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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어린이집 (74)화 (74/207)

74. 고백

일레든 백작의 결혼식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바리다스와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반은 내가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은 바리다스가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저택에서 나오는 바리다스를 피해, 반대편 덤불 쪽으로 몸을 숨겼다.

갔나?

나는 지금쯤이면 그가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바리다스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있어요.”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무언가 짜증이 나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윽.

말에 가시가 있었다.

내가 그를 피해 다닌 것을 찔리게 만들려는 것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집요하게 나를 쫓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네, 요즘 많이 바쁘셨나 봐요.”

내가 피한 게 아니라 너가 바빴던 거야, 너가 바빴던 거라고.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딱히.”

하지만, 여기서 피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우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내가 피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아뇨, 바빴어요.”

그런 내 말에 바리다스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제가 바빴던 걸로 하죠.”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났다.

왜 내가 진 거 같지. 그리고 내가 왜 너를 피했는데, 너 때문이잖아.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신경 쓰고 있지 지금?

“네, 바쁘신 분의 시간을 뺐을 수는 없으니 먼저 들어가 볼게요.”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리다스는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당신 없는 곳으로요.”

내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내 팔을 놓아 주었다.

“봐, 나한테서 도망친 거 맞잖아요.”

“…….”

할 말이 없었다.

제 발 저린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내 시선을 쫓았다.

그러기를 몇 분, 바리다스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것인지, 그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그와 내 시선이 마주쳤고 그는 만족한 듯 손을 뗐다.

“얼굴에 저 좋아한다고 쓰여있는데, 왜 자꾸 피해요.”

근거 있는 당당함이었다.

그래, 확실히 이럴 때마다 설레긴 했다. 아니, 솔직히 저 얼굴로 저렇게 들이대는데 안 넘어갈 여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리다스는 본인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그런 식이면 저 집착 할 거예요. 다른 사람이랑 말도 못 섞게, 하루 종일 붙어 다닐 거예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네요.”

그의 숨결이 닿은 귓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리다스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 *

무작정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정원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뒤였다.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뛰느라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동시에, 귓불에 닿았던 바리다스의 숨결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네요.”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거야 정말!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양손으로 붉어진 뺨을 감쌌다.

그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레리아의 운명을 빼앗은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리다스와 결혼해도 그의 마음은 레리아에게 향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체 왜 나한테.

나는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느끼는 행복과 분에 넘치는 사랑이 원래는 모두 레리아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네 남매 중 장녀였던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돌봐왔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적성에도 맞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

다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양보하기 시작했던 것은.

항상 그런 소리를 들어왔다.

착하다, 배려심 넘친다. 그리고 호구 같다.

인정한다, 나는 호구가 맞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피해 보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그건 사실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았다. 나보다 다른 사람부터 생각하는 것에 말이다.

바리다스의 약혼을 계속 이어가자 생각한 것도, 그의 마음은 어차피 레리아에게 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콩을 볶든 뭘 하든 신경 안 쓰고 공작부인 작위에 만족하며 지내면 되니까.

근데 이렇게 되면, 내가 그녀의 것을 전부 빼앗은 것 같잖아.

참으로 멍청한 죄책감이었다.

내가 이런 죄책감을 가진다 해도 바리다스의 마음을 레리아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와 결혼을 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망설이고만 있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는 그냥 아이들이 좋았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고 나는 그들을 챙겨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이 세계에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곳이 책이나 글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정했다.

스쳐 가는 사람 한 명 한 명한테, 그들의 삶이 있는 또 다른 세계 말이다.

심호흡을 한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일어나지 않은 일에 신경 쓰지 말자. 다른 사람보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야. 오직 내 행복만을, 내 마음만을 생각해 보자. 

난 어떻게 하고 싶지?

바리다스를 떠올리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가 좋았다.

바리다스가 레리아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기적이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책감이 사라지고 빈자리를 여러 가지 감정이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그것들 중 가장 큰 감정은 사랑일 것이었다.

나는 저택으로 달려갔다. 바리다스가 보고 싶었다. 어서 이 감정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저택으로 들어온 나는 바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자, 덜컹 소리와 함께 크림슨이 안쪽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내가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눈을 크게 떴다가 곧이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때문에, 무언가 진 기분이 들었다.

그냥 돌아갈까.

어차피 좋아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다스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갈 기회도 주지 않고 내 손을 붙잡은 그는 나를 방 안으로 끌고 가며 입을 열었다.

“나가 있어, 크림슨.”

그의 말에 크림슨은 생각했다.

오후 내로 서류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오랜만에 온 바리다스의 집무실에서는 예전부터 나는 박하 향뿐만 아니라 커피 향도 함께 느껴졌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가슴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 같았다.

내 것으로 그를 채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맞은편에 앉은 그는 준비되어 있던 차를 따라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도망칠 땐 무슨 짓을 해도 안 잡혀 주더니. 포기하고 일을 좀 하려 하니, 제 발로 걸어오시는군요.”

이런 의미로 이기적이고 싶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내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그는 내게 차를 건넸다.

그가 즐겨 마시는 민트향 차였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죠?”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다 알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그가 얄밉다고 생각하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바리다스에게 고백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은 이 상황에서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라고 할 텐데.

나는 그와 이미 약혼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사귀어 주세요는 조금 많이 이상하잖아.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서류상의 약혼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나한테 주세요.”

그 말에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이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얼굴은 분명 엄청나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었다.

주먹을 강하게 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질투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애정을 달라고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의 마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싶어요.”

서류상의 약혼자가 아닌, 마음을 나눈 연인으로서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민망함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좋아하고 있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마음을 채우고 있던 커다란 응어리가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솜사탕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하고 부드럽고, 달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고 답답해진 나는 손을 떼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리다스의 얼굴도 나 못지않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내 시선이 마주쳤고 이번에는 바리다스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말로 들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요.”

그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저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바리다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내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이에 테이블 하나를 두고 있던, 그와 내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고 나는 눈치껏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살짝 눈을 떴다.

그러자 입술이 바로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춰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리다스가 한 말이 떠올라,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도 괜찮아요.”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와 내 입술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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