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70)화 (70/207)

70. 위스키 봉봉

뮤지컬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천천히 극장을 벗어났다.

“엘시디어스가 주인공일 줄 알았다니까요! 아, 진짜 재밌었어요.”

실비아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달래며 흥분한 목소리로 감상을 늘어놓았다.

“맞아요. 리오드가 주인공이 아닌 건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미렐은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역시 양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둘 모두 뮤지컬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내 말에 두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잡았다.

“진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환하게 웃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두 소녀의 모습에 나야말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 덕분에, 오랜만에 실컷 놀았으니 말이다.

“다음에는 함께 쇼핑하러 갈까요?”

내 말에 실비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쇼핑이요? 완전 좋아요!”

미렐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은 친구보다는 귀여운 후배 같았다. 쇼핑이라면 질색하는 나지만, 이 두 사람과 함께라면 즐거울 것 같았다.

얘들아, 너희가 내 후배로 들어왔으면 매일 밥 사줬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까지 먹고 헤어질까요?”

생각해보니, 밥은 지금도 사줄 수 있었다.

뮤지컬이 끝난 시간도 딱 여섯 시였고 말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실비아와 미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 중 실비아는 기사의 방식을 따라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맛집으로 모실 테니, 따라만 오시죠. 황녀님.”

말투까지 기사를 흉내 내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래요.”

내 손을 하나씩 나누어 잡은 두 소녀는 내 옆에 찰싹 붙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희만 아는 비밀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번에도 저희가 살 겁니다. 몸만 오시죠.”

여전히 기사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이다.

하지만 디저트를 얻어먹었으면 됐지, 나는 고등학생들에게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멋없는 어른은 아니었다.

“아뇨, 제가 살 테니. 안내만 해줘도 괜찮아요.”

하지만 실비아와 미렐은 너무 부담스러운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눈빛을 교환한 그녀들이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빠르게 말을 꺼냈다.

“제가 해준 만큼 다른 후배, 아니. 어린 영애들한테 베풀면 되죠.”

이 말은 우리 학과 금수저 선배님이 밥을 사주며 나와 동기들에게 늘 한 말이었다. 과탑에 교수님들한테까지 인기 많던 대학 시절 내 워너비.

선배, 저 지금도 후배들한테 베풀고 있습니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실비아는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대답했고 미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내 말에 꽤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얼른 가요!”

실비아와 미렐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나는 웃으며 그녀들을 따라 걸었다.

그때, 두 소녀의 손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둘의 손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실비아와 미렐은 바로 옆에서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미렐은 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었고 실비아는 응원하듯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니야, 얘들아 그런 거 아니야. 이런 거 안 해줘도 괜찮아.

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미렐과 실비아에 의해 강제로 내 손을 잡은 것 같았다.

나는 손을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뮤지컬에 같이 가지 못한 게, 신경이 쓰여. 저녁이라도 함께할까 해서 왔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실비아와 미렐을 돌아봤다. 그녀들과의 선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렐과 실비아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리쳤다.

“저희끼리 먹을게요!”

“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두 소녀는 내게 윙크하더니 붙잡을 틈도 없이 달려 나갔다.

아냐, 안 가도 돼 얘들아.

나는 어서 그녀들에게 해명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놓을 생각이 없는 듯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하는 수 없이 나는 바리다스와 함께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또 여기네.

레스토랑의 이름을 읽은 나는 가만히 자리에 멈춰섰다.

우리가 간 레스토랑은 지난번에 바리다스와 만난 곳.

아이들과 나에게 노동착취를 당하는 오렌지 타르트 장인 피터를 발굴해낸 곳.

바로 리슐레였다.

역시 원작에서도 맛집으로 유명한 장소답게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바리다스가 다가가 묻자 지배인이 놀라 대답했다.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대기 줄을 지나 레스토랑 가장 안쪽의 조용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의자에 앉아, 식당 지배인이 가져다주는 물을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저기, 바리다스 우리 레스토랑 말고 놀이공원 갈래요?

그 능력이면 놀이공원에 모든 놀이기구 하루 만에 다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식당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에피타이저로 나온 토마토 절임을 입 안에 넣었다.

순식간에 달콤함과 상큼함이 입 안에 퍼졌다.

와인 땡긴다.

잘 생각해보니, 술을 못 마신 지 꽤 되긴 했다.

당장 생각나는 마지막 음주가, 약혼식 날이었으니 거의 일 년 정도 금주를 한 것이었다.

나는 슬쩍 바리다스의 눈치를 봤다.

“저희 한 병만 마실래요?”

이번에는 주량 아니까, 안 취하고 적당히 마실게요.

나는 그런 의미를 담아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그러죠.”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와인 한 병 가져다주게.”

하지만 바리다스는 거기서 주문을 끝내지 않고 덧붙였다.

“가장 도수가 낮은 걸로.”

피오라의 주량을 생각하면 맞는 주문이었다.

맥주 세 잔.

하지만 나는 지구에서 소주 세 병도 거뜬했는데 지금 이 몸으로는 반병도 힘들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빙의시켜 줄 거면, 주량은 유지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높아도 괜찮은데.”

작게 중얼거린 말인데도 그에게 들린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주문을 받은 웨이터를 다시 불렀으니 말이다.

“너무 낮은 건 말고 적당한 걸로 가져다주게.”

바리다스의 말에 어린 웨이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적당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뭐든지 적당히라는 말이 가장 어렵긴 했다.

“적당히 추천하시는 걸로 가져다주세요.”

독할수록 좋고.

내가 한 마디를 덧붙이자, 웨이터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와인을 기다리며 두 번째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오물거렸다.

지난번에 왔을 땐 눈치 보여서 제대로 못 먹었는데.

여기 완전 맛집이네.

내가 한창 빵의 고소함에 빠져있던 그때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와 붉은 빛깔의 와인이 함께 서빙되었다.

딱 봐도 독해 보이는 술에 바리다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적당한 걸로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나에게는 독한 와인을 가져다준 웨이터가 고마울 뿐이었다.

속으로 불평한 것에 비해, 바리다스는 적당한 양의 와인을 따라 주었다.

적당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양을.

“고마워요.”

그에게서 잔을 받아 든 나는 작게 웃었다.

직접 따라 줄 줄은 몰랐는데.

주위의 귀족들도 쉽게 볼 수 없는 그의 와인 따르는 모습에 눈을 크게 떴고 말이다.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와인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하고 독한 포도 와인이 잘 구워진 스테이크와 어우러져 완벽한 술안주가 되고 있었다.

“맛있어.”

그치, 이게 술이지.

빙의한 뒤로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너무 순수하게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불만인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나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래도 오늘은 둘 다 했네.

귀여운 후배들이랑 수다 떨면서 뮤지컬도 보고, 친구는 아니지만 전보다 많이 친해진 약혼자랑 술도 마시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앞에 서 있는 바리다스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내 미소에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취했어요?”

“안 취했어요!”

내 외침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그때 무슨 실수를 했길래. 자꾸 저러는 건지.

민망함과 취기가 올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한 잔만 마셔요.”

“…네.”

이 맛있는 걸, 한 잔밖에 못 마시게 하다니.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그래도 한 잔이 어디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잔뿐인 와인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더 마시고 싶긴 했으나, 또 취해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서빙되었다.

초콜릿이네.

디저트는 한입에 넣기 딱 좋은 사이즈의 초콜릿이었다.

포크로 초콜릿을 찍자, 안에서 시럽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다.

쇼콜라 봉봉 같은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초콜릿 세 개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녹아내림과 동시에 쓰디쓴 맛이 느껴졌다.

“피오라?”

눈앞에 있는 바리다스의 형체가 흔들렸고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너무 졸려.

* * *

“피오라, 괜찮아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없는 피오라를 보고 바리다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그는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을 살펴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 안에 위스키가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오라의 쇼콜라 봉봉 이후로 귀족들은 과일이나 생크림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을 초콜릿 안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이 바로 위스키를 넣은 초콜릿이었다.

그것은 위스키 봉봉이라 불리며 꽤나 많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배인은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바리다스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특별히 준비한 건데….

“다시는 술이 들어간 음식을 내오지 말도록.”

단호하게 말한 바리다스는 피오라를 안고 레스토랑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지배인은 울상을 지었다.

아니, 하나 먹고 눈치 못 챈 사람 잘못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절규는 마음속에서만 울려 퍼질 뿐, 입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바리다스는 제 무릎을 베고 잠든 피오라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 잔이면 안 취할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거기서 술을 더 마실 줄이야.

술을 마시는 건 상관없었다. 원한다면 와인 농장까지 사줄 의향이 있었다. 다만 오늘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며,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항상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도, 자신의 이야기도. 그 사실이 고맙다가도 한 번씩은 신경이 쓰였다.

“다음에는 당신 얘기를 해 줘요.”

싫어하는 건 뭐고, 좋아하는 건 뭔지, 어떤 취미가 있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엇이든 괜찮으니까. 

나는 당신을 더 알고 싶어.

바리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오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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