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84)화 (84/207)

85. 진심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로나와 레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씻으시겠습니까?”

물에 들어가면 머리가 좀 차분해질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자, 김이 오르는 욕조가 보였다.

“혼자서 씻을게, 오늘은 먼저 들어가도 괜찮아.”

내 말에 로나와 레나는 수건을 챙겨준 뒤,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 들어가자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욕조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봤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원작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말이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아닐 것이다.

그는 과연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충격이나, 상처를 받진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를 한참 나는 욕조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결정한 것이었다.

길게 끌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그는 더 이상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이미 바리다스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그에게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으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며 바리다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나처럼 생각해 줄 것이니까.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온 것인지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나와 레나가 두고 간 수건과 흰색의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자고 있으려나.

바로 옆방이니, 자고 있지 않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결심한 거, 쇠뿔도 단김에 뽑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옷 대신 편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대충 말린 나는 바로 바리다스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방의 문이 더 커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어 노크를 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자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바리다스가 나왔다.

그도 방금까지 씻고 있던 것인지 셔츠의 단추는 끝까지 잠겨있지 않았고 머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결심했던 것과는 달리,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말을 꺼낸다는 건 생각했던 것 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지 못할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리다스의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무너진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 얘기도 안 꺼냈는데.

저런 표정을 지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울면 안 돼. 말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마음을 다잡기엔 너무 늦은 뒤였다.

결국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내 모습에 그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였다.

“…울지 말아요.”

다정한 그의 목소리 때문에 더 울음이 났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그런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와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바리다스는 나를 바로 소파에 앉히더니, 차를 가져왔다.

“그렇게 말하기 힘든 일이면 안 해도 괜찮아요.”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방금까지 운 것이 민망해질 정도로 상냥하고 다정한 행동이었다.

그 덕에, 다시 용기가 났다.

“아니에요, 말 하고 싶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조금 더 안도가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바리다스는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내 손을 강하게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준다는 것처럼.

그 덕분에, 나는 한결 더 침착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순서대로, 침착하게.

“저는 피오라가 아니에요, 그녀의 몸에 들어왔을 뿐 다른 사람이에요.”

내가 누구인지.

“사고였어요, 차에 치여서 죽었고 눈을 뜨니 이 세계였어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제가 살던 곳에서 이 세계는 <공작가의 아이들>이라는 로맨스 소설이었어요. 저는 그 책 속에서 당신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었어요.”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 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기에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남자 주인공이었어요.”

거기까지는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악녀이며 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고 다른 여자 주인공이 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리다스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바리다스가 내 팔을 당겼고 깜짝 놀란 나는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았을 이야기는 안 들을래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눈물에 나를 달래듯 끌어안은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그 이야기에서 뭘 바꿨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해도,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울림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행복해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저도, 사랑하고 있어요.”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훌쩍이며 말하자, 바리다스는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말이면 저는 다 필요 없어요.”

내가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울기를 한참, 슬픔이 조금씩 사그라졌고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품에서 나를 땐 바리다스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정이 좀 됐어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에 누구보다 충격 받았을 사람은 그인데, 오히려 울어버린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니에요… 당신은 괜찮아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그의 대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제야 뒤늦게 내 시야에 바리다스의 셔츠가 들어왔다.

내 눈물로 인해 젖어있는 흰 셔츠 말이다.

민망함과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밤이 늦었는데, 이제 자러 가요.”

횡설수설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문고리를 잡은 그 순간, 바리다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삐걱거리며 그를 돌아보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그 세계에서의 당신 이야기를 해 주세요”

전생에서의 이야기라.

이곳에서 전생의 이야기를 누군가와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싫지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었다. 피오라가 아닌 온전한 나를 이제 그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꺼낸 전생의 이야기는 터지기 시작한 둑처럼 그리움과 함께 막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적당한 설명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고 바리다스도 마찬가지로 웃고, 나를 달래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하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지 못할 수도 있어요.”

조금 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피오라를 보고, 바리다스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들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두려웠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자신이 원하던 진실이자,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리고 피오라는 하나둘, 숨겨왔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보다 바리다스는 그동안 마음앓이를 했을 피오라가 더 걱정되었다.

“…….”

이야기를 마친 후 잠든 피오라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오라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던 탓이었다.

혼자서 많이 고민했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이제는 자신에게 그런 짐을 다 터놓길 바라며, 바리다스는 피오라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으음….”

그때 그의 손길 때문인지, 피오라가 낮게 신음하며 몸을 틀었다.

…하아.

그 모습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다음번에 그렇게 오면, 그때는 안 봐줘요.

경각심을 좀 가지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피오라의 이마를 살짝 찌른 그는 그녀의 다리와 허리 아래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피오라의 방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자신의 침대에 피오라를 눕힌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참았는데,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 * *

“형수님!”

아침부터 피오라의 방에 찾아온 자스민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그녀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피오라는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자스민은 피오라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욕실과 드레스룸, 심지어는 책상 밑까지. 자스민은 구석구석 피오라를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피오라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자스민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리다스의 방으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보이지 않았고 자스민은 고민 없이 그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바리다스를 껴안고 곤히 잠든 피오라와 그런 피오라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바리다스가 있었다.

그때 자스민과 바리다스의 눈이 마주쳤고 바리다스는 웃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의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밖으로 나갔다.

렌의 방으로 향하며 자스민은 중얼거렸다.

“나만 빼고 치사해.”

형수님이 자는 것 같아서 투정 부리지는 않았지만, 나도 같이 자고 싶단 말이야.

잠시 볼을 부풀린 자스민은 생각했다.

내일은 꼭 셋이 같이 자자고 말해야겠다고 말이다.

바리다스가, 참으로 싫어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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