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병문안
납치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 내 다리는 이제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외부에는 나와 아이들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차일드 공작이 도적단의 남은 잔당을 소탕했다.’ 정도의 기사만 신문에 실렸다.
잡힌 도적단의 대부분은 사형을 당했으며, 나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도움을 준 매트는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가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러스트는 감옥에 갇혔다. 아무리 우리를 도와줬다고 해도 그는 명백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매트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을 따라온 것이라 해도 러스트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자스민과 렌을 도와준 건 사실이었기에, 형량을 줄였고 출소한 뒤 적당한 돈과 매트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러스트를 떠올리면 조금 뒷맛이 썼다.
그의 범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스트는 동생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되었다면 도적단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도적이 되기로 선택했지만 렌을 구한 것도 나를 도와 자스민을 구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마찬가지로 그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선량함을 믿어 보려 한다.
러스트가 반성을 마치고 출소를 한 뒤에 그와 매트의 후원자가 되어 주고 싶었다.
아직은 조금 남은 미래의 이야기지만.
똑똑.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자, 로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아렌드 자작 영애와 웨일즈 남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로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응접실 안으로 실비아와 미렐이 함께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들어오는 실비아에 비해, 미렐은 아직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둘은 내 맞은편에 준비되어있는 자리에 앉았고 실비아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계단에서 넘어지셨다고 들었어요, 발목은 좀 괜찮으세요?”
신관들을 부를 때 바리다스는 내가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나는 납치가 아니라,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진 것이 되었다.
그것도 만만찮게 민망한 일이었지만 납치를 당했다는 말보다야 나았다. 나는 피해자인데도, 귀족 사회에서 그런 추문이 돌게 된다면 피해를 보는 것은 나와 공작가의 명예뿐이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사회였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두 영애는 잘 지냈나요?”
내 말에 미렐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눈치를 저리 보니, 내가 더 미안해졌다.
그래도 굳이 잘못을 찾으라 한다면, 음… 친구를 잘 못 사귄 죄?
“저희는 잘 지냈죠.”
“…잘 지냈어요.”
밝게 대답하는 실비아에 비해, 미렐은 아직도 기가 죽어 있었다.
아니, 화 안 났으니까 내가 병문안 온다는 걸 수락했지.
한숨을 내쉰 나는 미렐과 실비아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네요. 두 영애도 혼자 다니지 말고 조심하도록 해요.”
밤길, 빗길, 다 조심하고 호위랑 꼭 붙어 다녀.
지난번 공연을 봤을 때 미렐과 실비아 모두 귀찮다는 이유로 호위를 데려오지 않았기에 한 말이었다.
그런 내 말에 실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네, 저희도 계단을 내려갈 때 꼭 조심하도록 할게요.”
…아니, 계단 내려갈 때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맞는데, 내가 조심하라는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가만히 있자니 혼자 계단에서 넘어지고 호위 탓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레나가 차와 디저트들을 내왔다. 한눈에 봐도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의 자태에, 실비아와 미렐의 눈이 반짝였다.
“두 영애가 온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했어요.”
“와아, 감사해요!”
내 말에 실비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포크로 타르트를 잘라 입 안에 넣었고 그에 비해 미렐은 아직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미렐도 먹어요.”
나는 미렐에게 타르트 접시를 밀어주었고 그제야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은 나도 타르트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역시, 피터의 오렌지 타르트는 최고였다.
내가 속으로 피터를 칭찬하며 타르트 하나를 다 먹었을 때였다.
“에휴.”
실비아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밝던 실비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이제 곧… 방학이 끝나요.”
그녀의 말에 미렐도 입맛이 떨어진 것인지, 표정을 굳히고 먹던 타르트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너희 진짜 학생이었구나.
그래, 방학이 끝나는 건 언제나 슬픈 일이지.
“심지어 저희 졸업반이에요. 한 번에 졸업해야 하는데!!”
지구의 고등학교 삼 학년을 보는 것 같은 실비아의 절규에, 나는 생각했다.
갈 때, 꼭 가나슈 챙겨 줘야지. 재수하지 말고 힘내라! 미렐, 실비아.
“졸업은 해야 하는데, 기숙사도 가기 싫고 밤까지 남아서 보고서 쓰고 싶지도 않아요.”
이번에는 미렐이 입을 열었다.
와, 그건 진짜 끔찍하네. 기숙사에 야자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비아와 미렐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방학이 언제 끝나는데요?”
내 질문에 마리와 실비아는 울먹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일모레요….”
그들의 목소리에는 세상 모든 근심이 모두 담겨있었다.
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두 소녀의 모습에 나는 생각했다.
가나슈 두 배로 챙겨 줄게. 파이팅.
“고등, 아니 아카데미를 다니는 거죠?”
아카데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세계의 학교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 말에 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라이온 아카데미 의료반이고 미렐은 경영반이에요.”
라이온 아카데미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부지만 작은 국가 크기인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거기 입학시험도 되게 어렵지 않나?
그런데, 의료반과 경영반이라니. 미렐과 실비아 모두 대단하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한숨을 내쉰 미렐이 입을 열었다.
“진짜, 혹시라도 사촌분들이 의료반 간다고 하면 말리세요.”
“경영반도요. 진짜로.”
우리 학과 오지 마.
저 말은 진심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 번 대학교를 졸업했던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네, 파이팅.”
레몬청도 많이 챙겨 줄게, 가져가서 먹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둘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그때,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뵈었던 둘째 공자님도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요?”
“아뇨, 아직 삼 년 정도 남았어요.”
오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토마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으니까.
내 대답에 두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님을 닮아서 그런 것인지, 키가 크네요.”
둘이 닮았다는 말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번에는 미렐이 입을 열었다.
“저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미렐의 말에 전생의 내 동생들을 생각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여기 아이들이 판타지라 생각될 정도로 귀엽고 얌전한 거지, 현실 남동생이 어떻게 그래.
“실비아는 동생이 있다고 했고 미렐은 외동인가요?”
“아뇨, 저는 위로 오빠가 있어요.”
자신의 오빠를 떠올린 것인지 미렐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여기도 남매는 별 차이 없구나.
“나는 오빠가 더 부러운데.”
실비아의 말에 미렐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제발, 가져가 줘.”
실로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인지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오빠 잘생겼잖아, 왜?”
“그게 잘생긴 거면, 길가의 돌맹이도 꽃미남이야.”
미렐의 신랄한 평가에 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치, 저게 보통 남매지.
나는 다시 한번, 아이들이 남매치고 사이가 좋은 편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그때,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우리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고 내가 손짓하자, 로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토마와 자스민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미렐과 실비아를 본, 토마의 눈이 커졌다.
이 시간대에 토마는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손님이 온다고 딱히 전달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려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자스민은 알고 있지 않았나?
시선을 돌려 자스민을 바라보자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그래… 고작 네 살이 뭘 알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토마에게 알리지 않은 내 실수였다.
“…손님이 오신 줄 몰랐네요, 실례했습니다.”
“실례했습미다!”
인사를 한 토마와 자스민이 나가려는 순간, 미렐과 실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들과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토마와 자스민을 불러들였다.
내 부름에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자스민에 비해, 토마는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다면, 마시고 가렴.”
내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내 무릎 위에 걸터앉았고 토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끄덕였다.
로나가 빠르게, 아이들 몫의 컵과 의자를 가져왔다.
미렐과 실비아는 두 아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공자님과 공녀님은 올해로 몇 살인가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실비아였다.
그녀의 질문에 자스민은 손가락을 접으며 자신의 나이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살이에요!”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나와 실비아, 미렐은 동시에 웃음을 참았다.
“올해로 열 살이 되었습니다.”
해맑은 자스민에 비해 토마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토마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의젓하시네요.”
미렐의 칭찬에 토마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고 실비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무도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칭찬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번에는 토마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고 귀여운 그의 모습에 미렐과 실비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된 그들의 칭찬에 토마는 어쩔 줄 몰라 빨개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고 그 모습에 더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나중에 장가가면 데려가는 영애한테 세금 더 내게 하려구요.”
내 말에 토마의 얼굴은 더 붉어졌고 두 소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자스민이 내 무릎에서 내려가 토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 목을 끌어안았다.
“안 돼, 오빠는 나랑 결혼 하기러 했단 말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스민이 소리쳤고 나와 미렐 실비아는 웃음을 꾹 참으며 토마를 바라봤다.
자스민의 말에 토마의 얼굴은 진짜로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싫다고 하면 울려고 하는데 어떡해요.”
그의 귀여운 대답에 우리 셋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한 나는 손을 뻗어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그런 내 행동에 토마는 민망한 듯 눈을 피하며 자스민을 바라봤다.
“오빠니까요.”
그런 토마의 말에 미렐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들이 다 그런 건 아니랍니다. 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