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72)화 (72/207)

72. 악녀에게도 친구는 있다

“…그럼 우리 멀어져요!”

나는 마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작게 소리친 나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 지금 설렌 거 맞지? 그치?

바리다스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벽에 기대어 얼굴을 식히며 생각했다.

이게 남주야? 

순간적으로 넘어갈 뻔했어. 마리 꼬시지 말라니까, 왜 나까지 꼬시는데?

나는 진정하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샴페인을 집어 한 모금 들이마셨다.

차가운 것을 마시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진정이 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내 눈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귀족 영애들이 보였다.

바리다스는 뭐, 알아서 하고 있을 거고. 이제 나도 귀족들 중에 아는 사람이 꽤 있으니까, 대화에 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얼마 못 가 멈춰서고 말았다.

“황녀님, 저에게 황녀님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한 영식이 나에게 춤을 청해왔기 때문이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나는 미소 지으며 그를 거절했다.

“황녀님 저는 어떠십니까?”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다른 영식들이 춤을 청해왔다. 나는 모두 거절했지만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쏟아지는 요청에, 결국 나는 영식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때, 미렐이 영식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왔다.

“황녀님, 공작님께서 찾으세요.”

그녀의 말에 내 앞을 막고 있던 영식들은 모두 비켜섰고 미렐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곧장 연회장을 나와 휴게실로 도망쳤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가장 큰 소파에 걸터앉은 미렐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공작님 가지고 거짓말 한 건, 비밀로 해주세요.”

그녀의 귀여운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이죠.”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미렐은 주위를 계속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내 질문에 미렐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비아가 분명, 마리랑 같이 휴게실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마리라는 이름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바리다스도 지금 혼자 있을 텐데.

나와 미렐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아보죠.”

내 말에 미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람도 많고 규모까지 큰 연회장에서 실비아와 마리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귀족들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니, 마리 얘가 벌써 뭔 짓 한 거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서 바리다스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보다 앞가림 잘하면 잘했지, 못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마리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여기서 바리다스한테 꼬리치다가 잘못 걸려서 소문이 나면 막히는 건 나와 바리다스의 결혼이 아니라, 마리의 혼삿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한숨을 내쉰 그 순간 미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

미렐이 실비아를 찾은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자, 실비아가 한 영식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나는 빠르게 실비아에게 달려갔다.

“마리는 어디에 있니?”

내 말에 실비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얘 어디 갔어요?”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실비아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친구 때문에 미렐이 피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실비아와 함께 있던 영식이 입을 열며 손가락을 들었다.

“로즈 영애라면, 저쪽 테라스로 가시던데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자 커튼이 처져있는 테라스의 입구가 보였다.

나와 미렐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테라스로 향했다. 

그런데, 이거 함부로 열어도 되나?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미렐은 거침없이 커튼을 걷었다.

커튼이 걷어지고 마리의 손목을 잡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바리다스의 외침과 동시에, 강한 향이 느껴졌다.

그것을 맡은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미약이잖아.

사고를 칠 건 알았지만 미약까지 쓰다니, 저 정도 집착이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마리야… 마나를 다루는 사람한테 미약이 통하겠니.

미약이 뭐야, 코끼리도 죽이는 독을 물처럼 마셔도 살아 저 사람은.

바리다스가 마리의 손목을 잡고 있는 것도 최소한의 터치로 마리를 말리려고 하는 거지, 다른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 있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마리는 씨익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나는 어이를 잃고 말았다.

이성 말고 어이 말이다.

그 아가야. 나 공작이랑 이런 사이니까, 어서 오해해! 라고 말하는 거 같은 표정은 뭔데?

같잖아서, 화도 나지 않았다.

200N년 시절 인소도 아니고 이런 걸 믿는 건 너무 어리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바리다스의 손은 마리에게서 떨어진 지 오래였고 그녀는 이미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오해를 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리다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소곤거렸다.

“소라게.”

그 말에 숨은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마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즈 영애,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마리의 눈이 커졌다.

내 약혼자가 이럴 리 없어, 라면서 오해하는 건 여자 주인공이나 하는 짓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로즈의 손목을 붙잡았다.

“봐주는 건, 한 번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바리다스의 애인이었다면 매우 화가 났겠지만, 나는 그랑 비즈니스지 사귀는 게 아닌걸.

다만 약혼녀가 있는 남자한테 당당히 대쉬하는 마리의 저 나쁜 버릇은 고쳐주고 싶었다.

나무를 열 번 찍으면 나무 주인한테 혼이 나야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마리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 죄… 죄송…….”

이제는 몸까지 덜덜 떨며 마리가 입을 열었고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놔 주었다.

겁은 충분히 준 거 같으니까, 이제 적당히 뭐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사과로 끝날 일이면, 법이 왜 있고 판사가 왜 있어.”

다시는 못깝칠 만큼, 적당히.

“남의 약혼자를 건드렸으면 법정에 갈 각오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역시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한 마리의 두 눈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말이 있지.

인생은 실전이란다, 아가야.

“저, 제… 제가…….”

잘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의 마리도 딱 이런 역할이었다. 멍청하고 매력 없는 진부한 악역.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이상 그렇게 생각 안 하기로 해 놓고 뭐 하는 거야. 원작 말고, 내가 보고 느낀 마리를 그대로 평가해 보자.

미렐을 고생시키고 미약으로 바리다스를 꼬시려 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말라니까 피해도 주고.

……나쁜 생각밖에 안 나는데.

내가 보고 느낀 마리도 멍청하고 매력 없는 진부한 악역인데? 소설이 캐릭터 묘사 완전 정확하게 했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옆을 돌아보자, 미렐이 두 눈을 미친 듯이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진짜 실례고 무례한 행동인 거 알아요. 근데 제 얘기 한 번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건 진짜 실례고 무례인데다가, 선까지 넘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거 좋아.

친구의 잘못을 나서서 변호해 주는 거만큼, 강한 우정이 어디 있어.

미렐, 넌 내가 아껴서 다행인 줄 알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마리가 멍청하고 바보 같고 사랑 때문에 미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나쁜 애는 맞거든요?”

아니, 미렐 그건 욕이잖아.

마리한테 쉴드를 쳐 주는 게 아니라 팩트로 내려쳐버리는데?

“그래도 되게 좋은 친구예요.”

미렐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를 위해 나선 건 좋은 행동이다, 다만 지금 미렐이 한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이건 둘의 우정에 기특해서 넘어가 주는 것이 아니라면 못 봐줄 지경의 변호였다.

그래서 난 봐주려고 한다.

난 이런 우정, 매우 좋아해.

“너 그거 되게 나쁜 생각이야, 너한테는 되게 좋은 친구가 남한테는 엄청 나쁜 사람일 수 있어.”

그래도 일단 혼낼 건 다 혼내고.

“그리고 어른이 말씀하실 때,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야.”

나는 마리와 미렐에게 번갈아 가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리는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혼을 냈다.

그렇게 내 잔소리에 둘의 영혼이 반쯤 나갔을 때쯤.

나는 둘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딱!

맑은 소리가 퍼졌고 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딱밤을 때린 것이었다.

나는 두 소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걸로 봐줄게.”

근데 마리 넌 한 대 더 맞아.

그렇게 마리의 비명과 함께 다시 한번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마리와 미렐의 사과와 함께 내 잔소리도 끝이 났다.

“부모님이 기다리시겠다, 둘 다 이제 돌아가 봐.”

그들은 나와 바리다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뒤,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미안해, 미렐.”

“알면 앞으로 그러지 마.”

미렐은 쌀쌀맞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마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응… 고마워.”

테라스 너머로 멀어지는 그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의도치 않게 둘의 대화를 들어 버렸지만, 잘 풀렸으면 된 거지 뭐.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바리다스였다.

그런데 왜 안 부르고 내 어깨를…….

아 맞다.

“소라게 끝.”

미렐과 마리를 혼내느라, 바리다스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도 그 사실을 느낀 것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피오라. 날 까먹은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사실 까먹었다.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봅니까?”

물어볼 게 뭐가 있어.

마리가 저럴 거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정황상 당신이 피해자니까.”

단호한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제가 영애의 손목을 잡고 있었는데도요?”

말을 끝마친 그는 바로 내 손목을 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오해하길 바라는 거야 뭐야.

바리다스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가 그를 왜 믿었는지 행동으로 보여주자 결정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나는 양 팔로 난간을 잡아 그를 내 품 안에 가뒀다.

“제가 이러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요?”

나는 내가 이렇게 하면 그가 마리에게 한 것처럼 손목을 잡고 벗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만히 있지 않을까요.”

“아니, 반항해야죠.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말아요. 몰라요?”

“되고, 좋고, 해도 되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요?”

…이 정도면 미약이 통한 거 아니야?

이번에는 바리다스가 내 쪽으로 얼굴을 숙였다.

“당신이라면 전부 다 괜찮을 거 같은데.”

그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미약에 취한 것이 분명했다.

이건, 미약이다. 미약 때문이다. 미약 때문이어야 해.

바리다스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의 행동에 내가 설레는 것도.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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