게 관심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말이다.
근데 우연히 만난 게 나라니…. 이건, 완전히 운명 아닐까.
다과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몸을 맡긴 채 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꾸미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예쁘게 입고 가야겠다.
약간 그런 거지, 연예인 팬미팅 갈 때 옷 예쁘게 입고 가는 거.
언니가 내 아이유고 전지현이야.
내가 도착했을 땐, 대부분의 귀족들이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일드 가의 약혼녀인 피오라 드 데이먼입니다.”
소개를 마치고 인사를 한 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듣기로는 다른 왕국에서 온 귀족 영애들이나, 백작 가문 이상의 모든 귀족 부인들이 참석했다고 했다.
그때 어찌 보면 이 다과회의 주인공 격인 레이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며 말이다.
레이타는 흰색에 금과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잘 어울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의 팬은 귀족 부인들 사이에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젊은 부인들도 그녀를 보고 얼굴을 붉혔으니 말이다.
역시 예쁜 게 최고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타를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프레탄 왕국의 레이타 티라 프레탄 입니다.”
어떻게, 목소리까지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을까. 청아하고 맑게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요정 같았다.
연회에 참석 의사를 밝힌 모든 귀족들과 손님들이 참가한 것을 확인한 아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다들 다과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각국에서 모여주신 귀빈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입니다, 부디 편하게 즐기다 돌아가시길.”
그녀의 말을 끝으로 자허 토르테와 쇼콜라 봉봉, 그리고 라떼가 한 세트처럼 접시에 담겨 나왔다.
내가 만든 것보다 몇 배는 뛰어난 비주얼에 나는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생각보다 평범해 보이는 디저트에 조금 실망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로만 봐서는 평범한 쇼콜라 케이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라떼는 모두 신기한 듯 바라봤다.
휘핑크림을 올린 음료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포크를 들어 올린 것은 레이타였다.
자허 토르테를 작게 잘라 옆에 준비된 크림과 함께 먹은 레이타의 눈이 커졌다.
“어머나.”
레이타의 감탄사에 그녀와 함께 참석한 프레탄의 다른 귀족들도 한두 명씩 맛을 봤고 모두 감탄사를 내뱉었다.
곧이어 라떼까지 마신 레이타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맛이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이걸 만든 파티쉐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아필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둘의 반응에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아필레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내게 윙크를 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차일드 공작의 약혼녀인, 데이먼 황녀께서 준비한 디저트랍니다.”
레이타와 대부분의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새겨졌다.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초콜릿과 커피 중 가장 맛있어요.”
언니도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예뻐요. 나, 계 탔어!
성덕이 된 기분에 나는 제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 지속되던 다과회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자연스럽게 여러 무리로 나뉘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옆자리 부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아이들 옷은 마담 큐리아가 가장 잘 만드는 것 같더라고요.”
“아, 맞아요. 저희 애도 이번에 거기서 옷 맞췄는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들의 대화를 들은 나는 생각했다.
여기 완전 그거잖아, 학부모 모임.
나만 빼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어린 자녀.
하지만 나, 어린이집 반년 차 교사. 이예린. 이 정도의 학부모 토크는 익숙하다고.
그렇게 그룹으로 나뉘어 따로따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 학부모, 아니 귀족들을 보며 나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
그때 레이타와 함께 있던 아필레가 나를 불렀다, 그녀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그 둘은 그 잠깐 사이에 꽤나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에게는 같은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말을 안 듣는 아들이었다.
“저희 애는 이번에 황태자가 되기 싫다고 하더라구요….”
라고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 아필레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애가 학원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해.
하지만 그녀의 말에 레이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희 애도 별 차이 없어요…. 자기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마차가 되겠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황실만 뛰어다니는
걸요.”
차라리, 드래곤이나 정령이면 몰라.
라고 덧붙이는 레이타 때문에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그렇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애들이 정말 얌전한 편이고 애들이 말 안 듣는 건 여기나, 지구나 똑같구나 하고 말이다.
공작가의 아이들의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인 이유는 애들이 판타지 수준으로 얌전해서 붙은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애들이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주면 좋을 텐데.”
라고 말하며 두 학부모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대륙의 미래를 위해 두 분 모두 파이팅.
근데 제국 망해도 프레탄 왕궁으로는 가지 말아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떼를 홀짝였다.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근데, 데이먼 제국의 황태자는 누구지?
피오라를 닮았다면, 분명히 개차반일 텐데.
원작에서 데이먼 제국은 피오라를 황녀로 만들기 위한 설정 정도였기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근데 피오라 닮았으면 진짜 대륙 망할 거 같은데.
장래희망이 마차인 예비 왕과, 황태자가 싫다고 징징거리는 예비 황제와 피오라를 닮은 (예상) 개차반까지.
여기 행성에 다른 대륙 있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한 그 순간, 아필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희 아이는 이번에 황녀님 덕분에 많이 철이 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레이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어머나, 혹시 저에게도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레이타는 내 초콜릿 레시피 때문에 나에 대한 신빙성이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애 한 명 없는 황녀의 말을 신뢰하겠어.
하지만 레이타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얼굴을 마주한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적당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생각난 방법이 있었다.
“칭찬 도장을 쓰는 건 어때요?”
내 말에 두 학부모, 아니 황후와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하거나 말을 잘 들었을 때 종이에 도장을 찍어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몇 개 이상을
모으면 원하는 걸 사주든가 소원을 들어주는 거죠.”
네 말에 레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훈장 같은 거군요.”
“네, 다만 아이가 너무 집착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요.”
자칫하면 보상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칭찬 도장은 두 학부모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레이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침, 이번에 옥새를 새로 만들었거든요.”
옥새로 찍어준 거라면 절대로 복사하거나 흉내도 못 내겠네.
근데 그거 이렇게 써도 되는 거 맞아?
그때 아필레도 좋은 방법이라며 맞장구를 쳤고 나는 다시 한번 두 학부모의 스케일에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