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결혼식 일주일 전
“황녀님!!”
작은 마차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리리안과 레이안이 마중을 나온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아이는 일주일 후 있을 나와 바리다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리안, 레이안. 잘 지냈니?”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게 달려온 남매는 각자의 품 안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꺼냈다.
“결혼 축하드려요!”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내가 선물을 받아든 그 순간, 아이들이 뒤늦게 저택에서 내려왔고 리리안과 레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아이들과 같이 내려온 강아지들도 오랜만에 보는 황실 남매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했고 무언가 뒷전이 된 것 같아,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친구끼리 놀아야지.
내가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고 있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이들은 참, 빨리 친해지는 것 같아요.”
깜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자, 미소 짓고 있는 아필레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필레가 반가워,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황후 폐하!”
내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녀도 나 못지않게 반가워 보였다.
“결혼 축하해요, 황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에서 내린 시종들이 선물들을 가져왔다.
또다시 정원에 쌓이는 장신구와 여러 가지 그림들과 동상을 보며, 나는 눈물을 머금었다.
공작가 금고방 다 찼어요…….
아필레의 마음은 고마우나, 언제나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레몬청을 보내줬을 때도, 고맙다며 옐로 다이아 목걸이를 선물해 줬으니 말이다.
“몸만 와도 괜찮은데.”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필레는 내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눈을 반짝일 리 없으니 말이다.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요.”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받아.
결국 나는 그녀의 선물을 받으며 생각했다.
생일이나, 셋째 낳으면 각오하라고.
몇 배로… 돈쭐 내줄 테니.
“참, 그리고 공작이 부탁한 거.”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얼마나 귀한 것이길래, 바리다스가 직접 부탁하고 황후가 가져다주는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필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다 부쉈어요?”
“네?”
최근에 뭘 부순 기억은 없었다.
내가 되묻자 그녀는 상자를 열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내게 보여주었다.
내 새끼손톱만 한 마정석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약혼반지 말이에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납치당해서 도망치려다 부숴 버렸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내 선택은 하나였다.
“…계단에서… 미끄러졌어요.”
“저런.”
다행히도 아필레는 내게 더 묻지 않았지만 그것이 더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계단에서 넘어져 마정석 반지와 다리가 부러지고 사용인 탓을 한 황녀가 되었다.
“조심해서 사용해 주세요. 다음번에는 못 구해다 줘요.”
나는 그녀에게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황후가 직접 나서서 전해 줘?
물론 마정석 자체도 비쌌고 이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마정석이니 당연히 비싸기야 하겠지만. 황후가 나설 정도의 일인가?
“데이먼 제국과는 달리 여기서는 소유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에요.”
아필레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내 떨리기 시작했다.
불법이었구나…!
아니, 이런 걸 막 선물해도 괜찮아? 황후가 직접 나서서 구해줘도 되는 거고?
내가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그 순간, 아필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실에 허가를 받으면 사용해도 괜찮아요.”
나를 속인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아필레는 웃음은 설명을 마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멈출 줄 모르는 그녀의 웃음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웃으면 됐지 뭐.
아필레는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미안해요, 황녀가 너무 귀여워서.”
“…괜찮아요.”
내 말에 아필레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 누구나 장난치고 싶을 수 있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아필레는 내가 들고 있는 마정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과의 뜻으로 하나 더 구해다 줄까요?”
“괜찮습니다!!”
절대 사절이었다.
내 말에 아필레는 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알겠어요, 장난 그만할 테니까. 이제 저택을 안내해 주세요.”
설마, 결혼식 전까지 공작저에서 지내려고 하는 건가?
물론 결혼식에 참가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공작저에서 지내는 것도 상관없었고.
다만 황후가 이렇게 오래 황실을 비워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돌아가는 기간까지 더하면 거의 한 달 가까이 황궁을 비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필레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어찌, 친우의 결혼식에 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친우, 그 말에 왜인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도 오고 싶어 하셨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필레에게서 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으나, 웃고 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두 분, 싸웠구나.
“우리 저택 소개 전에, 얘기 좀 할까요?”
아필레는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뻔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랑 같이 황제를 욕하면 황실 모욕죄가 성립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나와 아필레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로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원한 차로 부탁할게.”
내 말에 얼마 지나지 않아 로나가 시원한 레몬차를 가져왔고 그것을 한 번에 들이킨 아필레는 입을 열었다.
“황녀, 그냥 결혼하지 마세요.”
방금까지 축하한다면서요.
대체 얼마나 싸운 거야.
하지만 나는 이럴 때 그냥 닥치고 얘기를 들어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왜 싸웠어요?”
내 말에 아필레는 잠시 고민하다, 차를 들이켰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런데 왜 차를 들이켜는 저 모습마저도 품위 있어 보이지? 이게 황후인가.
화를 내는 와중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다.
“말하려면 길어요! 아무튼 하지 마세요!!”
하는 말은 행동과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특히, 직위 높고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는 만나면 안 돼요.”
……어….
바리다스가 들으면 상처받겠는데.
그가 겉만 번지르르 하고 직위만 높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현 황제도 잘생긴 데다가, 성군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언제나 완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그냥 맞장구를 쳐 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황제폐하가 잘못했네.”
이 정도는 황실 모욕이 아니겠지?
제발.
남의 속도 모르는 내 앞에 아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행복하게 해준다는 말 믿지 마요.”
죄송합니다. 그건 못 들을 거 같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넵.”
내 대답에 한숨을 내쉰 아필레는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제 가문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황후라는 자리에 욕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죠.”
“아킬레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 하나만 보고 이 자리까지 온 거란 말이에요.”
전부터 느끼고 있긴 했다. 둘이 정략혼이 아니라,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둘은 함께 있을 때, 정말로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걸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근데 한 번씩 짜증이 나요.”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황실 업무는 힘들고 남편한테는 다른 여자들이 자꾸 치근덕거리고!”
감정이 담긴 것인지 아필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의 말에 몇 주 전까지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빙의했다고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사교계 활동은 기 빨리고.
바리다스 얼굴 때문에 여자들 꼬이고!
아필레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간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힘들었겠네요.”
내 말에 아필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지 말라고 했던 건 취소할게요, 그건 제 실언이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솔직하게 결혼식을 앞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진심으로 한 말도 아니었을 거고 그 정도야 뭐, 일찍 결혼한 친구들에게 자주 들어온 말이었으니까.
그런 내 말에 아필레는 미소를 지었다.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속이 시원하네요.”
“다행이네요.”
“황녀가 제 친구인 게 정말로 기뻐요.”
아필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그래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필레에게 인사한 뒤, 내 쪽으로 온 바리다스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나는 깜짝 놀라 아필레를 돌아봤지만, 이미 그녀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나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내가 바리다스를 노려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아필레에게 다가갔다.
“황제 폐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의 말에 아필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의 붉게 물든 볼을 확인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그래, 고맙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내가 그를 붙잡았다.
그런 내 행동에 바리다스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그는 아필레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이 사람 아필레 앞에서 뭘 기대한 거야.
“아, 부탁했던 마정석이군요. 감사합니다.”
상자 안에 담긴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가 아필레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필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네, 황녀가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하던데 아이들도 있으니 더 주의하도록 해요.”
그녀의 말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진짜 계단 아닌데.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그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것인지 웃음을 참고 있어 더 민망해졌다.
“네,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제가 옆에 붙어있도록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아니, 나쁜데요?
그렇게 내 수식어는 한 단계 더 진화했다.
계단에서 넘어져 마정석 반지와 다리가 부러지고 사용인 탓을 하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남편과 붙어 다니는 신부로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납치당했다고 하는 것이 내 명예에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