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66)화 (66/207)

66. 시간은 약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왜 여기에…?”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바리다스와 토마를 향했다.

토마는 그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 바리다스의 뒤쪽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바리다스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저택에 방문해준 손님들께 인사라도 드릴 겸 잠시 들렀습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꽃들을 품에 한가득 들고 있었다.

영애들의 얼굴에는 의문스러움이 사라지고 미소가 떠올랐다.

“약소하지만, 여러분의 시간이 더 즐거워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본 실비아와 미렐이 속삭였다.

“나 리오드가 가장 잘생겼다는 거 취소할게.”

“나도.”

두 소녀의 팬심을 얼굴로 이겨버린 그는 내 상황도 모르고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리다스, 당신 이런 성격 아니잖아요.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지만 바리다스가 이곳에 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그의 저택이었지만 이번 티 파티가 귀족 여성들만을 위한 행사라는 걸 바리다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예의범절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손에 들린 리오드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그의 웃는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그, 리오드 지금 웃을 때 아닌 거 같아요.

마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순간 바리다스의 잘생긴 얼굴을 가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유고 나발이고 너도 웃지 마! 얘 앞에서 웃지 말라고!

내 마음도 모르고 바리다스는 미소를 지은 채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은 각자 들고 온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마리를 비롯한 몇몇 영애들이 바리다스를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울고 싶은 사람은 나뿐이겠지.

그때 바리다스의 뒤쪽에 서 있던 토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 못지않게 이 자리가 불편해 보였다.

근데, 토마는 왜 온 거지? 바리다스가 강제로 데려온 것은 아닐 텐데.

나만 그의 존재에 의문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지 금세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바리다스도 느낀 것인지 그는 입을 열었다.

“이쪽은, 제 남동생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동생.

그의 말에 조금 나이가 있는 귀부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바리다스가 이복동생들을 인정한 것이 사실이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가 공식적으로 두 번씩이나 인정을 한 이상, 그들은 이제 아이들을 공자로서 대해야 했다.

“토마 차일드라고 합니다. 오늘 방문해주신 여러분 모두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 토마 말도 잘하네…… 근데, 진짜 왜 온 거냐고.

바리다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기특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토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은 원하시는 만큼 더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인사를 한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미소 지은 뒤 토마를 데리고 정원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리다스 덕분에 티 파티의 분위기는 더 좋아졌으나, 이거 어쩔 건데.

나는 아직도 바리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가고 있지 못하는 세 소녀와 내 손에 들려있는 리오드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단 원망부터 하고 해명은 조금 있다가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가 사라진 방향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 * *

“아직도 떨리니?”

그의 질문에 토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피오라나 바리다스가 곁에 있으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금방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있으면, 항상 괜찮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금방 나아질 것 같아요.”

씩씩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미소 지었다.

토마가 고맙고 또, 기특했다.

“너의 상처가 쉽게 잊히거나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는 너희가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마.”

토마는 바리다스의 말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나이에 공작가를 나간 형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훌륭한 공을 많이 세웠다. 그런 형님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기대고 있지 않은가.

그런 토마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해주었단다.”

“하지만 결국 저 자신도 지켜내지 못했고 해결도 제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잖아요.”

모순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었고 어른에게 의지해도 되는 나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역시, 조금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상했다.

토마답지 않은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짧지 않은 내 방황 속에서도 나를 가족으로 생각해준 너희들에게 매우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의 말이 맞았다.

아이들은 그가 공작이기 때문에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그와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갔다.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너희가 지금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내 동생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들이 너무….”

바리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토마를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문득, 이제껏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직접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토마의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란다.”

* * *

바리다스와 토마 덕분에 티 파티의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와, 나 공작님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엄청 잘생겼다.”

미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도 덧붙였다.

“그니까, 진짜로… 지난번 무도회에 참석 못한 게 인생의 한이다.”

“저분이랑 결혼하는 영애는 세금 더 내야 한다고 생각해.”

“맞지… 아!”

그제야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챈 두 소녀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입을 열었다.

“더 낼까요?”

장난스러운 내 대답에 웃음을 터트린 두 소녀는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뇨, 황녀님 용안이시라면 공작님이 내야죠.”

“차일드 공작가는 당장 데이먼 제국으로 광산이라도 하나 보내야 할 것 같네요.”

그녀들의 대답에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웃은 나는 밀크티로 웃음을 달랜 뒤, 입을 열었다.

“두 영애 너무 귀엽네요. 진짜로.”

내 말에 두 소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두 소녀에 비해 마리는 아직도 바리다스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미렐은 팔꿈치로 그녀를 툭툭 건드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리는 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 생각이 제발 나쁜 생각이 아니길 빌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나쁜 짓 하지 말고 그대로만 자라줘. 제발.

나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며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내 기도가 통하지 않은 것인지 마리는 그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티 파티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돌아가는 영애들에게 레몬청을 하나씩 선물해 주었다. 

함께 한 마차에 오른 미렐과 실비아, 마리를 배웅하는데, 실비아가 마차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황녀님. 혹시, 공자님들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면 나중에 제 동생 소개해 드릴까요? 올해로 아홉 살인데 좀 사차원이긴 해도 착해요.”

아홉 살이라면, 렌과 동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웃으며 그녀들을 배웅했다.

“그래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함께 방문해주세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창문을 닫았다. 나는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다 저택으로 돌아섰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입을 열었다.

“야, 마리 정신 차려.”

“아, 응.”

대답을 한 뒤에도 여전히 마리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실비아는 마찬가지로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좋아해도.

솔직하게 말해서 친구의 사랑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마침 악녀로 소문난 데이먼의 황녀이니, 그녀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악녀라는 소문은 헛소리였다. 그녀는 잠깐이나마 그 소문을 믿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게다가 오늘 보니 차일드 공작도 데이먼 황녀를 단순히 정략혼 상대로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눈빛으로 바라봐.

하지만 실비아는 차마 마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너 되게 실수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미렐은 달랐다.

단호하게 말한 그녀는 마리의 볼을 꼬집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마리는 여전히 미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눈치 빠른 미렐은 바리다스를 향한 마리의 마음을 황녀님께서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하겠는가.

심지어 그분은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마리의 체면을 생각해 화를 내지 않으셨다.

겨우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미렐은 황녀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렐은 그녀가 자신들에게 보인 호의가 고마워서라도 마리가 삐뚤어지지 않길 바랐다.

마리는 언제나 괜찮은 친구였지만 공작님의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이상해졌으니 말이다.

그녀의 눈을 돌려 보겠다고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보여줘도 관심도 없고 소개팅을 주선해줘도 매번 파토가 나니.

아니, 이건 공작님 얼굴을 보니까 이해 가는 사항이긴 했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어.

그래도 미렐은 자신의 친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분명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묘한 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친구로서 해주는 말이야, 정신 차려 마리."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이미 미렐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진짜, 미쳤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뺨이라도 갈길까 고민하던 미렐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뒤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렐은 알고 있었다.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황녀님이 마리가 어리기 때문에 봐준 것이라면, 그건 크나큰 실수였다.

미렐은 사악하게 빛나는 마리의 주황색 눈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친구가 사고를 치기 전에,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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