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바리다스
토마의 말에 크림슨은 다른 아이들을 돌아봤다.
다행히도 토마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어젯밤 잠시, 외출을 하셨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새벽에 돌아왔겠지만 눈 때문에 늦어지시는 듯합니다.”
아이들이 괜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크림슨은 태연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자스민과 레몬을 제외한 아이들은 그의 거짓말을 금방 눈치챘다.
렌과 토마는 시선을 교차했다.
여기서 우겨봤자, 바뀌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자.”
자스민과 레몬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토마와 렌의 말을 따랐고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렌이 입을 열었다.
“읽을 책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렌의 접시에는 아직 음식이 한가득 남아있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벗어났다. 렌의 뒤를 따라 토마도 일어났다.
“나는 다 먹었어.”
“나도.”
그린은 토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따라나섰다. 그들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레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방 안으로 디저트가 들어왔다.
레몬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인 과일 푸딩이었다.
이건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레몬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식당 밖으로 나온 토마와 그린은 식당 안을 확인했다.
레몬은 과일 푸딩에, 자스민은 강아지들과 노느라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렌을 찾아 계단을 올랐다. 렌은 그들이 올 것을 알았는지, 계단 바로 옆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마가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렌이 물었다.
“탑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말에, 토마는 일 년 전쯤 자신이 보았던 것을 그린과 렌에게 설명했다.
토마의 이야기를 들은 두 아이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크림슨이 거짓말을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신들에게도 바리다스의 병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일 테다.
그래도 지금은 바리다스를 빨리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혹시라도 탑으로 가는 도중 쓰러졌거나, 눈 속에 갇힌 것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멍!”
정적을 깬 루이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놀아달라는 듯, 헥헥거리는 루이를 보며 아이들은 서로를 동시에 바라봤다.
“나만 그 생각 한 거 아니지?”
“아닐걸?”
“크림슨 어디 있어?”
렌이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잦아든 눈보라와 흰 눈밭 위를 걸어가는 크림슨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외투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신발을 들고 있었다.
“쫓아가자.”
렌이 입을 열었고 토마와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탑은 차일드 가의 저택에 있었고, 이곳은 아이들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었다. 그러니, 위험할 리가 없었다.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친 것은 렌이었다.
그녀는 붉은색의 목줄을 루이의 목에 걸어준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눈에서 놀려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하인들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눈이 조금 많이 내린 편이긴 했으나,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그들이 멀리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문에서 합류한 아이들은 루이를 필두로 눈 위에 크림슨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슨의 뒷모습이 보였고 아는 모습에 신이 난 것인지 루이는 속도를 올렸다.
“멍멍!”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뒤를 돌아본 크림슨의 눈이 커졌다.
루이, 렌 그리고 토마와 그린이 그의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그쳐서, 놀려고 나왔어요.”
속이 뻔히 보이는 렌의 말에 크림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더더욱.
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어서 아이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그래도, 위험하니. 저택 근처에서 놀도록 하세요.”
여기서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크림슨은 다시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택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그를 계속해서 따라왔다.
“정원의 끝으로는 가지 말라는 공작님의 말씀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때 혼나죠, 뭐.”
그린이 말했고 아이들이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크림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크림슨은 아이들을 데리고 탑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탑이 모습을 드러냈고 렌은 루이에게 시선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나, 형수님의 위치 찾을 수 있겠어?”
“멍!”
알아들은 것인지, 크게 짖은 루이는 킁킁거리며 탑 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탑에 도착한 루이는 탑의 문을 열라는 듯 벅벅거리며 긁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크림슨과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까 고장 난 문은 손잡이를 아무리 돌려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힌 그들이 차라리 문고리를 망가트리기 위해 돌을 든 순간,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부서지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탑 안에서는 아이들이 그렇게 찾던 바리다스와 피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고 있는 옷이 얇은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울먹이며 그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바리다스는 피오라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몰랐을까. 이미 너희들은 날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다스는 자신의 품에 안긴 렌과 그린을 양팔로 껴안아 주며 생각했다.
부족함 많은 자신을 이리도 좋아해 주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피오라는 계기였을 뿐, 그녀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리다스는 두 아이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원작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바리다스는 다른 사람의 개입이 없었어도 아이들을 사랑하게 됐을 것이었다.
그가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언제나,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니까.
* * *
“걱정했어요.”
나는 내 품에 안겨 울먹이는 토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눈이 그친 것은 아까 확인했으나, 날씨가 너무 추워 나가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실내용 드레스에 얇은 숄 하나였고 바리다스는 얇은 셔츠에 바지, 심지어 맨발이었으니 말이다.
바리다스의 상태도 괜찮아졌고 크림슨이 금방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까지 올 줄은 몰랐다.
괜한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이제 돌아가자.”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크림슨은 나까지 얇은 옷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바리다스의 외투와 신발만 들고 온 상태였던 것이다.
다시 저택까지 다녀오라고 말하기에는 미안했기 때문에 결국 난 바리다스의 품에 안긴 채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저택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잠옷 차림의 레몬과 자스민이 저택에서 뛰쳐나왔다.
울먹이며 내게 달려오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는 말했다.
“그래도, 옷은 똑바로 입고 나와야지. 감기 걸려.”
나도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아이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훌쩍이며 나를 끌어안을 뿐이었고 그런 두 아이의 뒤를 이어 시녀가 외투를 들고 달려왔다.
곧이어 그들은 나와 바리다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지만, 무어라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레나와 로나가 내 외투를 들고 위층에서 내려왔고 나는 그제야 그의 품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녀들도 내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걱정한 듯 얼굴에는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취!”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있던 것인지 그린이 재채기를 했다. 나와 바리다스는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괜찮아?”
“괜찮으냐?”
괜찮냐는 말도 동시에 했고 말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그린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엣치!”
이번에는 자스민의 차례였다.
자스민은 바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나는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들은 뒤였다.
……다시는 겨울에 함부로 못 돌아다니는 몸으로 만들어 줘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를 불렀다.
“레나, 생강차 두 잔. 준비해.”
“네, 황녀님.”
레나가 방밖으로 사라졌고 그 생강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했기에, 두 아이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바리다스에게 붙잡혔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레몬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 에, 에, 에취!”
나는 시선을 레몬에게 돌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로나, 한 잔 더.”
그렇게 세 아이는 생강차를 한 잔씩 마시게 되었다.
꿀도 안 넣은 순도 100% 생강차를 말이다.
한 번 생강차의 맛을 본 그들은 생강차를 마시기 싫어서라도 당분간은 따뜻하게 입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 * *
다음 날,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만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 모두 멀쩡했지만, 오직 나만 감기에 걸렸다.
추위에 약한 내가 얇은 잠옷에 숄만 걸친 채로 눈밭을 돌아다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나가 준비해 준, 생강차 한 잔을 모두 비운 나는 바로 옆에 준비된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떫어.
생강의 맛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부터 따뜻하게 입고 잔소리를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보자, 어느새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물을 마셔도 여전히 입안에 가득 찬 생강에 맛에, 양치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손짓하자, 로나가 문을 열어 주었고 바리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아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매우 좋아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지금 말하면 입에서 생강 냄새날 것 같아.
하지만 그는 나갈 생각이 없는 듯 내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기, 얘기하는 건 좋은데. 나 양치는 하고 오면 안 될까?
하지만 그의 진지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대가 해준 말 덕분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고마워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혹시라도 냄새가 날까,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대답했다.
그런 내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린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방해 안 할 테니, 더 쉬어요.”
“아니, 방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소리쳤다.
내 말에 그는 나를 다시 돌아봤고,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생강차를 마셔서 그래요.”
내 말에 숨은 뜻을 이해한 것인지 바리다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그런 웃음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동방예의지국 사람이라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런 내 모습에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바리다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오늘은 더 쉬어요.”
그 말을 끝으로 바리다스는 방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입에서 손을 뗀 나는 문밖에 있을 바리다스를 향해 소리쳤다.
“고마우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런 내 말에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할게요.”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