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64)화 (64/207)

64. 시간은 약이 되지 않는다.

정원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다른 기사들과 함께 보초를 서고 있던 칠드런이 막 정원으로 들어선 내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티 파티의 주최자인 내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긴장이 된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다들, 제 티 파티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모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눈을 돌려 대충 살펴보니, 참가한 영애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 덕에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해본 것은 처음인지라 많은 부족함이 있겠지만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준비한 레몬 디저트들과 밀크티가 모두의 앞으로 전달되었다.

차라고 하기에는 탁한 색깔 때문인지 귀부인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당황한 눈치를 주고받았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차는 밀크티라고 합니다. 홍차에 우유를 섞은 음료예요.”

내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크티? 처음 들어보는 음료인데?”

“홍차에 우유를 타다니….”

그때 분홍 머리의 한 귀여운 인상의 어린 영애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나.”

그녀는 밀크티가 마음에 든 듯 푸른 눈을 반짝이며 양 뺨을 붉혔다.

그리고는 옆자리에 앉은 영애에게 밀크티를 권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엄청 맛있어, 실비아. 너두 어서 먹어 봐.”

그녀들을 시작으로 다른 귀부인들과 영애들도 밀크티를 맛봤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이좋게 레몬 스콘을 먹는 어린 영애들의 모습에, 친구들이 떠올랐다.

가끔 한 번씩, 전생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다정한 부모님과 절친한 친구들, 그리고 귀여운 원생들.

매번 말썽을 부리던, 동생들까지도 그리웠다.

이걸 표현하자면… 그래. 향수병이라는 말이 매우 적절할 것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기억과 추억까지 모두 떨쳐 낼 수 있을까.

이예린은 죽었지만 나는 아직 여기에, 피오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내가 이예린이었던 것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시간은 기억을 가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으니까.

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영애를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옛 추억에 잠겼다.

그때 내 시선이 느낀 것인지, 두 영애가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고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의도치 않게 두 소녀의 대화를 방해한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미안해요. 영애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내 말에 두 영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들 중, 실비아라고 불리던 영애가 입을 열었다.

“화, 황녀님은 아름다워요…!”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수줍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분홍 머리 영애가 아렌드 자작가의 미렐이었고 실비아 영애가 웨일즈 남작가였나.

그들의 신분을 기억해낸 나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칭찬 감사해요. 웨일즈 영애.”

“칭찬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이번에는 미렐이 소리쳤고 나는 너무나도 귀여운 두 소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이건 두 소녀가 귀여워서지, 절대로 내게 아름답다고 해서가 아니다. 정말로.

“오늘 티 파티에서 나온 레몬 디저트가 마음에 드셨다면 레몬 잼을 나누어 드릴까요?”

정확히는 레몬 잼이 아니라 청이었지만, 이렇게 말하는 편이 두 소녀가 이해하기 편해 보였다.

내 말에 두 소녀는 레몬청이 정말 마음에 든 듯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 두 소녀는 바로 옆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마리, 이리 와봐. 황녀님께서 레몬 잼을 나눠 주신대!”

어, 잠시만. 너희 걔랑도 친구였니?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마리는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금 눈매가 날렵하고 까칠해 보이긴 했으나,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었고 눈은 생기가 넘쳤다.

지난번에 축제에서 봤을 때는 너무 멀어서 잘 보지 못했는데, 이거 완전히 어린 애잖아.

그러고 보니, 마리는 원작이 시작할 때 겨우 스무 살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의 나이는 열여덟 살쯤.

한국으로 치자면 고등학생이었다.

괜히 어린 애를 견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이 생겼다.

그런 내 속도 모르는 마리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로즈 백작가의 마리라고 해요, 저도 레몬 잼 받을 수 있을까요?”

해맑게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이렇게 순수하고 귀여운데, 대체 어떻게 자라길래 커서 사형을 당하는 거니.

사실 전부 바리다스 잘못 아닐까? 왜 쓸데없이 잘생겨서! 왜 굳이 엄청나게 잘생겨서! 이런 순수한 아이를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건데!

그렇게 나는 아무 죄 없는 바리다스를 원망하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만큼 드릴게요.”

내 말에 로즈는 환하게 웃으며 미렐과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내 앞에 자리를 잡은 세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드레스나 장신구와 유행하는 화장과 같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야자와 입시 이야기를 더한다면 영락없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일 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어린아이들과 얘기를 하니,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세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을 때,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 맞아. 황녀님도 혹시 엘시디어스 좋아하시나요?”

뭐지, 그 남자 아이돌 같은 이름은.

근데 여기에 아이돌이 있을 리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황녀님은 엘시디어스가 아니라 리오드 좋아하실 거거든?”

아니, 진짜 그게 뭔데?

두 소녀는 서로 다른 이름을 외치며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엘시디어스가 더 잘생겼어!”

“하지만 리오드가 더 연기 잘하거든!”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중지시키며 마리가 설명을 해 주었다.

“둘이 좋아하는 극단 배우 이름이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진짜, 놀랄 정도로 여고생 그 자체인데? 라고 말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린 나는 마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리는 좋아하는 배우 없니?”

내 말에 마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배우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이어진 마리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당연했으니 말이다.

이거 참….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는 그녀의 패기로운 대답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어라 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차마, 잘 될 거야. 같은 희망 고문은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거기서 끝마치려 했다.

“잘 될 수 있겠죠?”

그녀의 다음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아니, 아가야. 이건 너무 패기로운데.

무어라 대답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인해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지.”

내 말에 순간적으로 마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읽은 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너무 어리네.

“그 감정을 핑계 삼아 남들에게 피해를 안 준다면.”

꼰대 같은 말이긴 했지만 여기서 여지를 주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기는 대충… 잡은 것 같지?

어린아이에게 너무 심한가, 라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도 들었지만 선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약혼녀 앞에서 저러는 건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고.

“…조언 감사합니다.”

마리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테이블의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그 사실을 느낀 미렐과 실비아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 영애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이 있다면, 다음에 같이 보러 가는 건 어떤가요?”

내 말에 미렐과 실비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두 영애가 신이 나 두 배우에 대해 떠드는 와중에도 마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신경 쓰인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기회가 된다면, 로즈 영애도 같이 가요.

“…네.”

마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삐뚤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조금은 풀어진 분위기 속 두 영애는 내게 여러 가지 뮤지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던 도중 실비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이거 샀어요.”

그녀가 꺼낸 것은 작은 목걸이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보석을 한 번 돌렸다. 그러자 보석 안쪽에 숨겨져 있던 사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진 속에는 잘생긴 미남자가 서 있었다.

이거, 완전히 연예인 굿즈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얘가 저희 리오드입니다.”

리오드는 바리다스 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내 눈이 너무 높아졌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네요.”

내 대답에 실비아는 뿌듯하게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죠! 저희 리오드 진짜 잘생겼죠. 이거 진짜 어렵게 구한 거예요.”

그런 실비아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그녀는 내게 더 가까이서 보라는 것처럼 목걸이를 내밀었고 내가 그것을 받아든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말 잘생겼네요.”

익숙한, 그리고 나직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서 있었다.

무언가 불쾌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왠지 눈치가 보였다.

저, 그 약혼자님 이거 바람 아니에요.

이런 거 해명할 사이인지 좀 애매하긴 한데, 진짜 아닙니다.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여기 있어요?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리오드의 그림과 마리 그리고 바리다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와요?

그때 바리다스의 뒤에 서 있는 토마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또 왜 여기 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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