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58)화 (58/207)

57. 바리다스

아이들과 거리를 둔 것도 약혼식만 한 뒤, 결혼을 미룬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자신은 누군가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도 피오라가 온 뒤로는 조금 나아졌던 것 같다.

피오라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덕분에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더는 미친 사람처럼 밤의 정원을 헤매지도 않았다. 춥고 낯설기만 했던 저택은 비로소 집처럼 느껴졌다.

어제 탑을 보러 간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어머니의 기일이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탑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미련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죄책감은 다시 서서히 바리다스를 옥죄어왔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어봤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의 형과, 오빠로서 또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살고 싶은 욕망이 커져만 갔다.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도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우습게도 말이다.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텐데.

그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고 이 병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었다.

“제가, 누군가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바리다스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동안 그가 왜 아이들을 멀리했는지, 결혼을 미루고 독신을 자처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양손을 말아쥐었다.

근데 왜, 그게 네 잘못인데?

피오라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개새끼라고 생각했는데, 더한 놈이 있었네. 공작이 개새끼잖아, 이건. 왜 모든 걸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바리다스의 쓸쓸한 얼굴이 내 입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리다스였다.

“죄송하지만 수도에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답답아.

그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결국 참다못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결혼 할 건데요?”

하지만 바리다스는 완강했다.

“저는 누구랑도 결혼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나는 바리다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두 눈을 힘주어 떴다.

그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을 후회하며 감정과 삶을 낭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강하게 나가야 했다.

“국가 간의 정략혼이 그렇게 쉽게 깨질 것 같아요?”

누구처럼, 납치나 살인을 안 하면 안 깨지지.

“…….”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는 듯, 바리다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랑 결혼하기 싫은 거예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근데 왜요?”

“당신에게, 폐가 될 겁니다.”

아니, 내가! 괜찮다잖아!!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됐기에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바리다스의 손을 붙잡았다.

“나아졌다면서요. 그럼 앞으로 더 나아지면 되는 거죠.”

바리다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저는 결혼 할 거예요. 아이들이랑, 그리고 당신이랑 수도로 갈 거예요.”

나는 이 결혼, 안 물러. 죽어도 할 거야.

단호한 말과는 달리 내 눈에서는 한 방울씩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그는 눈물을 닦아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추었다. 

“…울어요?”

“우는 게 아니라 화내는 건데요?”

나는 손등으로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아, 진짜. 답답하고 화나.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바리다스가 안쓰러워서,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당신이 울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텐데.”

다시 손을 뻗은 바리다스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우는 거 아니라니까.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손을 낚아챘다.

답답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원작에 로맨스 부분을 모두 건너뛴 과거의 나를 칭찬했다.

이 답답함을 글로 읽었다면, 아이들이고 나발이고 소설에서 하차했을 것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약혼 무르지 않을 거고. 얘기는 내가 듣겠다고 한 거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은 당신이 나쁜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그만 답답하게 굴고 나 봐요.”

바리다스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그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아이들이 슬퍼할 거예요.”

바리다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과 아이들은 이미 가족이에요.”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거 보다, 좋은 사람이에요.”

내 말에 바리다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그럼요.”

내 말이 끝났음에도, 바리다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그렇게 탑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그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알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배도 고팠고, 아무리 불을 피워 놓았다고 해도 낡은 외벽에서 계속 찬 공기가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리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불안해하지 않길 바랬다.

* * *

그 시각, 차일드 공작가.

아침 일찍 공작의 방을 찾아온 크림슨은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다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일 년 전쯤 있었던, 그 사건을 떠올린 크림슨의 얼굴이 굳어갔다.

며칠 전, 탑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셔서 이제 괜찮아지신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창문 밖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리 바리다스여도 이 날씨에는 무사하기 힘들 것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곳에 계신 것 아닐까.

크림슨은 그가 이 시간에 방을 비울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누군가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정체를 확인한 크림슨의 눈이 커졌다.

그의 품으로 달려든 사람은 바로, 자스민이었다.

“크닐나써, 형수밈이 사라져써!!”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림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오라가 사라진 것과, 바리다스가 사라진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찌해야 하지.

크림슨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까지 연관된 것이라면, 더 급해졌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자신의 병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것은 바리다스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자니, 평범한 사람이 이 날씨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다.

어차피 바리다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그는 어서 눈이 그치기를 그리고 공작님과 황녀님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라진 자스민을 찾던 렌이 다가왔다. 우는 자스민의 모습을 본 렌은 깜짝 놀라며 크림슨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에게서 자스민을 받아든 렌은 크림슨에게 물었다. 그가 자스민을 울릴 리 없다는 것을 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스민은 렌의 목을 끌어안더니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형수밈이랑, 큰 오빠야가 사라져써어!!”

그녀의 울음에, 칠드런은 망했음을 직감했다. 저택에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렌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민, 그만 울어. 두 분 다 어른인데. 설마 무슨 일 있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자스민의 등을 토닥여주는 그녀의 팔도 떨리고 있었다. 어른이라고 해서, 항상 무사할 수는 없다는 걸 아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스민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은 그녀의 언니였으니 말이다.

“금방 돌아오실 거야, 괜찮아.”

자스민을 위로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렌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날씨에, 산책을 가신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그런 날씨였다.

“눈이 멈추는 대로, 돌아오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크림슨의 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두 분의 입단속만 시키면 됐다.

“아무래도 이 일은…….”

크림슨이 두 사람에게 바리다스와 피오라가 사라진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다른 아이들이 강아지들과 함께 복도를 내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들은 금세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형수님 어디 계셔?”

“형님은?”

크림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라면 피오라와 바리다스가 사라진 것이 저택에 소문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런 크림슨의 머리에 한 가지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소라게가 됩시다, 소라게 쏙!”

피오라의 학습 덕인지, 아이들은 바로 소리쳤다.

“쏙!”

습관적으로 외치긴 했으나, 아이들은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을 한 채 크림슨을 올려다봤다.

그들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그가 소라게 끝을 말하기 전까지 아이들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피오라의 가르침이었으니까.

크림슨은 피오라의 교육에 감사하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바리다스와 피오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병을 언급하지 않고 비밀로 만들어야 할,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는 무색하게, 정적을 깨고 토마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탑으로 가신 건가요?”

그의 크림슨은 정말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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