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아이들의 첫 친구
“저, 훈련에 조금 더 매진하기 위해 가디언을 쉬고 싶습니다.”
우리가 수도에서 돌아오고 삼 주쯤 지났을 때, 칠드런이 내게 한 말이었다.
칠드런은 수도 기사단에서 무얼 배운 것인지 몰라도, 내 곁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훈련에 매진하고는 했다
.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약간 열심히 키운 아들이 내 곁을 떠나 유학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떡해, 이 엄마는 아들 응원해.
“그래, 알겠어.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나는 칠드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칠드런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올 것은 아이들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읽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더니 레몬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만 한 선물 상자와 편지를 든 채 말이다.
“형수님 편지랑 선물 왔어!”
해맑게 웃으며 편지와 선물 상자를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다 한 번씩 아이들은 내게 온 편지나 선물을 시녀들 대신 전해주고는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초콜릿이나 사탕 등, 작은 선물들을 주었다.
“고마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편지와 상자를 받아들었다.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는 편지에는 황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필레의 편지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열었다.
그러자 수도를 떠날 때 받았던 편지와 같은 예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잘 지내고 있나요, 황녀? 부디 잘 지내고 있길 바라요. 지난번에 드린 선물은 아이들이 좋아하던가요? 더 좋은 걸로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충분한데 왜 그래요.
토마를 제외한 아이들은 아필레가 선물한 반지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충격을 받으면 신호가 전해진다고 말하자, 토마는 자신은 다 컸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냐는 듯 표정을 구겼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다른 아이들은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이들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갈 일은 거의 없지만, 혹시나 모를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항상 끼고 다니겠다고 말했
으니 말이다.
그대의 초콜릿 레시피들은 수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디저트가 되었으며 라떼라는 음료도 귀족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어요. 다 그대 덕분이에요.
그러고 보니, 쇼콜라 봉봉은 며칠 전부터 이곳 가게에서도 팔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잘 팔리니까 이렇게 빨리 유행이 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뿌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만간 또 다른 선물도 함께 갈 거예요. 말을 안 듣는다면 혼내도 괜찮아요. 부디 민폐가 안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편지를 더 읽어봐도 내 근황이나 그녀의 이야기를 할 뿐, 선물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같이 온 이걸 말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상자를 열자. 초콜릿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나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자 초콜릿 안에 가득 찬 가나슈가 달콤하게 입안에 퍼졌다.
쇼콜라 봉봉이네! 근데 이게 왜 민폐야.
너무 많이 먹으면 살쪄서?
나는 레몬의 입에도 가나슈를 넣어주며 생각했다.
“우와, 이거 완전 맛있어!”
가나슈를 먹은 레몬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때, 벌컥 소리와 함께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자스민과 그린이었다.
그들은 평소답지 않게 많이 당황한 모습이었는데 먼저 입을 연 건 그린이었다.
“손님이 왔어요!”
내가 손님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 생각은 내가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사라졌다.
무려 다섯 대의 마차가 공작가 정원에 서 있었는데, 마차에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마차 문이 열리고 레이안과 리리안이 차례로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커다란 선물 상자들이 따라왔다.
아필레의 선물이 이거였어?
그제야 아필레의 편지가 이해가 갔다.
아니 물론 내가 오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황태자인데, 이렇게 막 황궁을 비워도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호위기사 10명 정도가 말을 타고 뒤이어 도착했다.
…될…지도?
아이들이 온 것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창문에서 눈을 떼고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니 나가자꾸나.”
바리다스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며, 미안하다는 말을 내게 반복했으니 말이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받은 거겠지, 지금 상황을 보니 납득가는 행동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옷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자스민이 울먹이며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러… 나 무서어….”
기사들이 무서운 건가?
줄을 맞춰 일렬로 서 있는 기사들은 자스민 입장에서 무서울 수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스민을 안아 들었다.
“뭐가 무서운데?”
“언니만큼 작은 사람 처음 봐….”
아니, 너희 진짜로 친구 없었어? 한 명도?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차일드 가의 저택은 주위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시내까지 가려면 꽤나 먼 길을 마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이 저택 밖으로 나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너희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은 있니?”
내 말에 뭘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그린이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나는 적어도 시내 정도는 나가 봤을 줄 알았다.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게 귀족 사회의 규칙이고 정해진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많은 걸 경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사회성이 얼마나 중요한데!
“조만간, 다 같이 시내에 나가자.”
내 말에 레몬 그린 그리고 자스민의 눈이 커졌다.
“진짜 나가도 되는 거예요?”
“정말로요?”
레몬과 그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내게 되물었고 나는 그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좋아할 것을 알았으면 진작에 같이 나갈 걸 그랬다.
공작가의 저택이 너무 넓은 탓에 나는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에 비에 자스민은 내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시러, 나가는 거도 싫고 모르는 사람들이랑 있기도 시러.”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스민이 이제 세 살이었지.
아직 새로운 것들이 무서울 나이긴 했다.
자스민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래도 조금 설득하는 거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평생 언니 오빠들이랑만 있을 거야?”
“그로면 안 대? 왜…?”
자스민의 보랏빛 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니랑 오빠랑… 형수밈만 있으면 돼. 가족이 아니면 시러. 다른 사람들 다 필요 업다고. 평생 나랑 같이
있게따고 해짜나.”
나는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자스민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나가서 손님을 맞으렴.”
그린과 레몬은 내 눈치를 보다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녀를 안고 방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할지….
보통 유치원에 오는 아이들은 빨라야 3살, 늦으면 5살이었다.
그걸 생각해 보면 내가 자스민에게 너무 강요한 건가.
설득이라는 명목하에 내 마음대로 한 거 같아, 자스민에게 미안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자스민은 진정이 된 것인지 눈물을 멈추고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좀 괜찮아?”
내가 질문을 하고 조금 지난 뒤에야 자스민은 입을 열었다.
“웅… 근데, 난 지짜로 가족들만 이쓰면 대.”
괜찮아졌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스민이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니까, 조금 더 자라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민 강요는 안 할게. 그래도 나는 너가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무서웠어?”
자스민은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인지 여전히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강하게 절레
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 강아지 같았다.
“아니, 형수밈은 가족이 될 거자나. 그래서 갠차나.”
단호한 자스민의 말이 너무나 귀여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온 손님들도 너의 친구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해 봐.”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자스민은 드디어 내 품에서 얼굴을 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머리는 내 품에 안긴 채 한참 울어서 그런 것인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내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고 머리를 정돈해 주자 그녀는 가만히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대충 정리가 끝났을 때쯤, 자스민이 입을 열었다.
“친구가 그렇게 조흔 거야? 가족보다 더?”
자스민이 친구라는 관계에 흥미를 가진다는 것에 희망을 본 나는 그녀가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길 바라며 입을 열
었다.
“가족이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만,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친구야.”
내 말에 자스민은 잠시 고민하더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라써, 나도 칭구들 만나 볼래. 근데 밖은 아직 무서워. 나가는 건 다음에 할래.”
그것도 엄청 큰 용기였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기를 낸 자스민이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아까 선물 받은 쇼콜라 봉봉 하나를 집어 자스민의 입 안에 넣어준 나는 그녀를 안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일 층까지는 금방 도달했고 내가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 자스민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
반대 손으로 자스민을 토닥여주자 진정이 된 것인지 심호흡을 한 자스민은 문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라써, 이제 열어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