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시간은 약이 되지 않는다
봄이 시작되었다.
추웠던 날은 따스하게 풀어졌고 새싹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했고. 꽃향기가 공작가 정원 가득 찼다.
그리고 난 그 봄 내음 가득한 정원에서 티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놓여질 적당한 위치와 정원 손질까지 모두 지시한 대로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나는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한 일들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초대장도 다 보냈고, 마실 차와 디저트도 모두 준비했으니까.
더 이상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이제 진짜 끝이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는 며칠 뒤에 있을 티 파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사교계에 진출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앞으로 차일드 공작부인이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교계에서의 확실한 입지가 필요했다.
동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은 누가 뭐라 해도 차일드 가였다.
하지만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교 행사를 연 적이 없었고 참석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바리다스는 공무로 바빴고 아이들은 아직 사교 행사를 주최하기에는 어렸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사교활동은 대부분 가문의 안주인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난 그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동부 사교계에 내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돈이 최고인 대한민국 출신이었다. 혈연은 제일 좋고, 학연은… 잘 모르겠으니 남은 건 지연뿐이다.
물론 수도 사교계의 왕이나 다름없는 황후가 내 친구이기는 하나, 여기서 연을 쌓고 수도 사교계에 진출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티 파티를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준비했다.
이번 티 파티에서는 지난번 좋은 호응을 얻은 라떼에 이어 밀크티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지난번 라떼를 통해 우유라는 음료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으니, 이번에도 좋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밀크티는 다른 홍차들처럼 온도와 비율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취향에 따라 만들어 먹는 것이 매력이라 생각되었다.
개인적으로 밀크티는 타로를 가장 선호하긴 하나, 그 보라색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 시도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내가 선택한 찻잎은 바로 얼그레이였다.
얼그레이는 대중성도 높은 편이었고 우유와도 잘 어울리니 문제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얼그레이가 레몬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담가둔 레몬청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스콘과 레몬청을 같이 내놓거나 레몬 마들렌을 만들어 얼그레이 밀크티와 같이 내놓는다면…. 벌써부터 만족스러운 조합이었다.
공작가 파티쉐들에게 레시피도 모두 가르쳐 주었고 밀크티를 맛본 아이들도 매우 맛있다고 했으니, 문제없을 것이었다.
그때 툭 소리를 내며 장미 한 송이가 떨어졌다.
멀쩡하게 핀 장미가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멍하니 그 장미를 바라봤다.
“아직 싱싱한데, 왜 떨어진 거지. 화병에 꽂아 놓을까요?”
레나가 장미를 주워들고 말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원작에 나오는 나 말고 다른 악녀, 마리.
이번 다과회는 동부에 있는 모든 귀족 여성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그녀도 참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 티 파티에서 어떻게든 부딪히게 될 텐데.
마리가 어떤 짓을 했더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중얼거렸다.
“…기억 안 나.”
“네?”
레나가 내게 되물었고 나는 아차 싶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아, 아니야. 그렇게 해줘.”
레나는 즐거운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며 장미꽃을 테이블 위에 있던 흰색 화병에 꽂아 놓았다.
나는 화병에 꽂힌 장미 속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아이들은 안 건드렸던 거 같은데.
마리의 목표는 하나였다. 바리다스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 그랬기에 아이들과는 딱히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보이려고 했지.
그러면 문제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가 원작 여주인 레리아를 괴롭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평민이기 때문이었다.
후작가의 영애인 그녀도 가지지 못한 남자가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도 아닌 평민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지.
내 신분을 생각했을 때 그녀가 섣불리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봤자 약간 클리셰적인 여주 드레스에 차 뿌리기, 다른 영애들이랑 앞에서 신분을 가지고 놀리는 정도겠지.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리 너무 귀여운데? 너 납치, 살인이랑 공갈, 협박해 봤어? 나는 할 뻔했어.
뭐, 아무튼 기강까지 한 번 잡아 주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걱정을 떨쳐내고 기지개를 켰다.
아이들과 저녁으로 무얼 먹을지를 생각하며.
* * *
티 파티 당일, 초대받은 귀족들이 한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창밖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람 엄청 많아.”
이렇게 귀족들이 많이 모인 걸 보는 것은 두 번째였다.
토마는 눈을 반짝이며 창밖을 내다보는 그린과 레몬, 자스민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귀족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보였지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지금은 피오라나 바리다스의 보호 속에 있다고 하나, 그는 어린아이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 중, 그와 렌만이 그들이 밖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장례식 날, 그들은 처음으로 첫째 형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다른 아들과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장례식에 모든 귀족들이 그들을 어떤 눈빛으로 보는지 알았을 때, 토마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그들을 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차일드 가의 공작은 그들과 단 한 번의 접전도 없었던 이복형이었고 그들은 가문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귀족들은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들을 보며 수군거렸고 그들의 형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공작가로 돌아가게 됐을 때, 바뀐 공기와 시선에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이복형제가 그들을 쫓아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렌을 가르치던 가정교사는 여전히 공작가를 방문했고 그는 기사단에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원래 하던 것들을 그대로 누릴 수 있었으나, 새 형은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방치당한다는 사실을 사용인들이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장식품 하나, 그러다가 작은 브로치 하나. 그렇게 토마의 방에서는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다.
그린은 애초에 돈 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레몬과 자스민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 온 하녀라 그런 것인지 그들의 물건은 건들지 않았다.
오직, 토마와 렌 둘의 것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사람 또한 없었다.
대부분의 하녀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새로 온 집사는 형의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도 둘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생들이 상처받을 일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은 형과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토마는 그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형과 결혼할 사람이 저택에 왔다.
처음에는 경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과 동생들은 눈엣가시일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새 가족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고 덕분에 공작가에서의 삶도 조금씩 괜찮아졌다.
그를 감싼 공기와 분위기가 다시 따스해졌으니 말이다.
형은 전보다 다정해졌고 그들의 물건을 건드렸던 사용인들은 쫓겨났으며 무도회에 참석해 그들의 입지를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동생들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이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지 않아서.
그렇게, 동생들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스스로는 지키지 못한 것 같았다.
무도회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왜 다시.
토마는 입을 막았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웃는 얼굴이 역겨웠다.
가족을 또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또 혼자 남겨질까 봐 무서웠다.
그가 여러 개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 뒤늦게 도착한 렌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빠, 괜찮아?”
렌의 말에 조금이나마 떨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아이들이 토마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빠야, 어디 아파?”
“형, 왜 그래?”
그들의 걱정이 담긴 눈빛을 보자,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다.
토마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냐, 괜찮아.”
하지만 토마의 말에도 아이들은 걱정이 되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오라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그녀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스민이었다.
“형수밈… 오빠야가….”
울먹이며 말하는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그녀는 토마에게 걸어갔다.
“토마? 어디 아프니?”
얼굴을 쓰다듬는 손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불안감들이 사라지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답지 않게 그 손에 얼굴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끝까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의 뺨에서 손이 떨어졌고 피오라의 시선이 멀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마에 한 번씩 입을 맞춰 준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조금 이따가 봐.”
토마는 피오라의 입술이 닿은 이마를 문질렀다.
완전한 애 취급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토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그의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