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책봉식
“형수님!!”
작은 수정구에 아이들 다섯이 얼굴을 들이밀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섯 명 모두 별문제 없이, 건강해 보였다.
“좋은 아침.”
내 말에 아이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인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형수님, 드레스 완전 예뻐요!”
“언제 와요?”
“보고 시퍼요!!!”
수정구가 깨질 정도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건강 정도가 아니라, 기운이 넘치는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보기 좋긴 했지만 그 정도가 과했다.
결국 나는 오늘도 비장의 기술을 꺼내 들었다.
“다들 소라게 쏙!”
“쏙!”
내 말에 아이들이 조용해졌고 그제야 나는 아이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토마부터, 한 명씩 말하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마는 소리쳤다.
“언제 돌아오시나요?”
토마의 질문에 아이들도 귀를 쫑긋 새우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미안했다.
어서 빨리 돌아가야겠다.
“오늘, 책봉식이 있을 예정이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볼게.”
내 말에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와아아! 형수님 최고.”
“빨리 와요, 보고 싶어요.”
내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가슴 한쪽이 찡 하고 울렸다.
아이들이 나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수정구를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보고 싶어.”
그렇게 내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왜인지 오늘따라 힘을 준 것 같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아이들 중 가장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레몬은 수정구를 통해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와, 큰오빠. 왜 이렇게 잘생겼어!! 평소에 머리를 개떡같이 하고 다니던 게 넘기면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였어?
”
개떡이라는 레몬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았다.
렌보다, 레몬과 리리안이 더 쿵짝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개떡이라는 말에 심심치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제, 그 꼬맹이 때문에 힘을 좀 주긴 했다.
딱히 꾸밀 필요도 없는 외모였고 꾸밀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머리에 딱히 손을 안 댄 것이었는데.
내 머리가 그렇게 심각했나.
그렇게 말을 한 이유는 레몬이 깐 머리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바리다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적인 문제로 고민을 했다.
“잘 어울려요.”
빈말이 아니었다.
레몬이 감탄할 만큼, 바리다스는 깐 머리가 잘 어울렸다.
확실히 까칠한 인상은 덮은 머리보다 깐 머리가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나는 미소지었다.
원래 예쁜 것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자주 해야겠군요.”
“아니, 항상 해줘!!!”
그의 말을 들은 레몬이 소리쳤고 진심이 담겨있는 것이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레몬이 그 머리가 많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벙긋거렸다.
“당신은 어떻…”
때마침 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바리다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출발하죠.”
그의 말에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바리다스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은 단번에 좋아졌다.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 다치지 말고 있으렴.”
그의 말에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모아 네, 라고 대답을 했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바리다스가 최고인 것 같았다.
오늘도 바리다스에게 패배감을 느끼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황제는 또 우리에게 마차를 준비해 주었는데, 전보다 더욱 화려해져 있었다.
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책봉식은 라이몬 궁에서 진행된다고 했는데 얼마나 멀면 마차까지 준비해 줘.
새삼, 황궁의 크기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십 분쯤 달려 도착한 라이몬 궁은 내가 지금까지 본 궁전 중 가장 화려했다.
화려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도 이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라이몬 궁의 앞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커다란 사자 조각상이 서 있었는데, 사자는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른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거, 도금이겠지?
만약 저게 모두 진짜 금이라면, 사자 발톱 하나만 있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이 정도의 사치는 정말 대단한 수준이네.
궁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대부분의 귀족들이 미리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분제가 살아있는 곳답게, 계급 순서대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리리안은 계승식이 진행되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이다 보니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나와 눈
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부담에 얼어붙었다.
아니, 인사해 주는 건 고마운데 여기서 인사하지 마!
그때 나팔 소리와 함께 황제와 황후, 그리고 레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내게서 멀어지는 시선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이안은 평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그에게 응원을 보냈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한 가운데에 쳐져 있던 커튼이 걷어지며 사자 모양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드러났다.
그리고 황후는 리리안의 옆자리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교황이 왕관을 들고 천천히 걸
어 들어왔다.
황제가 그에게서 왕관을 받아들자, 레이안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 들어오는 햇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웅장함이 느껴졌다.
그 안에서 황제가 레이안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고 그는 눈을 감고 왕관을 받아 들었다.
진짜, 나는 전생으로 돌아가면 평생 18세기 유럽 영화는 안 봐도 될 거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레이안이 왕관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한 명의 신관이 소리쳤다.
“제국의 1황자, 레이안 덴페라 드 크레센트가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우렁찬 박수 소리가 장안 가득히 울려 퍼졌고 나 또한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황제와 황실의 권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말이다.
그 뒤로 조금의 연설이 더 이어진 뒤, 책봉식을 마침과 함께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 수도에서는 삼 일 밤낮 동안 연회가 열리며 평민들에게는 술과 고기가 제공될 예정이었다.
물론 나와 바리다스는 딱히 참석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끄러운 연회는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와 함께 슬쩍 라이몬 궁을 빠져나갔다.
라이몬 궁 앞에는 마차가 세 대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모두 차일드 가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근데, 왜 마차가 세 대씩이나 준비되어 있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 순간,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마쳤고, 허가도 구해 놨습니다. 바로 돌아가죠.”
이 정도로 빨리 돌아간다는 말이었어?
정말 나쁘지 않아, 최고야.
아, 근데 진짜 선물 어떡하지.
지금 이 인원을 데리고 수도에서 선물을 고르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음번에 사다 줘야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
아필레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필레 뿐만 아니라 황제 가족 일가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뭐야 이렇게 막 나와도 돼?
주위를 둘러보자, 연회를 시작했기 때문인지 궁궐 입구에는 기사들 몇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긴 했다.
이게 바로 등잔 밑이 어두운 건가.
“아니, 이렇게 빨리 간다는 말은 없지 않았는가?”
황제의 말에도 바리다스는 답호하게 대답했다.
“바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인사할 시간은 줘야지.”
그때 내게 다가온 아필레는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상자의 비주얼에 내가 선뜻 받지 못하고 망설이자 아필레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제 고민을 해결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건 그거에 대한 답례니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감사히 받을게요.”
내 말에 아필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대가 만약 수도에 살았다면 우린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 같아요, 조심해서 돌아가요. 황녀.”
나도 사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 만난 내 또래의 여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황후였고 나는 바리다스와 아이들의 옆을 지켜야 했으니까.
미소를 지은 나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그녀와의 인사를 마치자 리리안과 레이안이 내게 다가왔다.
리리안은 울먹이며 내게 푸른 장미로 만든 꽃다발을 내밀었다.
“잘 가요, 나 초대해 준 거 안 잊어버릴 거야. 공작가 방문할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귀여운 말에 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방문해 줘.”
겨우 이 주 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아이들은 내게 정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
더 오래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안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꼭 좋은 황제가 될 거예요. 좋은 황제가 되어서 꼭 황녀님 같은….”
하지만 레이안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라를 더 크고 풍요롭게 만들 거예요.”
주먹을 쥐며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그건 이제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소년의, 작은 풋사랑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나는 철이 든 레이안을 기특해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바리다스는 조금 더 있다가 가라는 아킬레스의 말을 거절하며 마차에 올랐고 나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뒤, 마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도 즐겁지만, 나도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이곳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필레가 준 상자를 열어보자 다섯 개의 작은 반지와 목걸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보통 반지 하나에 목걸이 하나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 순간 상자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편지를 열어보자, 예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탑에서 만든 신제품인데 반지와 목걸이가 한 세트예요. 반지에게 강한 충격이 전해지거나 깨지면 목걸이로 전달이 되는 형식인데 보통은 연인들이 주로 사용하지만, 자녀가 있는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모양이더군요. 그대라면 공작의 동생들도 아껴 줄 것 같아 선물해요.
검술을 하는 토마가 착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심플한 디자인이었고 그럼에도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건, 아필레의 센스가 느껴지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아필레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