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외출
나는 바로 옆에 위치한 디저트 가게의 2층 테라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기점의 벽은 대부분 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밖에서도 안이 잘 보이는 구조였다.
나는 렌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악기점 근처에 디저트 가게가 있어서 다행이야.
레몬, 리리안과 함께 의상실에 다녀온 뒤, 자스민이 원하던 디저트 가게로 향하던 도중 렌과 칠드런이 간 악기점 근처에 또 다른 디저트 가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면 바리다스가 찾아오기도 편할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에서 쿠키를 먹고 있는 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의상실에서 여자아이들에게 계속 시달려 기가 많이 빠진 것인지, 평소보다 지쳐 보였다.
“그린, 괜찮니?”
내 말에 그린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만 대답할게요.”
그는 세상 모든 힘든 일을 다 겪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쇼핑에 끌려다니는, 저 기분 나도 잘 알지.
나는 그에게 내 몫으로 나온 케이크의 딸기를 포크로 찔러 내밀었다.
“고생했어.”
그린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내가 내민 딸기를 받아먹었다.
귀여워라.
오물거리며 딸기를 먹는 그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다시 시선을 악기점으로 옮겼다.
그때 렌이 투명한 유리 바이올린을 연주하려는 것처럼 잡아들었다.
렌의 바이올린 연주라니. 이건 꼭 들어야 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린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먼저 내려갈게. 그린, 더 쉬다 올래?”
내 말에 그린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저는 조금 더 쉬다가 가겠습니다.”
그의 표정에서는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쇼핑이 많이 힘들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기사단이 있으니, 그린 혼자 있어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나는 어서 렌의 연주를 듣기 위해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막 카페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마차에서 내리는 바리다스와 딱 마주쳤다.
“바리다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작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쇼핑은 즐거우셨습니까?”
나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 바리다스를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즐겁다마다! 레몬과 리리안, 자스민까지 아이들 모두 귀엽다 보니, 어떤 옷을 입혀도 잘 어울려서 드레스를 많이 사 버리고 말았다.
역시 난 입는 것 보다 입히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돈을 좀 많이 썼어요.”
“그대와 아이들이 즐거웠다면 됐습니다.”
말도 잘하네, 내가 웃음을 터트린 그 순간, 바리다스의 뒤로 토마와 레이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중, 토마는 내리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애들은 어디 있어요?”
“그린은 위에서 쉬고 있고, 다른 애들은 악기점에 있어.”
내가 바로 옆에 있는 악기점을 가리키자 그 방향을 바라본 토마는 렌이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도 악기점으로 갈게요.”
라고 말한 그는 발걸음을 틀어 악기점으로 달려갔다.
레이안도 그의 뒤를 따라갔고 어느새 문 앞에는 나와 바리다스만이 남아있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무언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희도 갈까요?”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죠.”
딸랑-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부드러운 선율이 들리기 시작했다.
렌이 악기점 한구석에 서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연주하며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유리로 된 바이올린이 아름답게 빛났다.
악기점 안에 있는 모두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렌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역시, 렌은 천재야.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음악을 연주하다니.
렌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토마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여전히 나보다 잘하네.”
토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고 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시작으로 아이들 모두 한 번씩 돌아가며, 렌의 실력을 칭찬했다. 렌은 조금 쑥스러운 듯했으나,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특히 리리안은 렌의 연주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중에 황궁에 방문하게 된다면, 나랑 꼭 합주를 해줘.”
“도레미파솔라시도도 똑바로 못 연주하면서 무슨.”
리리안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레이안이 말했고 그녀는 그 말을 무시하며 그의 발을 강하게 밟았다.
그런 행동에 레이안의 표정이 구겨졌고 리리안은 쌤통이라는 듯 혀를 내밀었다.
그때 언제 온 것인지 악기점 안으로 들어온 그린이 입을 열었다.
“악기는 접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그린도 리리안의 피아노 연주를 레몬과 함께 들었기에, 그도 그녀의 연주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린의 말에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렸고 리리안은 그를 노려봤다.
“그 정도면 참고 들어줄 만해!”
리리안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레몬이 소리쳤다.
사이좋네.
그때, 악기점에 있는 커다란 회중시계가 5시를 알렸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이제 그만 돌아가자.”
“벌써요?”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더 놀다 가자고 조르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다음에 또 놀러 나오자.”
“좋아요!”
내 말에 아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모두 마차에 탄 것을 확인한 나와 바리다스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메큐리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우리가 그를 바라보자,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메큐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실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와 바리다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네.”
이제, 리리안과 레이안이 수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었다.
* * *
그날 밤, 나는 오늘따라 오지 않는 잠에 몸을 뒤척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느니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겉옷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정원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진짜 겨울이 오는구나.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어깨를 떨며 숄을 붙잡고 정원을 향해 걸었다.
추우니까 조금만 걷다가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걷기를 한참, 정원의 끝에 있는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언젠가 바리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숲과, 저택 끝에 있는 탑에는 가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이상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에 돌아섰다. 그런데 때마침 탑이 있는 방향에서 나오는 바리다스가 보였다.
그와 내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있었기에, 멀리서 그라는 것을 알아볼 수만 있었다.
산책 중이었나.
가만히 그를 보며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발견한 바리다스가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는, 내가 인사할 틈도 없이 겉옷을 벗었다.
“밤공기가 춥습니다.”
그렇게 내 어깨에 덮어준 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그래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와 함께 돌아가는 길, 나와 그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에는 정적이 흘렀고 아까 낮과 같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일 모레, 황궁에서 마차가 올 것입니다.”
리리안과 레이안을 데리러 가기 위해 오는 것이겠지.
예상보다 빠른 날짜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에게 이제야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알겠어요, 아이들에게도 전해 둘게요.”
리리안, 레이안과의 이별을 아이들도 많이 서운해할 것 같았다.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황궁에 방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년 봄쯤에,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원작에서 바리다스가 피오라와의 결혼을 삼 년 가까이 미룬 것을 알고 있기에, 예상보다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바리다스는 결혼을 미룬 걸까.
피오라가 저지른 악행은 삼 년 뒤 레리아가 온 뒤에나 밝혀지기 때문에 바리다스가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작가가, 남주를 이혼남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쓴 설정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나로서는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알아봤자, 바뀌는 것도 없었고 말이다.
어차피 난 그와 결혼할 것이었고, 공작가 안주인이자 아이들의 형수… 아니 선생님으로서 지내고 싶었다.
결혼보다는 취업 느낌이긴 했지만.
“알겠어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후에는 수도로 올라갈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어진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수도로 가면 레리아를 만나지 못할 텐데? 그래도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수도로 올라가는 이유가, 나와 아이들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는 바리다스와 레리아가 운명의 연인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었다.
…그러니까, 둘이 진짜 운명이라면 알아서 만나겠지.
레리아와 바람을 피우면 바리다스가 미안할 일이지, 내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고 원작의 피오라와는 달리 나는 바리다스와 파혼이나 이혼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 정도 일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만날 때쯤이면, 나는 바리다스의 법적 아내였으니 말이다.
“아이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겠지만, 저는 좋아요.”
둘이 운명이면 알아서 만나, 나도 신경 안 쓰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거야.
원작이고, 운명이고 다 까라지. 이제 여긴 내 삶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