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이들의 첫 친구
“오빠, 밖에 황실 마차가 와 있어!!”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렌의 모습에 토마는 빠르게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봤다.
뭐야, 이게.
정원에는 황실의 마크가 새겨진 마차가 무려 다섯 대나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황실 제복을 입은 호위기사들도 열두 명이나 있었다.
황제라도 온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 인원이 말이 되냔 말이다.
저 제복은 황실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사들만 모인 제 1기사단의 제복이었다.
형님께 손님이 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손님이 황실의 인원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일단 내려가자 렌.”
황실에서 온 손님이라면 당연히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였다.
그와 렌이 정원으로 내려가자 언제 온 것인지 크림슨과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일렬로 서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뒤이어 레몬과 그린이 내려왔고 토마는 그들을 돌아봤다.
“형수님은?”
“자스민을 달래고 계셔.”
자스민 달래기에는 도가 튼 분이시니, 분명 금방 내려오실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아이들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지금 자신들이 밖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 말이다.
보여줘야만 했다, 우리가 반푼이가 아닌 진짜 차일드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황실에서 오신 손님이니, 모두 예의를 갖춰.”
진지한 그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스민을 제외한 모두가 기본적인 예절 교육은 받아 왔기에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고 한 소년과 소녀가 마차 안에서 내려왔다.
황실의 상징이라 불리는 찬란한 백금발이 햇빛 아래 반짝였고 아이들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둘이 황태자와 황녀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간 것은 토마였다. 그는 배웠던 예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과, 별을 뵙습니다. 토마 차일드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소년 쪽이었다.
“반갑…습니다, 레이안 덴페라 드 크레센트라고 해요.”
딱 봐도 긴장한 것이 눈에 보이는 오빠의 모습에 혀를 찬 리리안은 토마를 응시했다.
이분이 둘째 공자구나.
키, 합격. 외모 합격. 예법… 합격인 거 같고.
그렇게 스켄을 마친 리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왜 연하가 아니냐고.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며 리리안은 토마에게 인사했다.
“리리안 덴페라 드 크레센트입니다.”
둘이 별다른 말없이 인사를 받아주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토마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렌을 시작으로 그린과 레몬도 그들에게 인사했고 리리안과 레이안도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또래 친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정원에 들어서자 마주 서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너무 늦게 나왔나? 싶어 눈치를 살피는데 레이안과 리리안이 동시에 내게 달려왔다.
“황녀님!”
나를 부르며 말이다.
그들이 나를 친근하게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에 아이들의 표정이 구겨졌고 내 품에 안겨있는 자스민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내 앞을 가로막은 토마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안 계시니, 제가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저희를 초대한 것이 황녀님이니 황녀님께 안내받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너희 왜 그래?
토마와 레이안은 미묘하게 기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나를 먼저 초대했으니까, 내가 황녀님한테 안내받을 거야. 공자, 저희 오라버니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그렇게 둘은 리리안에 의해 쫓겨났고 리리안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택, 안내해 주세요, 황녀님.”
그때 내 앞을 그린과 레몬이 가로막았다.
“제가 대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눈썹을 씰룩인 리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는 황녀님께 부탁드렸는데요?”
하지만 레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리리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께서는 할 일이 많으셔요.”
없는데…?
나는 약혼녀 신분으로 공작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일이라고 생각될만한 거 정도라면 강아지 밥 주기…?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건 리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공작님과 황녀님이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형수님이라는 호칭은 좀 아니지 않을까요?”
아니, 근데 왜 자꾸 싸우는 거야?
그린, 네가 좀 말려봐.
나는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그린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린도 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두 분께서 결혼을 하지 못하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린의 말에 리리안의 입이 다물어졌고 레몬과 그린은 손을 아래로 내려 리리안 몰래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린과 레몬의 승리였다.
그는 리리안에게 손을 내밀었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리리안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 친하게 지내라니까 왜 그러는 건데.
그렇게 아이들은 토마와 레이안, 그리고 레몬 그린 리리안 두 그룹으로 흩어졌고 나는 멍하니 서서 남은 마차들을
바라봤다.
그때 자스민과 렌이 입을 열었다.
“형수밈은 나랑 놀아.”
“저희랑 있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스민과 렌의 승리였다.
그때 기사들 중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호위단장을 맡게 된 제 1기사단장 메큐리 트리온이라 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열 한 명의 기사들이 차례로 내게 인사했고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함부로 손님을 초대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차일드 가에 오신 걸 환영해요, 피오라 티아네 드 데이먼입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기사식으로 경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아니, 뭐가 또 있어?
그의 말과 동시에 달려간 기사들이 준비된 마차 중 세 개를 동시에 열었다.
마차 안에서 내려오는 물건들을 본 나는 경악했다.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 모자에 구두, 석고로 만든 조각상에 수정구까지 없는 게 없었다.
다섯 대의 마차들 중 세 대에 내 선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모두 내 선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선물을 내려놓은 마차는 빠르게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그때 마차에서 내린 세 명의 시녀들 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와 하나의 편지를 내밀었다.
“황후전하의 편지입니다.”
나는 빠르게 편지를 받아들어 봉투를 찢다시피 열었다.
편지를 펼치자 여전히 예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초대를 할까 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선물을 보내요. 부디, 보답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마음에 들기를 바라요.
아니 마음에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과해요!
저런 걸 받기에 나는 간이 작았다.
그래도 내가 초대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함부로 손님을 초대하지 말자 결심했다.
레이안과 리리안을 초대한 것이 후회되는 것이 아니라, 두 아이 때문에 움직이는 인원과 둘의 신분을 생각하면 나
는 초대를 함부로 한 것이 맞았다.
그래도 두 아이가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황궁 밖에 나올 수 있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있는 동안은 최고로 즐겁게 만들어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결심하며 주먹을 쥐었다.
“크림슨, 황실에서 온 기사분들과 시녀분에게 머물 곳을 안내해 드려.”
내 말에 크림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나는 아직도 일렬로 서 있는 시녀들과 시종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돌아가서 할 일 해도 괜찮아.”
그렇게 모두가 사라졌고 정원에는 나와 자스민, 렌 그리고 마차 두 대만이 남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나 생각하며 공작가를 올려다보았다.
“나 아까 그 초코 더 먹고 시퍼.”
자스민이 내 옷을 잡아당기며 졸랐다.
그래도 저택이 넓으니 안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다.
조금 불안 불안하긴 했지만, 애들끼리는 빨리 친해지니. 나는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렌과 자스민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자.”
내 말에 렌과 자스민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 라고 대답하는 둘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그런 둘과 다르게 내 머릿속은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즐겁게 만들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말이다.
* * *
“역시 남자는 연하가 최고죠.”
“어머, 역시 황녀님이라 그러신지 뭘 좀 아시네요.”
방금까지 피오라를 두고 기 싸움을 했던 건 그새 잊은 건지.
금세 사이가 좋아져, 수다를 떠는 두 소녀를 보며 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래에 비해 과묵한 편인 그와 다르게 레몬과 리리안 모두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심지어 둘의 취향과 성향, 모두 비슷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린은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하며 둘에게 두 발자국쯤 떨어져 걷고 있었다.
저 대화에 본인이 절대 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어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황녀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올해로 일곱 살이에요.”
“아하, 저보다 한 살 많으시네요.”
그런 레몬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리리안은 입을 열었다.
“공녀만 괜찮으면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언니, 렌을 제외하고 처음 불러보는 호칭이었다.
그것도 황녀에게, 정말로 그녀와 친구가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몬은 베시시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야 영광이죠.”
레몬의 대답에 그린을 돌아본 리리안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린은 무언가 불안함을 감지했다.
“공자도 편하게 불러도 된답니다.”
자신의 촉이 정확하다고 생각한 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피오라가 자신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은 것은 인지했지만,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고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어차피 레몬과 친해진 모양이니, 그는 적당히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저는 황녀님으로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린의 신념만큼이나 리리안의 신념도 확고했다.
연하에 관한 신념 말이다.
남매라는, 평생의 친구가 있다 보니. 또래의 아이를 볼 기회도 적었고 그녀보다 어린 영식을 볼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리리안은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뇨, 누나라고 불러 주세요. 두 분이 쌍둥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제 동생 아닌가요?.”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는 리리안의 모습에 그린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도망갈걸, 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