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숲에서
창문을 열자 기분 좋은 봄바람이 느껴졌다.
“날씨가 무척 좋네요.”
로나가 내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정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맑았고 꽃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졌으며 바람은 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런 날 소풍이라도 가줘야 하는데.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푹 쉬어야지.
나는 차를 거의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버린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창문은 열어 놔 줘.”
“네.”
로나가 대답한 뒤 찻잔을 치워 방을 나섰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책을 집어 펼쳤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안 벗어날 거야.
이게 얼마 만의 휴식인지.
티 파티 이후로 나는 여러 모임과 연회에 초대를 받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교계에서 유명한 귀부인들이나 어린 영애들을 만나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조금 어렵고 무서운 분위기로 표현한 것에 비해, 생각보다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비유하자면 여대생과 학부모 모임 같았다.
좋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체력은 바닥났지만.
아이들과도 놀아 줘야 하는데.
하지만 연이은 외출로 인해 나는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도 이제 당분간은 쉴 수 있으니, 아이들과는 내일부터 놀아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덮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피오라가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몬과 그린이 손을 잡고 바리다스를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그는 노크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짓에 대기하던 하인이 문을 열었고 방 안으로 레몬과 그린이 들어왔다.
바리다스에게 인사를 한 그들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 같이, 숲으로 소풍을 가도 되나요?”
그들의 질문에 바리다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숲이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기사를 동행하면 안전할 것이다.
“너무 깊게는 들어가지 말고, 기사들과 함께 가렴.”
“알겠어요!”
그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 신이 난 쌍둥이는 환하게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피오라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크 소리에 밖으로 나온 것은 레나였다.
그녀는 둘의 출입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녀의 말에 쌍둥이는 아쉬운 듯 울상을 지었다.
오랜만에 같이 놀러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요즘 들어 형수님이 많이 바쁘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쉬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방에 음식들을 가득 담은 그들은 식당에서 나오던 렌, 그리고 자스민과 마주쳤다.
렌이 삼 층에 갈 일은 피오라를 만나러 가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레몬은 입을 열었다.
“형수님 주무시고 계셔.”
레몬의 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편하게 쉬실 수 있도록 오늘은 우리끼리 놀자.”
“알았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하게 바로 긍정하는 두 아이의 대답에 렌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레몬이 들고 있던 가방을 들어주었다.
“소풍 가려고 한 거였지? 그러면 다 같이 가자.”
자신들의 생각을 다 읽은 것 같은 그녀의 말에 두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네 아이는 토마를 찾아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근처에 도착하자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와 기합 소리, 그리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린과 자스민은 그런 소리가 거슬리는 듯 표정을 구겼다.
“소리가 무서어….”
자스민의 말에 아이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연무장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근처에는 기사들이 쉴 때 사용하는 벤치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렌은 동생들을 두고 혼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원래는 하녀들이 할 일이었지만 기사들이 있으니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후회됐다.
연무장에 다다른 렌이 커다란 문을 밀자, 아까보다 소리가 훨씬 커졌다.
살짝 표정을 구긴 렌은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훈련 중인 그들은 렌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토마를 찾아 연무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이곳에서 렌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칠드런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피오라의 가디언을 그만둔 뒤로, 거의 만날 일이 거의 없었고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조금은 어색하다고 느끼며 렌은 입을 열었다.
“오빠를 찾으려고요.”
그런 일이라면, 하인을 시켜도 될 텐데.
칠드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견습 기사들이 아닌 정식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어린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칠드런은 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오늘은 훈련을 쉬는 날이었다.
“제가 모셔 올 테니, 앉아 계시죠.”
그의 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으로 기사들의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기 앞에 벤치에 있을게요. 그리고 동생들과 숲으로 소풍을 갈 예정이니 호위를 맡아줄 기사분을 찾아 주실 수 있나요?”
칠드런은 잠시 고민했다. 숲이라면, 몇 달 전 공작님께서 근처 도적떼들을 퇴치하며 맹수들도 몇 마리 사냥했다고 들었다. 전보다는 안전할 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차일드 공작가의 숲은 델아트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고 각각의 갈래가 외곽으로 이어지는 다른 여러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이따금 도적떼가 숨어들기도 하고, 맹수들이 먹이를 찾아 들어오기도 했다.
저택 근처의 숲은 기사단이 지키며 순찰을 돌기도 하니 딱히 위협되는 것들이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게 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뛰어난 기사들을 선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칠드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와 칠드런, 그리고 그레이가 아이들이 있는 벤치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낯선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았고 평범한 기사 여러 명보다 그레이 한 명을 데려가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다스가 그레이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칠드런은 그냥 왔다.
어차피 오늘은 훈련을 쉬는 날이었고 할 일도 딱히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 함께 숲으로 향했다.
숲에는 공작가 정원에서 볼 수 없는 야생화가 가득 피어 있었다. 민들레와 데이지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꽃들이 말이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작은 돌길이 깔린 산책로가 나왔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그린의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계실 때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렌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그 사실을 느낀 그린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른 가자!”
그린이 생각할 때 형과 누나는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와 레몬은 항상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새 가족이 생겼고, 덕분에 가족들 사이가 가까워졌다. 더는 자신들을 지켜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토마와 렌이 상처를 잊고 조금 더 어린아이답게, 웃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아직 어리지만 말이다.
“빨리 안 오면 나부터 간다!”
평소답지 않게 장난스럽게 말한 그린이 앞질러 가기 시작했고 레몬, 자스민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 때문에, 그레이도 아이들의 속도를 맞춰 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레몬과 그린은 뒤를 휙 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동시에 소리쳤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건데, 빨리 와!”
두 아이의 모습에 렌과 토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이미 다 이겨내고 저렇게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형과 누나인, 자신들이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마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달릴 수 있지?”
아이들 중 가장 체력이 약한 그녀를 배려한 말이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고 토마와 렌은 함께 아이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햇살이 아이들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 * *
“안녕히 주무셨나요?”
로나의 말에 나는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셨다.
“응, 잘 잤어.”
시계를 바라보자 이제 막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자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 시간대에는 강아지들과 놀아줬던 것 같은데.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때, 내 앞으로 강아지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 나왔다. 강아지들은 각자 자신의 목줄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들은 목줄을 내 발밑에 내려놓더니 드레스를 물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산책하고 싶다는 거야?”
“멍!”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각자의 목에 목줄을 채워 주었다.
이제 꽤나 크기가 커진 루이와 리리, 라라는 조금만 더 자라면 강아지라고 부르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들은 강한 힘으로 나를 이끌기 시작했고 내가 이게 산책을 시켜주는 건지, 내가 당하는 건지 고민하게 될 때쯤 저택에서 바리다스가 나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달려온 그는 목줄을 달라는 듯 내게 손을 뻗으며 인사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구세주…!
나는 빠르게 바리다스에게 리리와 루이의 목줄을 넘겼다.
우리는 함께 산책하기 시작했다. 바리다스는 워낙 말수가 없었고, 나는 피곤해서 조용히 걷기만 했다.
나는 밖으로 나온 김에 아이들을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차일드 가의 정원은 매우 컸지만, 아이들이 노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은 정원의 입구나, 저택 앞 분수대 근처, 그리고 놀이터였다.
하지만 그곳에도 아이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이들이 어디 갔는지 알아요?”
어느덧 저택의 정문에 다다르자 슬슬 걱정이 된 나는 바리다스에게 아이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멍!”
라라가 갑자기 앞으로 내달렸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나는 실수로 목줄을 놓치고 말았다.
라라는 그대로 정문 사이 틈을 통과해 숲으로 달려가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라라 때문에 당황한 리리와 루이도 짖으며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나와 다르게 만만하지 않았고 그들은 바리다스의 앉아, 한 마디에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우리가 다가가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라라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 나가려 했고 그런 나를 바리다스가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숲에 있으니, 아마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내가 리리를, 바리다스가 루이를 데리고 천천히 숲을 걸으며 라라와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리리와 루이가 짖으며 우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끌고 간 곳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샛길이었는데 옆쪽에 커다란 풀들이 이 자리만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이 분명했다.
우리를 급하게 끌고 가는 강아지들을 보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렇게 나와 바리다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강아지들을 따라 샛길을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랗게 자란 나무 틈 사이로 밝은 햇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자 토끼풀이 잔뜩 자라난 탁 트인 언덕이 보였다.
이 주변을 제외한 곳은 여전히 풀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었기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언덕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
레몬의 목소리에 반응한 두 강아지는 짖으며 목줄을 잡아당겼고 그는 이번에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반대쪽으로 넘어가자, 환한 햇빛 아래,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뭐가 그리도 반가운지 환하게 웃으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형수님!”
“오라버니!”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