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69)화 (69/207)

69. 뮤지컬

“황녀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실비아와 미렐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두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앞다투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요!”

높게 올라간 명랑한 목소리가 고등학생 때의 내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잔뜩 들떠있는 둘과 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야, 잘 지냈죠.”

그들과 인사를 한 나는 마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며칠 전 나는 콜린 백작에게 실비아와 미렐이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뮤지컬의 박스석을 선물 받았다.

콜린 백작의 의도는 바리다스와 함께 관람하라는 것이었지만 바리다스는 최근 업무로 바빠 보였고, 그렇다고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는 조금 수위가 있었다.

그랬기에 콜린 백작에게 양해를 구해 마리와 미렐, 실비아을 초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마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오지 않은 건가요?”

내 말에 두 소녀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

내가 의아함을 담아 바라보자 미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거의 다 나았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저희끼리 놀아요.”

그들은 공연장 앞에 있는 디저트 가게를 가리키며 순식간에 화제를 돌렸고 나는 오늘만큼은 마리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요.”

그렇게 나는 그들과 함께, 디저트 가게로 들어왔다.

‘로얄 슈거’라는 이름의 디저트 가게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가게인 만큼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지고 다가왔다.

가장 먼저 메뉴판을 받아든 실비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블랙 밀크티랑 슈크림으로 주세요.”

내 티 파티 이후로 밀크티는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동부 사교계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얼그레이 밀크티와 레몬잼 스콘이 세트로 파는 곳도 생겨났고 말이다.

바로 주문을 마친 실비아에 비해 미렐은 메뉴판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다이어트 중이라. 라떼에 생크림, 자바칩 추가.”

…다이어트 맞지?

그 정도면 케이크 한 조각 칼로리는 거뜬히 나올 것 같은데.

“손님은 어떤 것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때 웨이터가 내게 질문했고 나는 아차 싶어 빠르게 메뉴를 훑었다.

많은 메뉴들 중 딸기 케이크가 딱 눈에 들어왔고 마침 상큼한 것이 먹고 싶었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저는 밀크티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로 주문할게요.”

“그럼 그렇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주문을 마친 내가 결재를 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실비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를 돌아보자, 실비아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저희가 살게요.”

“네, 뮤지컬도 황녀님이 초대해 주신 거잖아요.”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렐도 입을 열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내 말에 실비아와 미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아, 진짜 보면 볼수록 귀엽네.

그녀들은 정말로 고등학교에서 열두 시까지 야자를 해도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상큼함과 귀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 근데 벌써 기대돼요. 어떡해.”

실비아와 미렐이 좋아하는 배우들은 델아트 극단의 양대 산맥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잘생기고 다정한 매력을 가진 엘시디어스와 까칠하고 시크한 리오드,

오늘 공연되는 뮤지컬의 제목은 <아가씨와 두 기사>로 두 배우는 제목에 나오는 기사들을 맡았다.

매 회차마다 아가씨와 이어지는 기사가 바뀌는 것이 이 뮤지컬의 특색이라고는 하지만 운이 좋지 않으면 여러 번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여주와 이어질 때까지 말이다.

기획자가 팬들 돈 뜯어가는 법을 알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뮤지컬의 주 타겟층은 귀족 여성이 분명했다.

“우리가 보는 순서에는 리오드가 주인공일 거야.”

미렐이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주인공이라는 단어에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어. 이 세계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걸.

나는 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마음에 거슬리는 큰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원작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녀님은 누가 주인공이 될 것 같아요?”

그때 이어진 실비아의 질문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여자 주인공과 이어져야 남자 주인공이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와 미렐은 입을 열었다.

“로맨스 뮤지컬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죠, 남주와 여주가 이어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면, 바리다스와 레리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 세계의 주인공은 누가 되는 거지?

그러나 나는 그 고민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들이 서빙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문하신 디저트입니다.”

웨이터가 테이블에 음료와 케이크를 차례로 내려놓았다.

“잘 먹을게요.”

나는 두 소녀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케이크를 작게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생크림이 입 한가득 퍼졌지만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황녀님?”

그런 내 생각이 밖으로 티가 난 모양이었다.

실비아와 미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미렐의 말에 약속을 잡아놓고 계속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표정을 고친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요.”

걱정이 되었는지 미렐은 내 손목을 붙잡고 체온을 쟀다.

당연히 내 체온은 정상이었다. 그래도 미렐은 안심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이 느껴지는 미렐의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내 손목을 잡은 미렐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보세요, 멀쩡하죠?”

그런 내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네요.”

그렇게 다시 좋아진 분위기 속,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 그나저나 여주인공이 부럽네요. 두 능력 있는 미남이 자기가 좋다고 따라다니고 있으니.”

실비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슈크림을 오물거렸다.

“그러네, 진짜 승리자는 여주인공이다.”

그녀의 말에 미렐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다…….”

동시에 말하며 두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약혼할 나이구나.

이 귀족 사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귀족들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 가문의 이득을 위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녀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다 괜찮으니까, 아저씨만 아니면 좋겠어.”

미렐의 말에 고개를 저은 실비아는 테이블에 놓인 꽃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다 필요 없고 남편이 잘생겼으면 좋겠어.”

다 필요 없는 거 맞아?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비아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부럽네요.”

그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미렐은 타박하듯 실비아의 이름을 불렀다.

“실비아!”

미렐의 외침에 실비아는 왜 그녀가 왜 자신을 부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나는 그녀가 왜 화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략혼 상대가 아무리 잘생기고 능력이 있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 상대와 강제로 결혼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렐은 내 기분을 생각해준 것이었다.

“죄송해요….”

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사과하는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보면 볼수록 미렐이 사회생활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도 빠르고 분위기 파악도 잘하는 데다가 말까지 예쁘게 하는데, 어떻게 안 예뻐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뮤지컬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시계가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갈까?”

“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내 양팔에 팔짱을 끼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노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함께 공연장으로 향했다.

* * *

크림슨은 두 시간 째, 여전히 서류가 쌓여 있는 바리다스의 책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신경 쓰실 거면서 왜 안 가셨습니까?”

“다물어.”

평소답지 않은 날이 선 말투였다.

하지만 크림슨은 익숙한 듯 눈을 깔며 그의 앞에 또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넵.”

이제 그의 책상에는 빈틈없이 서류가 쌓여있었고 바리다스는 허망한 눈길로 서류들을 바라봤다.

전부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신을 두고 다른 영애들과 뮤지컬을 보러 가버린 피오라가 계속 신경 쓰였다.

그렇게 그 배우가 보고 싶었나.

바리다스는 얼마 전 티 파티에서 리오드가 그려진 로켓을 들고 있던 피오라를 떠올렸다.

그러자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류 때문에 같이 갈 수도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

요즘 들어 아이들과 자주 시간을 보냈으니, 일이 쌓인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수도로 가는 것과 결혼식 준비 때문에 일이 평소의 두 배, 아니, 세 배였다.

그랬기에 결국 포기하고 일을 택했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줄이야.

“미치겠군.”

작게 중얼거린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 시작 시간이, 두 시던가.

시계는 막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공연은 네 시간이니 서류를 여섯 시 전까지 끝낸다면, 딱 저녁 시간이었다.

네 시간…. 아니, 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세 시간 반 정도인가.

아무리 봐도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다섯 시 반까지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다시 의자에 앉은 바리다스는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서류들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서류를 빠르게 검토하는 바리다스를 보며 크림슨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작에 하셨으면 이럴 일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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