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악역은 납치당했을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강하게 묶여있던 밧줄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옅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바라봤다.
직접 써 보니까, 더 신기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이렇게 앉아 있었던 건지, 허리가 아팠다.
굳은 몸을 한 번 풀어준 뒤, 나는 문으로 다가갔다.
나무로 만든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손쉽게 열렸다. 다행히도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었다.
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둘러보자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방에 갇혀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동굴이었다.
사방이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 이끼가 껴 있거나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가는 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나는 들키지 않고 최소한의 마법을 사용해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쯤이면 아마 공작가에도 렌과 자스민이 사라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무얼 하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위치를 알리는 것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 동굴이 공작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길 바라며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렌과 자스민이 무사하길.
하지만 동굴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크기가 컸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몸을 숨겼다.
“어떻게 하실 거래?”
그들은 어느덧, 내가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숨을 죽였다.
빨리 지나가라, 제발.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는 돌려주고 아이들은 죽이겠지, 아직 어리던데 안쓰럽게 됐어.”
쿵.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구하러 가고 싶었다.
강하게 주먹을 쥔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의 대화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쩌겠어, 오라비를 잘못 둔 탓이지.”
그 뒤로 그들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것 같았으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렸을 뿐, 작아진 목소리는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낮게 숨을 내뱉었다.
오빠라면, 토마일 리 없으니 바리다스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대체 왜? 그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속이 울렁거렸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심호흡을 하며 이를 간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나가는 것이 우선이야.
지금 여기서 내가 고민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어서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치고 말았다.
숨을 고르며 벽에 기대앉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한참을 돌아다녀도 출구는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출구를 알려 달라고 할까.
나는 반지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차라리 마법을 써서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출구를 알려 줘.’
내가 그렇게 소망하자, 이번에는 반지에서 작은 빛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내가 온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반대로 오고 있었나.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빛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빛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나를 이끌어 주었고 빛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몇십 명의 도적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는 아까 나에게 빵을 가져다주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손짓했다.
“다치지 않게, 모셔라.”
그들이 나를 다시 묶기 위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반항해 봤자, 다치는 건 나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나를 포위하는 도적들을 피해 나는 벽에 달라붙었다.
자스민과 렌이 동굴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불을 지를 수도, 부숴 버릴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달려드는 도적들을 피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재워 줘!”
“뭔 개….”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콰당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도 뒤이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빛이 사라진 방향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세 번, 그가 말한 횟수는 이걸로 모두 사용했다.
두 번은 그렇게 마나 소모가 크지 않았을 테지만, 도적들을 재워버린 마법은… 딱 봐도 엄청난 마나를 소모했을 것이 분명했다.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에 나는 구조 요청을 할 마나가 남아 있길 바라며 복도를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빛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방향이 맞았구나,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 순간 빛은 벽을 넘어가 사라져 버렸다.
어?
나는 빛이 사라진 벽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빛이 지나간 벽은 아무리 봐도 출구가 아니라 그냥 벽이었다.
빛 하나 들어올 틈 없는 돌로 만들어진 벽.
여길 어떻게 지나가라는 거야.
부숴야 하나?
나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구조 요청을 못 할 수도 있잖아.
아니, 애초에 마나가 그만큼 남아있긴 할까?
내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순간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왔던 골목으로 다시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이 완전히 갈라졌고, 세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행히도 내가 숨어있는 복도가 아닌 다른 길로 향했고 그들이 골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모습을 드러냈다.
돌로 만들어진 문 너머로는 어두운 하늘과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숲이 보였다.
진짜, 출구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벽은 다시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히려 했고 그 모습에 나는 빠르게 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바깥까지 한 발자국쯤 남은 그 순간,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마!!!”
자스민의 목소리였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나는 그대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자스민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지워진 뒤였다.
* * *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크림슨의 말에 커다란 소리와 함께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책상을 내려친 주먹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어디서.”
목소리에서 바로 느껴질 정도로 바리다스는 분노해 있었다.
“남쪽 숲 같습니다.”
이어진 말에 한 번 더 내려쳐진 책상은 완전히 반으로 갈라졌다.
그 모습에 크림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바리다스는 그와 오래 일해온 자신도 버티기 힘들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떨리는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시죠.”
크림슨의 말에 그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여기서 분노해 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분노를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남쪽이라면, 지난번에 도적들을 퇴치한 곳 근처였다.
생각보다 큰 규모긴 했으나, 대부분 죽었을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모두 죽여 버리지만, 그 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남쪽의 도적들을 퇴치하던 날, 델아트에 홍역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기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급하게 돌아오느라, 완전히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역시 전부 다 죽여 버렸어야 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전부 준비시켜.”
연루된 자들 전부 지난번에 죽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여 줄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이를 갈았다.
그렇게 둘이 함께 방 밖으로 나오자, 레몬과 그린이 울먹이며 그에게 달려왔다.
그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크림슨에게 먼저 가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그렇게 크림슨이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그린과 레몬을 안아 들었다.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은 레몬은 눈물을 쏟아내며 입을 열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은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랬었지.
“네 잘못이 아니야.”
다정한 목소리에 레몬은 더 크게 울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레몬의 모습에 그린도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목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두 아이는 바리다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고 양팔로 그들의 등을 토닥여 주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함께 돌아올 테니까, 울지 마렴.”
그의 말에 둘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친 두 아이를 품 안에서 내려놓으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다녀와도 될까?”
그의 말에 레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리다스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린이었다.
그는 붉게 물든 눈가를 비비더니,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바리다스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리다스도 잘 알고 있었다.
“형님도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요, 약속이에요.”
어느새 다가온 레몬도 손을 내밀었다.
“조시매서, 꼭 가치 도라와.”
목 놓아 운 탓에, 레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바리다스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이들의 작은 손과 그의 손이 닿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아이들은 중얼거렸다.
“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맞닿은 손이 떨어졌고 바리다스는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약속할게.”
그렇게 아이들을 등진 바리다스의 눈빛은 바로 돌변해 분노로 짙게 가라앉았다.
바로 연무장으로 향한 그는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남쪽 숲에서 내 동생들과 약혼녀가 사라졌다. 이 일에 연관된 자는 모두 죽여 버리고, 숲을 전부 뒤져서라도.”
바리다스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들은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가 기사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살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득, 피오라와 아이들을 떠올리며 작게 이를 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