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썸의 정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내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얘 아까부터 나 왜 이렇게 꼬셔?
“진짜 더 하는 수가 있어요?”
나도 미약에 취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에 그는 나는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야 좋죠.”
아, 자꾸 웃지 말라고!
저 얼굴을 더 봤다간, 난 정말로 이성을 잃고 더 해버릴 것 같아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런 내 모습에 바리다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마리는 대체 얼마나 강한 미약을 쓴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손을 잡았다.
“일단, 나가죠.”
테라스에 아직도 미약의 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의 행동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약에 심하게 취한 거 같은데, 그나마 덜 취한 내가 챙겨야지.
바리다스 저 이거 빚 갚는 거예요.
나는 과거 술에 취한 나를 두 번씩이나 챙겨준 바리다스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연회장에서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귀족들이 한 명씩 짝을 이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춤, 추시겠습니까?”
이제 정신을 차린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손을 잡았다.
그는 능숙하게 나를 리드했고 템포가 빠른 곡은 아니었기에, 나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연주가 극에 달하자 곡의 템포는 급격하게 빨라졌고 나는 결국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민망해진 나는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너무 오랜만이라.”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또다시 그의 발을 밟았다.
“괜찮… 윽.”
심지어 이번에는 좀 세게.
두 번의 실수로 머쓱해진 나는 시선을 들어 바리다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 순간 몸이 붕 뜨며 양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이제야, 여길 보네요"
바리다스는 나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픈 척한 거였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팠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춤을 추죠.”
바리다스는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고 남은 한쪽 팔로 내 손을 잡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해 보지 않아도 이 자세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는지 알 수 있었기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다치지는 않았고요?”
의심한 것이 미안해 질문하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
다시 곡의 템포가 늦춰졌음에도 그는 나를 내려놓지 않았기에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느린 곡이면 충분히 출 수 있는데.
“안 힘들어요?”
내 질문에 그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내 옆으로 실비아가 지나갔다.
그녀는 아까 함께 있었던 영식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들은 조금 어색한 듯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썸이네요.”
그런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썸이 뭔가요?”
그러게,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귀기 전 단계? 서로 호감이 있을 때 하는 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남녀 관계에서 한 쪽이 호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이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 썸이라고 해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내 기준에서의 썸은 이런 것이었다.
인지하고 있으면서 가지고 놀거나 저런 상대가 여러 명이면 어장이고 한 명이면 썸이지.
내가 말한 썸의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바리다스는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그렇다면 저희는 썸인가요?”
“네?”
상상도 못 한 말에, 나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내 손은 그의 어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나를 받아들며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내가 당신한테 호감이 있으니까.”
…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바리다스는 나를 든 상태로 한 바퀴 빙 돌았다.
음악이 어느 순간, 블루스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약 때문 아닙니다.”
그럼 그냥 미쳤나?
“정상입니다.”
그럼 진짜로?
“네, 진짜로.”
“…혹시, 제가 입 밖으로 말했나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살짝 건들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표정에서 다 티가 나요.”
라고 말하는 바리다스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 얼굴을 좋아하는 것도, 아까부터 제가 미약에 취했다고 생각한 것도, 제가 이럴 때마다 설레는 것도.”
바리다스의 입술이 어느 순간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니, 이거 진짜로 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바리다스는 어느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허락은 받고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언제부터 그런 예의를 따졌다고.
어느새 노래가 끝났고 바리다스는 나를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의 신발 위에는 내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그의 말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참가한 연회였는데.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바리다스는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여기는 피로연입니다, 대부분 젊은 미혼 남녀가 참가하죠.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여기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원하신다면 더 있어도 됩니다.”
“아뇨, 돌아가죠.”
내가 바리다스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는 당연할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차에 타자마자 그 생각을 바꿨다.
어색해.
바리다스와 마차에 함께 탄 것만으로도 의식이 되어 숨이 막혔다.
나는 곁눈질로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자기가 먼저 좋다고 해 놓고 왜 나만 신경 쓰고 있는데?
무언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아뇨.”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갑자기 짜증이 올라와 나도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왜, 나만 더 신경 쓰는 것 같냐고.
그렇게 우리는 저택까지 가는 동안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 같이 뛰쳐나왔다.
잠옷 바람으로 뛰어와 우리를 반기는 모습에,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풀리는 듯했다.
너희는 정말 첫째 형 안 닮아서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게 안겨 오는 레몬과 자스민을 끌어안았다.
“왜 안 자고 있었어.”
“두 분한테 인사드리고 자려고요.”
렌의 대답이 기특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내 품에 안겨있던 레몬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리다스에게 손을 뻗더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 오늘 머리 넘겼네. 웬일이야?”
그러고 보니, 바리다스는 머리를 반쯤 넘기고 있었다.
레몬은 바리다스에게 가고 싶은 것처럼 그에게 팔을 쭉 뻗었고 나에게서 그녀를 받아 든 바리다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의 말에 레몬은 손을 뻗어 머리를 내려 버렸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람은 안 돼.”
“맞지, 바람은 아니야.”
바리다스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기에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형수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넘긴 거야?”
바리다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긍정했고 레몬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웃으며 다시 그의 머리를 위로 올려 주었다.
처음에 비해 엉망이긴 했으나, 그것도 그것대로 잘 어울렸다.
“근데 왜 잘 보이려고 해? 둘은 이미 약혼했잖아.”
그린의 질문에 바리다스는 반대 팔로 그를 안아 들며 말했다.
“몸은 이미 내 건데. 마음까지 가지고 싶어서.”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요!
일단은 약혼했으니까. 네 거가 맞기는 한데. 맞는 말이긴 한데! 애들 앞에서 할 얘긴 아니잖아!!
결국 나는 참다 참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아, 내가 당신 건가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아니, 바리다스 너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내가 소리쳤고 그런 우리의 모습에 레몬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내려 줘, 자러 갈래.”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레몬을 바닥에 내려 주었고 그녀는 나와 바리다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어.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랬어.”
부부 싸움 아니야, 아직은 부부 아니라고!
레몬은 나와 바리다스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들었다.
“화해 잘해, 오늘은 우리끼리 잘게.”
우리의 모습이 싸우는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싸우는 모습은 애들 정서에 안 좋은데.
하지만 내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자스민이 입을 열었다.
“웅, 둘이 꼭 화해한 다음에 손잡고 코 해.”
둘 다 못 해, 아니 안 해!
그렇게 레몬과 자스민이 가장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뒤이어 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꿈 꾸세요.”
렌은 나와 바리다스의 이마에 한 번씩 입 맞춘 뒤 라라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치를 보던 그린과 토마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니, 너희는 왜 또 그래.
마지막 남은 리리와 루이마저 그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아이들의 모습에 만족한 듯 보였다.
“제가 동생들은 참 잘 둔 것 같네요.”
나 여기 육 남매 다 미워. 너희 첫째 형 닮았어, 엄청 닮았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 어떻게, 손잡고 코 할까요?”
뻔뻔한 바리다스의 말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됐거든요?”
나는 그의 손을 무시한 채 내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나를 붙잡았다.
깜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잘 자요.”
그러더니 미련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모습에 조금 실망… 을 왜 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이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손으로 한 번 감싼 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