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바리다스
내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바리다스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저기까지 간 것인지, 바리다스가 다른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방향은 공작가에 방문한 첫날, 바리다스가 가지 말라고 부탁했던 작은 탑이 있는 곳이었다.
맹수가 나온다는 것이 이유였지.
“바리다스! 잠시만요!”
내가 외쳤지만 그는 전혀 듣지 못한 듯 정원수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몽유병 같은데, 정말 맹수가 나온다면… 큰일이야.
그런데, 공작가 정원에 맹수가 함부로 들어 올 수 있나?
의아함이 들었지만,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를 저대로 둘 수 없었기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얇은 숄 하나만 걸친 채 달리는 것이었기에, 안 그래도 차가운 바람이 더욱더 차게 느껴졌다.
이런 추위 속에, 저런 차림으로 얼마나 있었던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노출된 그가 걱정이 되어 나는 더 빠르게 달릴 수밖에 없었다.
미로 같은 정원수 사이를 가로질러 탑이 있는 정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을 지나치자,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탑 앞에 서서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평소에 띄던 차가운 빛을 잃은 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리다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바리다스는 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리다스!”
가까운 거리였지만 여전히 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바리다스가 안으로 사라지고, 서서히 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탑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간신히 몸을 밀어 넣었다.
쾅!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순간적으로 든 불안한 느낌에 문을 다시 열려고 해 봤지만,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에 간이침대와 탁자, 벽난로가 보였다. 벽난로의 한쪽에는 책더미가 있었는데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먼지와 거미줄이 엉켜있었다.
여긴 뭐지?
바리다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돌벽에 난 작은 유리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눈이 더 내리기 전에, 바리다스를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망설일 시간 따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층 한 층을 밟을 때마다 어둠 속에서 낡은 나무판자가 끼익, 끼익 소리를 내었다. 등골이 오싹했지만 나는 벽을 짚은 채 걸음을 서둘렀다.
한참을 올라가자 계단 끝에 작은 문이 보였다. 아무래도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문인 것 같았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으나, 밀어서밖에 열 수 없는 문은 밖에서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인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몸에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진작, 내 몸은 한계였다.
추위에 약한 내가 얇은 숄 하나만을 두른 채 저택부터 이곳까지 쉬지 않고 뛰어왔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온몸이 차가웠고 다리와 팔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발, 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밀기를 반복하며 나는 애원했다.
바리다스가 걱정되었고, 추웠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다.
걱정과 두려움, 공포와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번에 몰려왔다.
그러기를 한참, 내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인지 드디어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잠깐 사이에 더 강해진 눈보라 아래에 서 있는 바리다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돌로 만든 탑 난간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리다스!”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몰아치는 눈보라와 강한 바람 소리 때문인지 그에게는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이제는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든 지경이었다.
나는 소리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보라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정신 좀 차려, 제발.
나도 진짜로 힘들단 말이야.
그와 내 거리가 다섯 발자국쯤, 남았을 때.
나는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리다스!!”
그제야, 바리다스가 나를 돌아봤고 그는 얇은 드레스에 숄만 걸친 내 차림새에 적잖아 놀란 듯했다.
“…피오라? 왜, 왜… 이런 차림으로….”
…네가 더 춥게 입었어.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피오라!”
그가 내게로 달려오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포옥.
피오라가 눈밭에 떨어지기 직전, 그녀를 붙잡은 바리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그는 표정을 굳혔다.
또, 이곳이었다.
얼마나 서 있었던 건지, 그는 눈이 소복이 쌓인 머리를 털어내며 피오라를 안아 들었다.
이 지랄 맞은 병도,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바리다스는 눈보라로부터 피오라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탑의 문을 열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르고 가벼운 몸이 한기로 떨고 있었다.
바리다스는 피오라를 침대 위에 눕힌 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붉은색으로 빛났다. 차일드가의 가보인 마정석 반지였다.
빛은 조금씩 피오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한층 편안해졌고 떨림도 멎었다.
피오라의 체온이 점점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 바리다스는 벽난로로 다가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탑에 장작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바리다스는 한쪽에 쌓여있던 먼지 묻은 책을 가져와 반으로 찢은 뒤,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지 낀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그의 손끝에서 불빛이 번쩍였고, 벽난로에서 불이 타올랐다.
바리다스는 침대를 끌어 피오라를 벽난로 근처로 옮겨준 뒤, 창밖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아까보다 더 강해진 눈보라 때문에 바로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젠장.”
작게 중얼거린 그는 시계가 있던 방향을 바라봤다.
시계 또한 망가진 것인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눈이 그치거나 누군가 오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겠군.
그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는 크림슨이 어서 눈치채 주길 바라며, 피오라를 바라봤다.
* * *
타닥거리는 벽난로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자, 내 방이 아닌 처음 보는 곳이었다. 천장이 높은 것으로 보아, 아직 탑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아까처럼 어둡지는 않았다.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벽에 달린 촛불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바리다스가 한 건가?
마지막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떠올린 나는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낸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바리다스는 어디 갔지?
설마 또 정신을 잃은 건가?
불안해진 나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렇게 높았었나.
생각보다 높은 계단을 본 나는 침을 삼켰다.
그 순간,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층에서 바리다스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단은 나무판자가 벽에 고정되어있는 정도였기에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아래로 내려오는 바리다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계단을 내려온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는 멀쩡했다. 동상에 걸린 곳도 없어 보였고, 상처도 나지 않았다. 아까처럼 쓰러질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네.”
내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나를 다시 벽난로 앞으로 끌고 갔다.
“눈보라가 그치기 전까지는 나가기 힘들 테니, 더 쉬도록 해요.”
이미 충분히 쉰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이 보였기에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음 깨어났을 때, 그 위치 그대로 이불을 덮고 앉아있게 되었다.
다만 아까와 다른 건, 바로 옆에 앉은 바리다스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기를 한참,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아니, 왜?
아무리 생각해도 바리다스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할 이유는 없었다.
그를 따라 나온 것도 내 선택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쫓아온 건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아픈 곳도 없었고 감기 기운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쉽게 물어볼 수 있을 리 없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다시 벽난로로 옮겼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시는군요.”
바리다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타오르는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한 그의 뒷모습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이 묻어났다.
나라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이런 일을 겪고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원작을 꼼꼼히 읽어볼 걸, 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원작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내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를, 책을 펼친다고 파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시간을 들여 천천히 교감하고 알아가는 사람으로서 대해주어야 했다.
“말하기 힘든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내 대답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던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대는 내게 물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떤 일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곤 하니까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그 이상으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는 것 같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한 제국의 공작이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아닌.
그저, 상처받은 어린아이 같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만약, 제가 들어주는 것이 위로가 된다면 들어줄 수 있어요.”
나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니까요.”
그가 사랑하는, 원작의 여주 레리아만큼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고민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표면상으로도 나는 그의 약혼녀였고 일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친해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대는, 그대의 부모가 죽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상치 못한 바리다스의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동시에 마지막으로 본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가슴이 아팠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최고의 불효라면, 나는 부모님에게 그 불효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부모의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낳아 준 은혜도 모르는 괴물 같은 놈이죠.
바리다스는 덧붙였고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