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악역은 납치당했을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빨리 가야해요.”
이대로라면 그 대장이라는 사람이 자스민을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이제는 인질인 척할 필요가 없어 나는 밧줄을 풀어버렸다.
어서 자스민을 찾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딱 봐도, 가장 좋아 보이는 방이었다.
우리는 고민 없이 문을 열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벌써 자스민을 데리고 도망친 것이었다.
“이 동굴의 출입구는 하나뿐입니다.”
지금 이 동굴의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마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며 생각했다.
‘자스민을 찾아 줘.’
다행히도 반지에서는 아까와 같은 작은 빛이 튀어나왔다.
나는 자스민이 무사하길 빌며 그 빛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러스트도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나 우리는 곧 갑작스러운 난관에 봉착했다.
이건 또 어떻게 가라는 소리야?
조금 전까지 앞을 향하던 빛이 바닥을 뚫고 아래로 향했다.
나는 허망하게 빛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 순간,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벽이 열리고 숨겨져 있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자, 러스트가 벽에 손을 짚고 있었다.
“갑시다.”
그가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고민 없이 열린 문 아래로 뻗어있는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한참을 내려가자 또다시 복도가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번에는 오른쪽 복도로 들어가고 있는 빛이 보였다.
우리는 벽에 붙어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복도를 들여다보았다. 자스민을 안고 있는 남자를 포함해 총 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인원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원을 모두 재우기에는 마나가 모자랄 것 같았다.
그래도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앞을 바라봤다.
‘저 사람들을 재워 줘.’
하지만 반지는 잠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자스민을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자스민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해.
그때 자스민을 업고 있는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반지와 단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발, 조금만 남아 있어 줘.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자스민을 향해 반지를 겨눴다.
‘자스민에게 묶인 밧줄을 풀어.’
그러자, 자스민에게 묶여 있던 밧줄이 조금 느슨해지며 그녀의 발에 걸렸다.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허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스민 찔러!!”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적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남자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은 자스민은 그의 어깨에 그대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으윽!”
남자는 신음을 내지르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내 쪽에 시선이 쏠린 탓에 도적들 중 누구도, 그가 쓰려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자스민은 반대편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러스트는 도적들에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던 도중 러스트가 헉헉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아래층은, 동그랗게 생겼습니다. 위층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요.”
“네?”
그렇다는 건, 바리다스가 오기 전까지 시간을 끌기 힘들다는 얘기잖아.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바로 뒤까지 쫓아온 도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앞쪽에서는 자스민이 피를 흘리는 남자에게 쫓기며 달려오고 있었다.
“저것들 잡아!”
그가 혼자인 것을 확인한 나와 러스트는 자스민을 붙잡고 상처 입은 남자를 지나쳐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좁은 동굴의 특성상,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포위당하고 말았다.
“황녀님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만 넘기시죠.”
그냥 넘겨 줄 거면 데리러 왔겠냐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자스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그 순간 위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 남자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멀어져가는 정신 사이, 마지막으로 빌었다.
제발, 자스민이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눈앞에서 울고 있는 자스민의 모습과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칼을 든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녀를 감싸기 위해 팔을 뻗었으나,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결국 내 팔은 자스민을 지키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자스민이 내 손을 잡았고 반지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강한 빛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자스민을 찌르려던 남자는 갑자기 뿜어져 나온 강한 빛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빛이 사라졌고 남자는 칼을 든 채 자스민을 바라봤다.
그 순간, 자스민의 주위에서부터 서서히 옅은 보라색의 마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
그녀들의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러스트를 포함한 모두가 그 자리에서 잠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바리다스와 기사들에게도 변하지 않았다.
동굴을 점령한 자스민의 마나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잠재우기 시작했다.
자장가를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동굴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렌과 칠드런을 포함한 모두가 잠들었고 이곳에 깨어있는 사람은 바리다스와 그레이 뿐이었다.
“자스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뜬 바리다스가 중얼거렸다.
지난번 신년제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가 자스민에게 선물한 초콜릿 마법이 기록된 마정석은 마탑의 제품이었는데 그건 그렇게 길게 유지되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그때 자스민이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흘려 넣은 것이라면.
바리다스는 주변을 물들이는 연보라빛의 마나 장벽을 바라보았다.
이 마법은 자스민의 것이 분명했다.
확실하다고 결론 내린 그는 그레이와 함께 마나의 흔적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나가 바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검을 뽑은 바리다스는 바닥을 내려쳤다.
콰앙!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이 부서졌고 숨겨져 있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갈수록 마나가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와 그레이조차 버티기 힘을 정도로 강한 마나였다.
그렇게 마나를 쫓아, 달리기를 한참.
바리다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쓰러진 도적들 사이에서 자스민을 꼬옥 끌어안은 채 잠든 피오라가 보였다.
바리다스는 무릎을 굽히고 손을 뻗어, 피오라와 자스민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고 그제야 안심한 그는 세상에서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바리다스의 몸은 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스민에게서 퍼져나가던 마나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바리다스는 두 사람을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처리를 부탁하마.”
그의 말에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리다스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실로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는 고개 숙여 피오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돌아가자.”
* * *
퍼억!
강한 타격음과 함께 남자의 턱이 돌아갔다.
자스민을 데리고 있던 남자였다.
그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더니 바리다스를 노려봤다.
“쳐 죽일 놈.”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가 피를 토하며 의자 채로 쓰러졌다.
“누가 보면 내가 악당인 줄 알겠어.”
저런 놈들을 보면 화가 났다.
저놈이 주도했다는 도적단은 황제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다. 시민들의 돈을 빼앗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어린아이까지 서슴지 않고 죽였다.
그랬기에 바리다스에게 토벌 명령이 내려졌고 그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고 그래서 죽였다.
하지만 그들은 저지른 죄가 있음에도 반성 따윈 없는지 당당한 모습이었다.
“너희가 내 아들을 죽인 악당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 그래. 잊을 뻔했네, 너희들은 언제나 그런 놈들이었지.
남들의 목숨은 아무렇지 않게 빼앗으며, 주위 사람은 누구보다 소중한 이기적인 새끼들.
빠악!
바리다스의 발이 남자의 복부를 강타했다.
“네 그 잘난 아들이, 지금까지 몇 명의 가족을 죽였는지나 생각해 보라고.”
남자는 완전히 기절했고 그 모습을 보며 낮게 혀를 찬 바리다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러니까. 건들 거면 나만 건드려야지. 왜, 내 가족까지 건들고 그래.
저런 놈들이, 자신의 자식한테는 좋은 아버지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을 안 하려 해도 할 수밖에 없잖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거기 갇혀서, 반성이라도 해 봐. 혹시 몰라, 죽을 만큼 반성하면 내가 사과라도 받아 줄지.
물론 용서해줄 생각은 없지만.
“살려만 놔.”
그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그를 질질 끌고 데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저런 놈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으득, 작게 이를 간 바리다스는 말에 올라탔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고 남은 놈들을 싹 다 죽여버렸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후환 따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졌다는 생각보다, 가족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또 그러지 말라고 하겠지.
피오라를 떠올리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건강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미쳐 버렸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깨어나 줘. 당신이 없으면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