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55)화 (55/207)

54. 바리다스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나는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가의 정원은 밤새 내린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안 그래도 아름다운 정원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이렇게 눈이 쌓인 걸 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그때 쌍둥이가 강아지들과 함께 정원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처음 보는 강아지들은 눈밭 위를 뛰고 구르며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런 강아지들 옆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쌍둥이가 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그린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깜짝 놀란 나는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얘들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그제야 나를 올려다본 아이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털장갑과 목도리에 코트까지 입은 두 아이는 평소보다 더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밭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한 잔 더 가져다드릴까요?”

그때 빈 잔이 신경 쓰인 것인지 레나가 물었고 나는 그녀에게 다 마신 컵을 내밀었다.

“그러면 부탁할게.”

“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역시 겨울에는 따뜻한 음료가 최고였다. 코코아나, 따뜻한 커피, 그리고 달콤한 밀크티.

그래도 역시, 겨울에는 유자차가 최곤데.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온 뒤, 유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아직 유자를 찾지 못했거나,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유자는 아니더라도, 레몬으로 만들면 되잖아.

레몬차도 몇 번 마셔본 적이 있었고, 비슷한 생김새만큼이나 맛도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레몬을 이 날씨에 구할 수 있으려나.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둘걸, 이라는 후회가 들었다.

그렇게 내가 따뜻한 음료에 대해 고민하던 그때, 작은 눈덩이가 내 방 창문으로 날라왔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언제 온 것인지, 렌과 토마 그리고 자스민까지 정원에 모여 있었다.

내가 창문을 열자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든 아이들은 내게 소리쳤다. 

“형수님, 같이 놀아요!”

하지만 나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추위에 유독 약했다. 특히나 겨울이면 아무리 따뜻한 곳에 있어도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고통을 겪고는 했다.

나는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가기 싫어.

하지만 아이들이 저렇게 원하는데, 안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내복을 이중 삼중으로 입은 뒤 그것도 모자라 겉옷까지 두꺼운 것으로 챙겨 입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으으….”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나는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것을 후회했다.

핫팩과 패딩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잠시 고민하는데, 저택 밖으로 나온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외쳤다.

“형수님! 얼른 오세요!”

어쩔 수 없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아이들에게 걸어갔다.

“우리 눈싸움 하자!”

그때 레몬이 소리쳤고 아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제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나도 하는 거야?

아이들 사이에 껴서 눈싸움을 하기에는 민망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저기 얘들아,”

하지만 내가 채 거절의 말을 뱉기도 전에 그린이 내 손을 잡았고, 자스민도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난 형수님 편.”

“나두, 형수님 편!!”

그들의 말에 레몬은 나와 편을 하고 싶은 듯 볼을 부풀렸지만, 토마와 렌은 별 상관없는 듯했다.

그렇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팀이 나뉘어졌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지며 놀기 시작했고, 나도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눈덩이를 열심히 던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친 것인지 헉헉거리던 렌은 소리쳤다.

“잠깐 쉬다가 하자.”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눈밭에 쓰러지듯 걸터앉았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열심히 논 것인지 더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겨울은 이게 싫었다.

춥다가도, 조금 돌아다니면 더워서 겉옷을 벗고 싶어졌다. 여기서 옷을 벗으면 몸이 빠르게 식어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수밈, 나 더어. 겉옷 버스면 안 대?”

그리고 벗지 말라는데 꼭 옷을 벗어 감기에 걸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말이다.

나는 외투의 단추를 낑낑거리며 풀려 하는 자스민을 말리며 생각했다.

“안 돼, 감기 걸려.”

단호한 내 말에 자스민은 단추에서 손을 뗀 채, 울상을 지었다.

“히잉.”

귀여워. 아니,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감기 걸린단 말이야.

순간적으로 외투의 단추를 풀어 줄 뻔한 손을 억누르며, 나는 그녀의 옷깃을 더욱더 단단히 여몄다.

하지만 자스민은 불편한 듯 몸을 비틀었다.

“구롬 난 안으로 드러갈래.”

결국 더위를 참지 못한 자스민은 종종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러면 눈싸움은 못하겠네.”

그린이 말했고 내가 이 틈을 타 빠지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레몬이 바리다스의 집무실 창문으로 눈덩이를 던졌다.

정확히 창문에 맞은 눈덩이는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이 열렸다.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손을 붕붕 흔들며 레몬은 소리쳤다.

“큰 오빠!! 눈싸움 할래?”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바리다스에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건, 제국에서 황제와 레몬 둘 뿐일 거라고 말이다.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바리다스는 아래를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는 놀라 벙찐 얼굴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코드를 입은 바리다스가 아래로 내려왔고 레몬이 렌의 손을 잡은 채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바리다스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나랑 언니랑 큰 오빠가 팀, 형수님이랑 오빠랑 그린이 팀!”

그렇게 자기 맘대로 팀을 나눠버린 레몬은 바리다스와 렌을 데리고 멀어져갔다.

* * *

아이들과 함께 눈을 모으며 바리다스는 고민에 빠졌다.

어릴 때부터 놀이를 즐기거나, 같이 장난을 칠 친구조차 없던 그는 눈싸움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해봤다.

어느 정도로 던져야 하지?

그러다가 곧, 상대편에 있는 피오라와 아이들을 보고 결론을 내렸다.

살살 던져야 한다.

무조건, 살살.

어느새 피오라와 다른 아이들은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고, 그들을 따라 눈덩이를 잡은 바리다스는 최대한 힘을 푼 채, 눈을 던졌다.

하지만 그가 던진 눈덩이는 반도 못 온 채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것을 본 레몬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아니이, 더 쎄게 던져야지!! 이렇게!”

레몬은 그렇게 말한 뒤, 가진 것 중에 가장 커다란 눈덩이를 온 힘을 다해 그린에게 던졌다.

눈덩이는 그린의 어깨를 정확히 맞췄고 레몬은 나이스를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을 정확히 들은 그린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눈덩이를 레몬에게 던졌다.

그것은 레몬의 이마를 맞췄고 그렇게 쌍둥이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팀을 나눈 것도 잊은 것인지 그들은 서로에게만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 * *

이대로 두면 정말 둘이 싸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싸움은 여기까지 하자.”

내 말에 그린과 레몬은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지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면 모 할건데?”

레몬이 되물었고 망설이던 나는 눈밭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내가 팔다리를 휘두르자, 아이들은 뭘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일어나자, 레몬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게 달려왔다.

“이거 천사지, 맞지!”

“맞아.”

내 말에 눈을 반짝인 레몬은 바로 나를 따라 눈밭 위로 누웠다.

“나도 할래!”

하지만 레몬이 그린 천사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천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레몬은 울상을 지었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린은 입을 열었다.

“이건, 천사가 아니라 악마 같은데?”

“조용히 해.”

그린과 레몬이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옷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너무 오래 추운 곳에 있던 것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나는 슬쩍 아이들의 눈치를 봤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옷에 묻은 눈을 다 털었다고 생각한 나는 은근슬쩍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얘들아 이 정도 놀았으면 쉬어도 되는 거 아니니?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아이들이 아닌 바리다스가 서 있었다.

“추워 보이십니다, 그만 들어가죠.”

그는 내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리를 보고 있던 렌이 덧붙였다.

“네, 저희끼리 놀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리다스의 손을 잡았다.

“고마… 애취!”

역시,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으음, 근데 기침 한 번 한 거 가지고 그렇게 바라보면 되게 민망한데.

나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렌과 바리다스를 보며 생각했다.

“어서 갑시다.”

“들어가서 쉬세요.”

아니, 나 개복치 아닌데…?

왜 이렇게 걱정해.

그들에게 떠밀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자스민이 책 한 권을 들고, 내게 달려왔다.

“나 이거 읽어줘!”

그녀에게서 동화책을 받아든 나는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하지만 아이들과 놀아 피곤한 탓이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따뜻한 벽난로 때문에 몸이 노곤해져서 그런 것이었는지 천천히 졸음이 밀려들었다. 돌아보니 자스민은 어느덧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채 잠이든 뒤였다. 나는 조금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았다.

* *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들어온 찬바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해가 저물어 있었다.

깜빡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자스민은 그 사이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스민이 덮어주고 간 것으로 보이는 담요를 옆으로 밀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자 열린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바람이 들어온 거구나.

창문을 닫기 위해 창문 앞에 서자, 창밖으로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밤이었지만 눈에 반사된 달빛이 어둠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는데 하얗게 쌓인 눈밭 위를, 누군가 걷고 있었다.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리다스?

덜컹.

나는 창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느릿느릿 눈밭을 걷고 있는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맨발에, 얇은 셔츠 차림이었고, 표정과 눈빛은 어딘지 멍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담요를 집어 들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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