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다과회
다과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방에서 뒹굴거리며 독서를 즐기던 나는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책에서 눈을 뗐다.
바리다스도 일 중이라 올 사람이 없는데, 레이타나 아필레가 온 건가.
어제 다과회로 인해 둘과 꽤 친해졌기에, 둘이 방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좀 열어줄래?”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차피 드레스를 다 차려입고 있던 상태였기에 손님을 바로 맞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너무 예상치 못한 하지만 손님이었다.
세트로 맞춘 것 같은 붉은 색의 멜빵 옷을 입고 있는 리리안과 레이안이 차례로 방 안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들은 내게 격식대로 인사를 건넸고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그런 내 말에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딱히, 황녀님이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가자고 해서 온 거지.”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양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 보려고 왔구나.
속이 보이는 거짓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뭐.
“그래, 그래.”
나는 그녀에게 대답을 한 뒤, 레이안을 돌아봤다.
리리안과 마찬가지로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는 우물쭈물거리다 내게 손을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저랑 다과회 하지 않을래요?”
다과회라, 아. 레이안도 어제 다과회에 참석하고 싶었구나.
그렇게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책을 읽는 것도 지루하던 차였다.
“그래, 다과회 좋지.”
레이안의 손을 잡으며 대답을 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리리안에게도 손을 내밀자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리리안도 같이 놀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같이 가 드리죠.”
라고 말하며 리리안은 새침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에 비해 레이안은 리리안과 함께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조금 구겼지만 말이다.
“그래 그럼 어디로 갈까?”
내 질문에 리리안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제 정원을 빌려 드릴게요.”
“어머나, 고마워라.”
내 대답에 리리안의 입꼬리는 더더욱 올라갔고 레이안의 표정은 더 굳어만 갔다.
그런 레이안을 돌아보며 씨익 웃은 리리안은 한껏 재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디저트는 마카롱이랑 샌드위치가 좋겠어요, 또 드시고 싶으신 거 있나요?”
시녀에게 디저트를 준비시키며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싫은 척하더니,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마들렌으로 부탁해도 될까?”
“나쁘지 않네요.”
리리안이 시녀에게 마들렌과 어울리는 차를 준비하라고 말한 그 순간 레이안이 소리쳤다.
“나는 스콘이랑 사과 파이!”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리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취향하고는.”
내가 말했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게 현실 남매인가.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참았다.
리리안의 정원에는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는데, 노란색과 푸른색의 장미가 피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내
고 있었다.
파란 장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내가 신기한 듯 바라보자 리리안이 뿌듯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쁘죠! 이번에 마탑에서 팔기 시작한 장미라구요.”
“응, 예쁘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때 레이안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미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런 레이안의 말에 리리안이 피식 비웃음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빠가 인기가 없는 거야.”
“나 아홉 살이거든…?”
“이웃나라 황태자는 이미 예비 황후에 예비 황비도 세 명이라는데.”
그녀에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레이안은 소리쳤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리리안은 레이안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이러다가 다음 황태자가 내 아들이 될지도 모르겠네.”
“아 좀!!”
그런 둘의 모습에 결국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숨넘어갈 듯 웃기 시작하자 두 아이는 싸움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아이들의 시선을 느낀 나는 웃음을 멈추고 민망함에 헛기침을 두 번쯤 했다.
“미안, 귀여워서.”
내 말에 레이안의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했고 리리안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녀의 그런 태도에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리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이 아이들과 내가 부탁한 디저트들이 정원에 준비되었다.
레이안의 사과파이와 스콘을 포함해서 말이다.
역시, 그렇게 틱틱거려도 사이가 좋구나.
내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어디서 배운 것인지 레이안이 내 의자를 빼주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리리안은 ‘별꼴
다 보겠네’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그녀의 그런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나는 레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레이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그것을 본 리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자, 달콤하고 진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지구에서 살 때는 차가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는데 먹다 보니, 생각보다 입에 맞았다. 내가 마시는 차가 다 비싸서 그런 건가.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차를 음미하던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 근데, 두 분은 언제 결혼할 거야?”
“내년 쯤에 하지 않을까?”
사실은 나도 모른다,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내 말에 그렇구나, 라고 대답한 리리안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분의 아이가 다음 후계자가 되는 거겠네?”
“…그렇겠지.”
일단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뒷맛이 썼다.
나와 바리다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고 기분이 나빠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멍하니 마들렌으로 손을 옮기던 그때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근데, 아이는 어떻게 생겨?”
그녀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애플파이를 먹던 레이안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멍청아, 백조가 물어다 주는 거잖아.”
아니, 여기에서도 그런 거짓말을 하네. 순수한 레이안의 반응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의 순수함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맞는 말이라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 리리안은 입을 열었다.
"그럼 황녀님 백조한테 꼭 남자로 물어다 달라고 해 줘."
하지만 이어진 리리안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는 연하가 좋거든, 나랑 만나려면 공작가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라고 말하며 리리안은 특유의 새침하면서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리안의 말에 결국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
내 말에 리리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두 분을 닮았다면 못생길 리 없으니까, 우리 오빠처럼만 교육하지만 말아 줘. 난 조신한 남자가 좋아.”
푸흡. 그녀의 말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진짜 리리안… 네가 최고야.
하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던 나는 결국 먹던 마들렌을 내려놓고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나는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취향이네.”
내 말에 리리안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지, 차일드 공작님을 봐. 얼마나 조신해. 황녀님은 결혼 잘했어.”
리리안, 너 혹시 빙의했니?
아니, 어떻게 일곱 살이 저런 말을 해.
그리고 어떻게 그런 바르고 좋은 취향을 가져.
나는 리리안이 지구에서 태어났고 나와 나이가 같았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걸요, 제국 공인 일등 신랑감이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긴 하지, 잘생겼고 작위도 높고 키도 크고… 임자만 없었으면 말이다.
“이제 일등 신랑감은 아니지 않을까요, 임자가 있으니까.”
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임자가 있지.
엥?
내가 뒤를 돌아보자 언제 온 것인지 바리다스가 서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과 태양을 뵙습니다.”
둘에게 인사를 한 바리다스는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붉은 리본이 묶여 있는 상자였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입을 열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상자 안에는 며칠 전 맛있게 먹은 그 가게의 휘낭시에가 네 개 들어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생각했다.
…바리다스 당신이 일등이야.
일등 신랑감이 아니라 그냥 일등이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감사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과회에 참석해도 될까요?”
바리다스의 질문에 레이안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리리안은 좋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리다스의 자리가 준비되었고 다시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바리다스가 선물한 휘낭시에를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을 때,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공작님, 부탁이 있어요.”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바리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들은 황녀님 같은 외모에 공작님 같은 성격으로 낳아주셔야 합니다.”
상상도 못한 부탁에 바리다스가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럼 제국에서 가장 예쁘고 잘난 며느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바리다스는 리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리리안 말고 누가 감히 바리다스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뒤늦게 리리안의 말을 이해한 바리다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부녀는 왜 나에게 쌍으로 이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 시간, 다과회를 즐겼고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리리안이었다.
“저는 이제 가 볼래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는 드레스를 들고 우아하게 인사하더니 궁 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럼, 이제 돌아가죠.”
바리다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떠나기 전 레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렴.”
그런 내 행동에 레이안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소리쳤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바리다스의 눈가가 씰룩였다.
“황자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시죠.”
라고 말하며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의 손을 맞잡으며 레이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리다스의 표정이 평소보다 언짢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