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아이들의 첫 친구
“이봐, 칠드런 잘 지냈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내려치고 있던 칠드런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칠드런의 눈이 커졌다.
피오라와 함께 황실에 머물 때,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 주었던 기사단장 메큐리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알아본 칠드런은 정말 오랜만에, 또래 나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저야 잘 지냈죠, 메큐리는 잘 지내셨습니까?”
그의 말에 메큐리는 허허 웃으며 칠드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함께 했던 건 이 주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칠드런과 메큐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평민으로써는 최초로 기사단장 직에 오른 칠드런에게 메큐리는 우상이었고 메큐리에게 칠드런은 인정받지 못하던 그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평민 출신 천재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칠드런이 들고 있는 목검으로 시선을 옮긴 메큐리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실력 좀 볼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칠드런은 심호흡을 한 뒤, 자세를 잡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목검을 든 메큐리는 칠드런에게 먼저 들어오라는 것처럼 턱을 까딱였다.
그의 신호를 알아들은 칠드런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훈련장의 문이 열렸다.
훈련장 안으로 토마와 레이안이 들어왔고 두 소년의 정체를 깨달은 기사들과 칠드런의 눈이 커졌다.
칠드런이 공격하지 않고 멍하니 자신의 뒤를 응시하고 있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메큐리는 레이안을 바라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말에 레이안은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안내를 받으면서 아무 말도 없는 것이 불편해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그도 검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대련까지 하게 되었다.
또래 친구와 대련하는 것은 처음인데.
다른 기사들은 자신에게 뛰어난 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건 실제로 그가 특출난 실력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비교할 대상이 없는 레이안에게는 그저 자신을 띄워주기 위한 거짓말로 보였다.
그랬기에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정말로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거짓말인지.
“나도 또래 친구와 대련을 해보고 싶어서.”
레이안의 말에 메큐리는 토마에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머리라 함은, 둘째 공자인가.
공작이 된 바리다스를 제외한 차일드 가의 자제들에 대한 정보는 사교계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알려진 것은 차일드 공작가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아이들의 머리카락 색이 모두 다르다는 것 정도.
메큐리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매일 말썽만 부리는 것 같아 보여도 레이안은 검술에 제법 재능이 있었다.
칠드런과 비교해서 볼 경우 엄청난 천재는 아니지만, 영재 정도는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9살 때 레이안 만큼의 가능성을 보인 아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 둘은 목검을 하나씩 들고 훈련장 한가운데에 섰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하던 훈련을 멈추고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메큐리는 토마를 걱정했고, 토마의 실력을 아는 차일드 가의 기사들은 벽을 느끼게 될 레이안을 걱정했다.
이 자리에서 둘의 실력을 모두 알고 있는 건 단 한 명, 칠드런 뿐이었다.
오직 칠드런 한 명만이 둘의 실력이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흥미롭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토마의 말에 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목검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절대 아홉 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둘의 수준에 모든 지켜보던 모든 기사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꽤나 길게 이어진 접전에 둘 모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숨을 고른 토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검을 휘둘렀고 탁, 소리와 함께 레이안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이안은 허망하게 검을 바라봤다, 자신의 패배였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토마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레이안은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목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메큐리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토마의 손을 잡았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레이안은 터덜터덜 걸어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처음 맞보는 패배감이 그의 몸을 장악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체력을 적당히 회복한 레이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다른 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하며 따라오려고 하는 토마를 거절하며 말이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이안이 걱정이 된 메큐리가 그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훈련장에서 나와 메큐리와 단둘이 남게 된 레이안은 입을 열었다.
“다들 나보고 또래보다 뛰어나다며, 거짓말쟁이들.”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에 메큐리는 이걸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분명 레이안은 뛰어났고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했다.
그가 검을 시작할 때부터 지켜본 메큐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토마를 제외한 9살의 어떠한 귀족 영식을 데려와도 레이안이 모두 이길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메큐리조차 토마가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 가문에 저 정도 되는 천재가 둘이나 있다니.
혈통의 재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엔 전대 공작은 검에 그렇게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차일드 가가 검술 명가라 하지만, 한 세기의 두 명의 천재나 배출해 낸 것은 순전한 운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태자 저하는 뛰어나십니다, 천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재 그 이상입니다.”
그의 말에 레이안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왜, 못 이긴 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같은 나이와 대련을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천재라는 것은 레이안에게 벽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메큐리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천재라 불리던 그에게도 넘을 수 없는 재능의 벽을 느끼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이안에게는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패배는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검을 안 잡으실 겁니까?”
평소처럼 위로가 아닌 강하게 나오는 메큐리의 태도에 레이안은 조금 위축되었지만 곧이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야. 그냥 화가 나. 다들 내게 뛰어나다고 했던 말이 모두 거짓말 같아서.”
그의 말에 메큐리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레이안 또한 아직 어린아이였다, 처음의 패배를 인정하기 힘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가 이번을 계기로 좀 더 발전하기를 원했다.
같은 나이, 같은 높은 계급의 소년. 그게 서로에게 더 좋은 자극이 되길 원했다.
자신은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저하는 뛰어나십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제 명예와 긍지를 걸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졌냐고!!”
레이안이 소리쳤고 메큐리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건, 토마 공자가 천재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밀려왔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재능의 벽을 느끼게 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큐리의 선택은 그가 느낀 패배감을 자극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한 번 졌으면, 다음번에 이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레이안은 토마의 검을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벽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말에 검을 든 것도, 인정받고 싶어서 검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이 좋아서였다.
화가 난 것은 졌다는 사실과,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 기사들이 거짓말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도 나처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공자를, 이기고 싶어.”
레이안이 처음으로 맛본 패배감은 그에게 자극이 될 것이었고 그는 더 성장할 것이었다.
그의 말에 메큐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겁니다, 저하.”
메큐리는 토마와 레이안이 그냥 라이벌 관계가 아닌,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랐다.
그렇다면 둘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터였으니.
“훈련 더 할래, 검 더 가르쳐 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태자 저하.”
그 시각 토마는 혼자 남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무시당했던 것과 다르게, 토마는 기사단 내에서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칠드런이라는 다른 사냥감이 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력 덕분이었다.
다른 기사들이 평민 출신인 칠드런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느꼈다면, 토마에게는 타고난 출생 차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토마는 기사단에서 나름 준수한 대우를 받았다.
스스로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만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형, 바리다스와 비교될 바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만하지 않았을 뿐.
검을 든 것도 별 이유 없었다.
형처럼 되고 싶었고 운이 좋게도 그것에 재능이 있었기에 이어 나간 것이었다.
천재라는 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감흥 따위 없었다. 어차피 바리다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을 알기에. 토마에게 검은 그저, 몸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동생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런 토마에게 레이안의 등장은 새로운 자극이 되고 있었다.
다음번에 맞붙는다고 해서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검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와 한 번 더 대련을 해보고 싶었다.
피오라가 원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레이안과 토마는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방향일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소년은 검을 휘둘렀다.
해가 저물 때까지 말이다.
* * *
얘들은 언제 오려나.
저택 안내만 해준다면서, 훨씬 전에 돌아온 레몬과 그린, 리리안과는 다르게 한참을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레이안과 토마 때문에 나는 걱정스럽게 시계를 바라봤다.
사용인을 시켜 부르면 되긴 하지만 저택 안이니 문제가 생길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둘에게 방해가 될까 부르기 미안했다.
그때 토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아까 입고 있던 연미복이 아닌 다른 연미복을 입고 있었고 레이안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로 다가온 토마는 인사를 한 뒤 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토마에게 무얼 했고 레이안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는 그 순간.
레이안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토마와 마찬가지로 아까 입고 있었던 연미복이 아닌 다른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아니, 저택 안내만 해준다며 뭘 하고 온 거야 대체?
내게 인사를 한 뒤, 레이안은 바로 토마에게 향했다.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일 대련하시겠습니까?”
“내일 대련하시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친… 해진 건가…?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둘의 모습을 보았고 레몬과 리리안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저 대련 끝나면 끌고 가서 같이 소꿉놀이하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레몬.”
소꿉놀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인 자스민도 소리쳤다.
“저두 할래여!”
그런 셋의 말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린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안 할 겁니다.”
이쪽도 나름 친해진 것 같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렌도 친해지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렌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저는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진짜 걱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렌의 말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