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두 번째 축제
꽃등을 날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한 뒤 아홉 시 전까지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같이 꽃등을 띄운 연인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죠.”
의미심장한 말에,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절대 안 놔줄 거예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들어도 들어도 적응 안 돼.
그런 내 모습에 소리 내어 웃는 그가 얄미웠다.
다시 고개를 들어 바리다스를 올려다본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부디, 오래도록 놓지 말아 주시길.”
또 그에게 말려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작가님, 이거 설붕이에요. 설붕이라고! 얘 모쏠 설정이잖아요! 근데, 모쏠이 어떻게 플러팅을 이렇게 해!!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바리다스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얼 원하는 건지 알 수 있었지만 그가 오늘따라 얄미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잠깐만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다시 들어 손쉽게 내 손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떻게 하면 허락해 줄 건데요?”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 내 눈에 헤리피아 미인 대회 무대가 보였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는 손을 들어 간판을 가리켰다.
“저기서 일 등 하면요.”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바리다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도 놀렸으니까, 뭐.
이번에는 이겼다고 생각하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 등을 하면 소원도 들어줄게요.”
내 말에 바리다스가 반색했다.
“무르기 없습니다.”
엥. 아니, 진짜 나가려고?
그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무대 쪽으로 향했다.
“바리다스!”
당황한 내가 그를 불렀지만 바리다스는 이미 무대 뒤로 사라진 뒤였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나는 하는 수 없이 관중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찾던 내게 안내인이 다가와 빈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곰인형을 들고 있을 세틸 경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공중에서 튀어나왔다.
“경도 조금 쉬어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맡은 바를 다해야 합니다.”
완고한 말에 잠시 고민한 나는 그에게서 곰인형을 받아 들었다.
“그러면 이건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내 말에 세틸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근데, 이 곰인형도 바리다스가 따온 거잖아.
갑자기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생각해보니, 바리다스는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설정한 미남이었다.
아냐, 아무리 그여도 여장까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일 등을 해.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로 남성 참가자가 나온 것이었다.
이국적인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는 동양의 무희를 닮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떠올렸다.
헤리피아를 뽑는 이 대회는 말 그대로 미인 대회였다. 그리고 신에게는 성별이 없었다. 고로, 그냥 예쁘면 장땡인 대회라는 소리였다.
…일 등 되겠는데?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를 이길 수 있을 만한 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로즈와 레리아 말이다.
로즈는 미렐과 실비아와 같은 아카데미를 다니니 개학했을 테고, 그렇다면 레리아가 남았는데 그녀와 바리다스가 마주치는 건 별로 탐탁지 않았다.
나는 제발,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제야의 미인이 남아있길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역시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참가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했으나, 바리다스와 비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남성 참가자도 둘이나 더 나왔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엘시디어스였다.
실비아가 알았으면 당장이라도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왔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려다.
엘시디어스는 배우답게 노래와 연기를 선보였고 꽤 좋은 호응을 얻어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할만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바리다스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그는 흰 머리에 그것과 같은 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그가 바리다스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가면을 벗자, 평소의 그 붉은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와 똑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백발과 청안이 잘 어울렸다.
…내 색 줘야 하나?
인간적으로 너무 잘 어울리잖아.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가 아무리 잘생기고 예뻐도, 여긴 장기 점수가 있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바리다스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내 주위에서 미친 듯이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성 관객들이 난리가 난 것이었다.
그렇게 바리다스는 대회 최초로 참가자들 반 이상을 기권시키고 당당하게 우승했다.
여전히 나와 같은 머리카락과 눈 색을 한 채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저보다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제 색 가져갈래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린 그의 머리카락과 눈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미 좋은 주인이 있는 거 같으니, 사양할게요.”
더 좋은 주인을 찾은 거 같아서 그래요. 진짜로.
그때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그와 한 약속을 떠올린 나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에게 붙잡혔다.
“약속은?”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그를 밀어냈다.
“…소원부터 정해봐요.”
하지만 바리다스는 자신을 밀어내는 내 손을 잡아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아니, 이건 찍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었다.
쪽.
민망한 소리가 크게 울렸고 그는 내 손을 잡은 그 상태로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봤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어서.”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는 내가 직접 하길 원하는 것처럼 고개만 살짝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나와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고 나는 다시 발뒤꿈치를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서 두 발짝 멀어졌다.
“됐죠?”
내 말에 눈을 뜬 바리다스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표정을 굳혔다,
“이건 애들 앞에서 해도 되겠어요.”
그리고는 내가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
이건, 진짜로 전체이용가에서 절대 나올 수 없을 법한 입맞춤이었다.
한참을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는 숨이 막힌 내가 가슴을 치자 그제야 멀어졌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들 있으면 못 하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작가를 원망했다.
모쏠이 어떻게 저렇게 해. 작가님 진짜 이거 설붕 아니냐고요. 난 저런 모쏠 본 적 없어. 그리고 애들 있다고 안 한 것도 아니잖아.
억울해진 내가 따지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바리다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가 있죠.”
그의 말에 시계탑을 올려다보자, 시계가 여덟 시 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도 잘 돌려요, 진짜.
“그래요.”
그렇게 그를 따라 강가로 향했다. 조금 뒤 시장을 가득 채운 인파가 멀어지며 조용한 나루터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동화에 나올 법한 귀여운 나룻배가 물 위에 떠 있었다.
바리다스는 나루터 가장자리로 걸어가 능숙하게 배가 묶인 끈을 풀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탓인지 주변은 조용했고, 어둑해진 하늘 때문에 검게 일렁이는 강물이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다가가지 못하고 서 있자 먼저 배에 탄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요.”
그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자, 살짝 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금세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바리다스는 배 아래에 놓인 노를 잡고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모터보트나 고무보트는 타 봤지만, 나룻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책 속이긴 하지만,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배 밑으로 흔들리는 강물을 바라봤다. 어두운 강 위에는 오직 달빛만이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아직은 사람이 많이 없네요.”
“금방 몰려올 겁니다.”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오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탄 배도 있었고, 한 가족 모두가 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배도 있었다.
다리 위에서 등불을 띄우려고 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꽃등을 만드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렇게 조금씩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새 수백 명 이상이 모인 것 같았다.
아홉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사람들은 준비해 온 등불을 하나둘씩, 켜기 시작했다.
그러자 캄캄하던 강가는 사람들이 켠 꽃등들로 인해 대낮처럼 따뜻하고 환해졌다.
한 소년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등불을 하늘로 띄워 올렸다. 반짝이는 등불이 하나둘, 모여 천천히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때, 바리다스가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는 꽃등을 내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에게서 꽃등을 받아든 나는 먼저 날아가고 있는 꽃등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힘을 풀었다. 그리고 바리다스도 나와 동시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꽃등을 띄웠고 나와 그의 꽃등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어느새 날아온 꽃등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각자의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몽환적이고 아름다워서,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네, 그러네요.”
그때 연꽃 모양의 등불이, 물살을 타고 내 쪽으로 밀려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바리다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바리다스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시선을 피했다.
“피오라.”
그러자, 바리다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텅 비워졌다. 분명 내 얼굴은 엄청나게 붉어졌을 것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그런 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내 손을 붙잡았다.
“역시, 사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