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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어린이집 (65)화 (65/207)

65. 시간은 약이 되지 않는다.

조금 전.

바리다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아니, 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바라보다 결국 손에서 펜을 놓았다.

“…하.”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티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정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피오라가 보였다.

피오라는 황녀였고, 오늘 티 파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녀를 만만히 볼 사람도 없었고 함부로 대할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찾아가 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진행되는 티 파티는 여성들만의 모임이었다. 그가 아무리 이 저택의 주인이라 해도 함부로 갈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차라리 아이들과 노는 것이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에게 달려와 안겼을 아이들인데, 그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중심에는 토마가 있었다.

“오빠, 괜찮아?”

레몬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부르며 말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가 걱정이 되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니, 진짜 이제 괜찮다니까.”

토마의 말에도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들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그제야 바리다스를 돌아본 아이들은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렌이 입을 열었다.

“오빠가 몸이 안 좋아 보여서요.”

“렌!”

그녀의 대답에 토마가 소리쳤지만 렌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프면 치료를 받을 생각을 해야지, 감추는 그가 답답할 뿐이었다.

“맞잖아.”

렌이 말했고 토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바리다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저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토마의 대답에 바리다스는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바리다스의 행동에 토마는 당황한 듯했으나, 그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열은 없군.”

그의 대답에 토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다스의 말이니, 이제 동생들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바리다스는 그의 생각보다 눈치가 더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스티앙에게 다녀오자.”

스티앙, 그의 이름을 알아들은 아이들은 토마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그는 차일드 가의 주치의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깐깐했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특유의 기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주사를 매우 아프게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 모두 그에게 주사를 맞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토마가 걱정은 되었지만, 스티앙이랑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녀와 오빠.”

레몬이 입을 열었고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토마는 바리다스를 따라 방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진짜 이제 괜찮은데.

토마는 무언가 꾀병을 부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앞서 걷고 있는 바리다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여기는 스티앙의 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토마와 바리다스가 향한 곳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바리다스의 집무실에서는 그에게서 항상 느껴지는 상쾌한 향과 그에 비해 약하지만 부드러운 커피 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토마는 처음으로 방문한 바리다스의 집무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바리다스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을 울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가 차를 가지고 왔다.

“두고 가도록.”

그의 말에 시녀는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인사한 뒤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전자에서 흘러나오는 향이 바리다스의 향과 같은 것으로 보아 바리다스에게서 나는 향은 차 향인 모양이었다.

토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바리다스가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형님이 직접 따라주는 차라니. 이걸, 마셔도 되나.

그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놓인 컵을 바라보았다.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 아뇨!”

그저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의 형이, 자신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형님은 조금 이상했다. 아니, 변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항상 냉랭하던 시선은 부드러워졌고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고는 했다. 정말 가족이 된 것처럼 말이다.

둘만 있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토마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대해주는 것이,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를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니?”

피오라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평소와 다른 그의 말투에는 조금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피오라와 같은 상냥함이 느껴졌다.

그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오라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아이들을 대하기 위해서.

토마도 그 사실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주는 것이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인지, 가족으로서의 다정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말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싶어, 토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무섭고, 싫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처음으로 말했다.

토마는 고개를 들어 바리다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식으로?”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그가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지 않기 위해 주먹에 힘을 준 토마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형님을 처음 만난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부모님의 장례식 날을, 토마 나름대로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사실을 눈치챈 바리다스는 토마가 조금 기특하다고 느꼈다.

“누구보다 부모님의 눈에 띄려고 아등바등하던 사람들이, 두 분의 죽음을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나 역겹고 화가 났는데 그 와중에도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의 태도가 한 번에 그렇게 바뀔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

“지금도 그래요. 여전히 저는 그들이 무섭고 싫어요. 형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저희를 그렇게 대했을 테니까요.”

토마의 말에 바리다스는 주먹을 쥐었다.

그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용인들을 내쫓았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만 더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호의를 표했더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였기에, 죄책감의 무게가 그를 강하게 짓눌렀다.

“…미안하구나.”

바리다스의 말에 토마는 고개를 저었다.

“렌의 말에는 저도 동의해요. 형님의 잘못이 아닌걸요. 저희는 늘 형님에게 감사하다 생각했어요.”

“아니, 나는 너희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 같구나.”

과거의 그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잘못은 바로잡으라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해 준 만큼 그리고 못 해 준 만큼 더 노력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서.

“조금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해 줘서 고맙구나.”

“너의 의견을 말해주렴, 원한다면 그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고 내게 서운한 것이 있다면 다 말해 줄 수 있겠니?”

다정한 그의 모습에 토마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진짜 그가,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전부 괜찮아요. 그냥… 그 일을 이겨내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그는 바리다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더 이상 이 일로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전부터 이렇게 말 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자신도 동생들과 같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였으니 말이다.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토마가 자신을 의지해 주는 것이, 고맙다고 생각하며.

“얼마든지.”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형과 동생이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토마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괜찮다면 지금 티 파티가 진행되는 곳에 다녀와도 될까요?”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잠시 고민했다.

오늘 열린 티 파티는 피오라를 비롯한 귀족 여성들만 참석할 수 있는 행사였다. 제 아무리 자신의 정원이라도 마음대로 여성들의 공간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토마에게 분명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터.

토마가 원하는 대로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자신과 토마가 티 파티에 자연스럽게 등장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참가할 방법이…….

“어려울까요?”

토마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때, 바리다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리다스는 크림슨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생각했다.

이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토마를 위한 것이라고.

간 김에, 겸사겸사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보고 와야겠군.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바리다스의 말에 토마도 이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함께 티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정원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던 도중 정원 근처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갑자기 든 생각에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다른 아이들도 혹시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니?”

그의 말에 토마는 고개를 저었다.

렌을 제외하면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몰랐다.

자신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렌도 분명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토마는 입을 열었다.

“렌을 제외하면 괜찮을 거예요. 동생들은 모르거든요.”

단호한 토마의 대답에 바리다스는 알 수 있었다.

그와 그녀가 동생들을 지켰다는 사실을.

자신과는 다르게 토마는 훌륭하게 동생들을 지켜냈다.

그는 나중에 렌과도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생이 많았다, 기특하구나.”

그런 그의 행동에, 토마는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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