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외출
칠드런과 함께 근처 서점에 들어온 렌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공작가에 있는 서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책이 서가를 메우고 있었다.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철학, 인문, 경제와 정치 그리고 요리법이나 자수를 다룬 책들도 있었다.
렌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잉크와 종이가 섞인 책 냄새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딱히 읽고 싶거나, 필요한 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부터 서점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렌은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높게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렌이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동안, 그녀의 뒤를 따르던 칠드런은 표정을 구겼다.
벌써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은 싫었다. 빼곡히 적힌 글을 읽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칠드런은 렌이 읽고 있는 <제 4차 테릴 전쟁> 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며 하품을 뱉었다.
제목부터 벌써 지루했다.
전쟁은 글자를 읽는 게 아닌 몸으로 맞부딪쳐 배우는 것이었다. 저런 걸 읽을 시간에 차라리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거나 팔굽혀펴기를 하는 편이 더 나았다.
매양 책만 읽는 공녀님은 모르겠지만.
칠드런은 속으로 불평했다. 그에게 독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취미 중 하나였다. 음악이면 몰라도.
칠드런은 음악이 좋았다. 정확히는 렌의 연주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몇 달 전 있었던 약혼식 이후로 렌은 가끔씩, 칠드런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는데 칠드런은 그런 렌의 연주가 좋았다.
렌의 피아노 연주는 무언가 특별했다. 자신이 음악을 많이 듣거나, 뛰어난 음악적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렌의 연주를 들을 때면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렌이 천재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그때 렌이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칠드런을 올려다보았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혹시, 추천해 주실만한 책 있나요?”
렌의 말에 칠드런은 순간적으로 본심을 말할 뻔했다.
‘없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는 어서 이 공간을 나가고 싶었다. 책들만 봐도 답답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렌을 호위하는 중이었다.
칠드런은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재밌어 보여서,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칠드런은 여기 있는 책들 중 단 한 권, 아니 단 한 줄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요?”
칠드런에 말에 렌은 잠시 망설였다.
서재에 있는 책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여기서까지 사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칠드런의 말이 맞았다. 책은 다 재밌으니, 굳이 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녀는 들고 있는 <제 4차 테릴 전쟁>을 차일드 공작가로 가져다 달라고 말한 뒤, 서재 밖으로 나왔다.
칠드런은 속으로 환호했다.
드디어 저 책들과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나 악기점을 가게 된다면 그녀의 연주를 들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칠드런의 생각을 모르는 렌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제 악기점에 갔다가 돌아가야 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생겨 버렸다.
바로, 차일드 도서관 말이다.
차일드 가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도서관인 차일드 도서관은 수도에 있는 국립 도서관 다음으로 크기가 컸고 아름다운 미관 때문에 관광 명소로도 유명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초초해진 렌은 곁눈질로 칠드런의 눈치를 봤다.
호위 기사긴 했지만, 어찌 보면 지금 렌의 보호자는 칠드런이었다.
차일드 도서관은 수도 한 가운데에 있으니, 여기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터였다.
칠드런이 허락해 주면 갈 수 있을 텐데.
망설이던 렌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차일드 도서관에 가볼 수 있을까요?”
렌의 말에 칠드런은 표정을 굳혔다.
차일드 도서관이라, 먼 곳에 있지도 않았고 근처에 악기점이 있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근데 가기 싫어. 이제야 저 종이 더미에서 멀어졌는데, 내 발로 또 가라고?
하지만 역시,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칠드런은 과거 자신이 렌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렌에게는 진 빚이 너무 많았다.
결국 칠드런은 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가시죠….”
그의 말에 렌은 환하게 웃었다.
길을 잘 아는 칠드런이 앞장서서 렌을 안내했다.
두 사람은 서점이 있는 상점가를 가로질러 주택가를 지나 광장에 들어섰다.
“우와.”
렌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떠한 건물보다, 커다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렌은 고개를 젖히고 도서관을 올려다봤다.
저게 차일드 도서관이구나.
갈색의 건물 중앙에는 커다란 시계탑이 있었고, 그 위에 차일드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열려있었고, 내부로 들어가기 전 복도처럼 된 공간이 보였다.
칠드런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간 렌은, 또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공작가의 연회장보다 높은 천장을 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저택 밖으로는 외출을 해본 적이 없기도 했고, 근방에 차일드 저택만큼 큰 건물이 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렌은 고개가 뻐근하게 당겨올 정도로 젖혔다. 돔 형태의 천장 한가운데는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예쁘다.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높은 천장 끝에 닿을 정도로 책이 쌓여있는 것을 본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본 칠드런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왜 저런 걸 읽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목이 아프지도 않은 것인지, 렌은 자신보다 몇 배는 높은 책장들을 계속해서 올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때, 렌의 눈에 가장 꼭대기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제목이 지워진 그 책의 아래에는 저자의 이름만이 작게 남아 있었다.
레트맨 차를코트
그는 200년 전쯤, 생을 마감한 천재 작곡가였다.
레트맨의 곡들은 그가 죽은 뒤에야 빛을 봤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쓴 노트가 있었는데, 원본은 사라진 데다 그나마 남은 사본 또한 귀족들에게 비싼 가격에 팔려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이 도서관에 있었다니.
렌이 사다리를 가져오기 위해 뒤로 돌아서려는데, 바로 옆에 있는 이동식 계단을 밟은 칠드런이 렌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지는 시야에 렌은 눈을 크게 떴다. 천장이 가까워졌고 이제는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책이 있었다.
손을 위로 길게 뻗어 책을 집자, 가죽이 벗겨져 까슬까슬한 표지가 느껴졌다.
렌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품에 안았다.
이제 내려가도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본 렌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을 뻔했다.
그제야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었다. 렌은 뒤늦게 몰려오는 공포에 잘게 떨며 칠드런의 팔을 잡았다.
“이제 내려 주셔도 괜찮아요.”
렌의 말에 칠드런은 렌을 조심스럽게 안아 든 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렌을 계단 위에 내려놓았고 발이 땅에 닿는 것을 확인한 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그에게 인사를 한 렌은 계단에서 뛰어내린 뒤 바로 옆에 있는 의자로 달려갔다.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쳐보자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레트맨 차를코트, 그의 일생과 마지막 흔적.
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 책은 그녀의 예상대로 레트맨의 노트가 맞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책은 어떻게 빌리나요?”
렌의 질문에 칠드런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책에 관심 따위 없는 칠드런이 책을 대여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입을 열었다.
“아마… 사서에게 가면 될 겁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떠넘기는 것이었다.
마침 사서 한 명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말이다.
“책을 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칠드런은 손을 들어 사서를 불러세웠다.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서는 무심코 렌의 얼굴을 바라봤다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공녀님이라면, 그냥 가져가셔도 됩니다. 원하신다면 따로 공작가까지 가져다드릴 수도 있습니다.”
“괜찮네, 그럼 그냥 빌려 가도록 하지.”
렌은 도서관을 더 이상 둘러볼 생각이 없었다. 어서 악기점을 구경한 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 말이다.
설레는 마음을 뒤로한 채 도서관 밖으로 나온 순간, 누군가 렌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깜짝 놀란 렌이 뒤를 돌아보자 칠드런이 책을 들고 있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들은 그렇게 근처에 있는 악기점으로 향했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악기점이라 그런 것인가, 귀족들이 렌의 정체를 눈치챈 듯 그녀를 힐끗거리며 바라봤다.
렌이 그 시선을 느낄 때쯤, 한 여자가 렌에게 다가왔다.
렌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 열렸던, 약혼 연회에 참가한 콜린 백작가의 안주인인 에로데 콜린이었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렌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네. 잘 지내셨어요, 콜린 백작 부인.”
렌의 인사에 에로데의 눈이 커졌다.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자신의 누군지 모른다는 걸로 눈치를 주거나 창피를 주려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파티에서의 아이들의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았기 때문에, 그저 순수한 호의를 담은 인사였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의 렌에 대한 호감이 조금 더 높아졌다.
“절 기억하고 계시다니, 기쁘네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분홍 리본이 감겨있는 예쁜 유리병이었는데, 안에는 색색의 사탕이 담겨있었다.
렌이 그것을 받아들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인사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렌은 멍하니 에로데가 주고 간 사탕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렌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사생아나 반푼이가 아닌, 진짜 차일드 가의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리다스나 피오라가 렌의 생각을 안다면, 그건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해줄 것이었고 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은 유리병을 쥐고 다시 천천히 악기점을 둘러보았다.
장인이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악기들은 모두 윤기가 흘렀다.
그때, 천천히 악기를 구경하던 그녀의 시선이 한 악기에 고정되었다.
생긴 것은 보통 바이올린과 같았지만, 그 바이올린은 유리로 만든 것처럼 투명했다.
바이올린의 겉은 보석을 갈아 넣은 것처럼 반짝였고 은과 다이아로 장식된 불투명한 몸체는 아름다웠다.
예쁘다.
하지만 정말 유리로 만든 것이라면, 연주를 하기에는 무겁지 않을까?
그냥 장식품이겠지.
렌이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뒤늦게 지배인이 달려왔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이고, 공녀님.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곳 지배인 리차드라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네. 그냥 구경하러 온 거니.”
딱히 안내를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렌은 그의 인사만 받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아까 본 바이올린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악기는 없었다.
장식용이라도 그냥 살까.
렌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민하던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지배인이 입을 열었다.
“연주해보시겠습니까?”
“웅, 연주 해조!”
그때, 언제 온 것인지 자스민이 렌에게 안겨 오며 소리쳤다.
“민? 언제 온 거야?”
렌이 놀랄 틈도 없이 레몬과 리리안도 바이올린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거 진짜 예쁘다.”
“언니, 이걸로 연주해 줘!”
너희들 대체 언제 온 거야?
그제야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자신에게 온 것을 확인한 렌은 피오라나 바리다스와 함께 온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온 건데?
피오라와 바리다스가 아이들을 찾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렌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자스민! 이렇게 막 돌아다니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