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악역은 납치당했을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계속해서 들려오던 자스민의 비명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제발, 자스민. 죽지만 말아 줘.
그 순간,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반대편 복도에 몸을 숨겼다. 조심스럽게 내다보자 손발과 입이 묶인 채 한 남자의 등에 업혀있는 자스민이 보였다. 자스민을 업고 있는 남자는 다른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 안쪽으로 들어간 그 남자들이었다.
“얘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래?”
“나야 모르지, 일단 데려오래.”
다행이다, 바로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마나가 버텨주길 바라며 그들을 향해 반지를 겨눴다.
“흠, 주황 머리는 죽었으려나?”
뭐?
그의 말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성을 잃은 내가 뛰쳐나가려는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작은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검지를 입술 위에 대보였다. 그리고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나를 두고 남자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안 죽이면 안 돼요?”
소년의 말에 두 남자는 인상을 썼다.
자스민을 업고 있던 남자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작이 찾아올 때까지는 안 죽일….”
그의 말에 다른 남자가 그를 노려보며 허리를 찔렀다.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으응, 알았어. 다른 친구를 찾아볼래.”
남자가 자스민을 고쳐 업으며 대답했다. 남자들과 대화를 끝낸 소년은 다시 내가 숨어있는 벽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안심하라는 듯 내 손을 붙잡았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 덕분에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니까, 나 믿고 따라와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불을 켜더니 내게 들어오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누나도 지난번에 나를 도와줬으니까.”
내가? 언제?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니라 피오라가 도와준 건가.
아니, 피오라는 그럴 애가 아니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빵 사줬잖아요.”
아!
그제야 나는 소년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도적단에 들어온 것이 다행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멍하니 타오르는 횃불로 시선을 옮겼다.
렌은 어떻게 됐을까.
심장이 죄는 듯 아팠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지켰어야 하는데.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트, 빨리 나와 도망가야 해.”
그는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마찬가지로 돌처럼 굳어, 매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웃으며 그의 팔을 당겨왔다.
우리 셋 중에 당황하지 않은 것은 저 매트, 한 명뿐일 것이었다.
“형, 이분이 지난번에 나한테 빵을 준 분이야!”
매트의 말에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 그 천…사님이셨군요.”
그도 말하면서 부끄러운 것인지 더듬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천사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웅! 그 천사님이야.”
정말, 아이의 해맑음이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 앞의 서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봤다.
어차피 여기 있는 도적들은 나를 해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도적들을 불러 나를 데려갈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겠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했다.
내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갈색 머리 남자가 말했다.
“주황 머리 공녀님은 도망치셨습니다.”
하아, 낮게 탄식을 내뱉은 그를 올려다봤다.
저 남자의 말을 믿어도 될까.
“어떻게 알죠?”
“제가 내보냈으니까요.”
라고 말하며 그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황 빛깔을 띄는 기다란 머리카락, 렌의 것이었다.
그것의 일부에는 피가 묻어 있어,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슴의 피에요, 눈속임용입니다. 머리카락 정도라면 목숨값 치곤 싼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그가 렌을 구해줬다는 사실은 맞는 것 같았다.
그랬으니, 매트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이겠지.
지금으로써는 믿는 게 최선인가.
“감사해요.”
어떻게 됐든,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렌의 은인이었다.
내 인사에 볼을 붉힌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인간답게 했을 뿐입니다.”
도적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그는 정말 도망치려는 것인지 가방에 옷과 빵 등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물어본다면 왜 렌과 자스민을 죽이려고 했는지 알려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렌과 자스민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내 정체를 알고 건들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도적단이, 렌과 자스민을 죽이려고 한다?
차라리 죽이지 않고 끝까지 공작가를 벗겨 먹다가 돌려주는 편이 훨씬 더 이롭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했다.
“복수 때문입니다.”
역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누구한테요?”
“몇 달 전, 공작이 도적단에 대부분을 소탕했습니다, 그때 죽은 도적들의 대부분이 현재 남은 도적들의 가족이죠.”
그렇다면 나와 아이들을 납치하는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는 소리였다.
이런 사람들이 제일 무서웠다.
돈이 필요가 없으니 금품을 갈취하지도 않은 것이었고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데이먼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인간성이었나.
슬슬, 자스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희를 잡은 건?”
“순전히 우연일 겁니다.”
그는 도적단이 비가 오는 날이면 댐을 터트려 길이 막히게 한 뒤, 돌아오는 여행객들의 돈을 뜯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앞뒤가 들어맞았다.
운이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을 수 있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장이라는 사람은 렌을 죽인 뒤 그녀의 신체 일부를 경고 차원으로 보내 바리다스를 불러들여 눈앞에서 자스민을 죽일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갈색 머리 남자는 매트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을 뒤져 돈과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믿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대장에게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며 나는 귀걸이를 풀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도망칠 거라면, 돈이 필요하지 않나요?”
남자는 떨리는 시선으로 내가 내민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필요 없….”
“이거 비싸요.”
그의 말을 자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도둑맞거나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내 말에 그는 혀를 낮게 차고는 내게서 귀걸이를 빼앗아 갔다.
“제 이름은 러스트입니다. 데려다만 드리고 바로 도망칠 거에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러스트. 당신은 제가 만난 납치범 중 가장 착해요.”
내 말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내가 재운 사람들도 깨어났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고민하던 그때 러스트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방법이 있었지.
나는 그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쉽게 풀 수 있게 묶어 주세요.”
내 말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들은 것인지 더 이상으로 묻지는 않았다.
“공작이 금방 올 겁니다. 그냥 숨어 계시는 편이 나을 텐데요.”
그렇다면 더 가야 했다.
아무리 바리다스여도 바로 앞에서 꽂는 칼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
나는 바리다스가 준 반지를 내려다봤다. 반지의 달린 보석은 아직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마나가 아직 남아 있다고 내게 말하는 것처럼.
바리다스가 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재우고 자스민을 데려가는 거야.
티가 안 날 정도로 내 팔을 묶은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재갈도 물어야 해요.”
도적단은 내가 아까 도망치면서 마법을 썼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입을 열어야만 마법이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할 테니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것으로 안심 시킬 수 있었다.
러스트는 재갈을 가져와 내 입에 물렸다. 그렇게 나는 겉보기에 완벽한 인질이 되었다.
“매트,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의 말에 매트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스트와 매트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내가 재운 남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못 도망갔을 줄 알았다는 것처럼.
동굴의 문을 생각하면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아무리 바리다스여도 돌로 만든 입구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입 못 열게 잘 묶어놔.”
저렇게 말하는 걸로 보아하니, 내 예상대로 말을 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러스트와 함께 안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대장의 방입니다.”
러스트가 속삭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반대편 복도에서 한 남자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공작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 * *
조금 전.
바리다스와 기사들은 늦은 새벽까지도 계속해서 수색을 펼쳤고 그 결과, 부러진 마차와 죽은 기사들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비가 내려 모든 흔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수색이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것을 보며 그레이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동료들을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눈을 감겨주며 명복을 빌었다. 기사로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 명예로운 죽음은 없었다.
바리다스도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목숨을 바쳐, 그의 가족을 지켜주려고 한 자들이었다.
“시체를 옮기고 유족들에게 줄 보상금과, 장례식을 준비해.”
자식과 남편을 잃은 것이, 이 정도로 메꿔질 리는 없지만 바리다스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에서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 맹세했다.
그때 기사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남자 한 명의 시체를 끌고 오고 있었는데 덜덜 떨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피가 묻은 오렌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저, 자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바리다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머리카락을 받아들었다.
그럴 리 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렌의 머리카락이었다.
바리다스 온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숲에 있는 나무와 짐승들을 모두 베어서라도 렌의 시신을 찾아.”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바리다스와 기사들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은 사람들처럼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렌이 칠드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는 어깨까지 올 정도로 짧아져 있었다.
그제야 바리다스는 자신이 또 평정심을 잃은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 머리카락이었다. 다른 신체 부위가 아니라 머리카락. 충분히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부위 말이다.
렌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의 살기가 거둬지고 평정심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바리다스는 천천히 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고 바리다스는 렌을 끌어안았다.
“살아있어서, 다행이구나.”
바리다스의 말에 렌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지금은 울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렌은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멀리 보이는 작은 산을 가리켰다.
“어서 가야 해요, 형수님과 자스민이 위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