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악녀에게도 친구는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로나를 불렀다.
“로나, 물.”
그녀는 바로 물을 가져왔고 차가운 물을 마시니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필름이 끊긴 게 아니라 그냥 잠든 것 같은데.
초콜릿을 먹은 이후의 기억이 아예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추태를 보일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
이걸로 술에 취해서 그의 앞에서 잠든 건 두 번째였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민망하다는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쉰 나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숙취 때문에 따뜻한 것이 먹고 싶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사과를 하든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든, 생각해보자.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간 나는 방에서 나오던 바리다스와 딱 마주쳤다.
…이렇게 빨리 마주친다는 말은 없었잖아.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바리다스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내 생각대로 바로 잠든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괜….”
나는 그대로 입을 틀어막고 쿨럭였다. 머리가 빙빙 울리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대답은 곧 ‘안 괜찮아’가 되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이미 내 상황을 파악한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음주는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은 죄가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바리다스는 손을 뻗어 내 목을 살짝 건들었고 그러자 시원한 기운과 함께 목이 한결 편안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말을 할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바리다스의 눈치를 보니,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거라면 함께 가죠.”
“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바리다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따뜻한 스프만 준비해주세요.”
지금 느끼한 고기나 음식 냄새를 맡으면 정말로 참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바리다스도 읽은 것인지 그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음식들을 부탁했다.
“간단한 샐러드와 빵이면 충분하네.”
당신, 진짜 눈치 최고야.
속으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나는 거의 바로 나온 수프를 입안에 넣었다.
고소하고 따뜻했다.
적당히 따뜻한 수프 덕분에 속은 풀어졌지만 몇 숟가락 먹자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춧가루 마렵다.
지구의 얼큰한 해장 음식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의 느끼한 음식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한국인인 모양이었다.
김치찌개에 밥 말아 먹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수프를 깨끗하게 비웠다. 확실히 속을 채우고 나니, 아까보다 훨씬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저트로 나온 꿀물까지 다 마신 뒤, 나는 바리다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저녁, 일레든 백작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일레든 백작이… 동부에서 가장 큰 상단의 주인이었지?
미렐과 실비아에게 그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미렐과 실비아도 참석한다고 했던가, 거기까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알겠어요.”
내 대답에 그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안 웃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있어도 위험한데. 웃으면 더 위험하다고.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바리다스는 나를 방으로 데려다준 뒤 돌아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혼식이라……. 봄이면 결혼 많이들 하지.
나와 바리다스의 결혼식도 이제 한 달쯤 남아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수도로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일단 잠부터 더 자고.
나는 고민 없이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때 내 품 안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데자뷰가 느껴졌고 이불을 들추자 환하게 웃고 있는 자스민이 눈에 들어왔다.
“형수님!”
요즘 들어 발음이 한창 좋아진 그녀는 본인도 그 사실을 느끼는 것인지 말이 많아졌다.
“나 이거 읽어줘!”
동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많이 피곤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가 건넨 동화책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지 못했다. 아이들이 착해서 내게 서운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시무룩한 얼굴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피곤해도 조금만 참지 뭐.
나는 천천히 동화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그렇게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나가 문을 열었고, 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인사를 한 뒤 자스민과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스민, 형수님 쉬시는데 방해하면 안 된다니까.”
그녀의 말에 자스민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렸다.
“괜찮아.”
오늘 결혼식 이후로는 일정이 거의 없었기에 그때 쉬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에도 렌은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쉬세요. 요즘 바쁘셨잖아요.”
푹 쉬라고 여러 번 강조한 뒤, 렌은 자스민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배려해준 렌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잔 걸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지개를 켰다.
아까 일어났을 때보다 머리가 맑고 개운했다.
렌 최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를 봤다.
시간은 이제 막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준비하면 딱 맞겠네.
“로나, 레나. 일레든 백작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니, 준비해줘.”
그렇게 둘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던 도중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는 결혼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지?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은 처음 참석해 보는 것이었다.
지구랑 별 차이 없으려나.
내 약혼식을 떠올리니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실비아와 미렐도 참가하면 좋을 텐데.
“다 됐어요.”
멍하니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푸른 빛깔의 우아하고 심플한 드레스는 성숙해 보였고 풍성하고 기다란 머리는 깔끔하게 묶여있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거울을 보고 있던 그때, 딱 맞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생했어.”
내 말에 레나와 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래로 내려가자, 커다란 마차 앞에 바리다스가 서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타자,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레든 백작의 거처는 숲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리고 공작님.”
일레든 백작은 생각보다 훤칠한 미남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그에게 축하 인사를 한 뒤, 나와 바리다스는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미렐과 실비아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각자의 가족과 함께 참석한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신관복을 입은 한 남자가 가운데에 서 있었고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했다.
그들은 신관의 앞에서 예물을 주고받은 뒤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관이 그들의 이마에 손을 올린 뒤, 축복을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이 헤리피아 여신의 축복 아래 행복하게 살아가길.”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리피아는 그냥 봄의 여신 아니었나?
하지만 내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신부가 던진 부케가 하필이면 내 쪽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딱히 부케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슬쩍 부케를 피했고 그것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영애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게 축복 속에 결혼식이 끝이 났고,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바리다스는 딱히 참석할 의사가 없어 보였으나, 일레든 백작의 부탁에 잠깐 있다가 돌아갈 것으로 보였다.
피로연이 진행 중인 연회장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나와 바리다스 주변에 순식간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우리에게 인사했고 인사만 받았을 뿐인데, 모든 기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돌아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미렐과 실비아가 내게 달려왔다.
귀여운 그들의 모습에 다시 기운이 나는 듯했으나.
그들을 뒤따라오는 마리를 보자마자,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실비아와 미렐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한 반면, 마리는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당당한 적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반갑습니다, 황녀님.”
눈빛에 비해 우아한 목소리였다.
근데, 얘야. 대체 왜 너만 없었으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니? 내가 없어도 너는 안 돼.
아니, 세상 여자가 다 사라지고 너만 남아도 안 될걸?
대체 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거니.
“반가워요, 영애들.”
그녀들의 인사에 대답해주는 그 순간까지도 마리는 나를 노려봤고 이제는 그냥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인사를 한 뒤, 그들은 바리다스에게도 차례로 인사했다.
“영애들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라고 말하며, 바리다스는 답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순간적으로 불안해진 나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사랑의 빠진 소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망했네.
하지만 다행히도 마리는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정이 적절할 것이었다. 미렐과 실비아에게 붙잡혀 다른 영애에게도 인사를 하러 다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나를 노려보는 것인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대로 가면 진짜 큰일 나겠는데?
나는 다른 악녀의 질투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바리다스의 웃음이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바리다스, 웃지 마요.”
내 말에 그는 진짜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그야 네가 웃기만 해도 여자가 꼬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다시 미소 짓고 있는 그와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나 포함, 여자가 꼬이니까.
내가 악녀가 되거나, 다른 악녀한테 시달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웃지 마.
“그냥 오늘만 웃지 말아 봐요.”
하지만 바리다스는 내 말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말 진짜 안 듣네. 자꾸 그런 식이면 나도 악녀가 될 수 있어?
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나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진짜로, 웃지 마요.”
입을 가렸더니 이번에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당신 앞에만 있으면 웃음이 나오는걸.”
바리다스의 말에, 순간적으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저 대사를 알고 있었다.
저건 중반쯤에, 바리다스가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이었다.
근데, 이걸 내가 왜 기억하고 있느냐. 댓글 때문이었다.
‘당신 앞에만 있으면 웃음이 나오는 걸, 드르륵 탁.’
이런 식으로 그의 대사를 한국인 특유의 주접과 함께 계속 반복해서 쓴 댓글이었는데, 거의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그 대사를 왜 나한테 하냐고!
당신, 자꾸 그런 식이면 나도 마리가 되는 거야. 감당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