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결혼식 일주일 전
“아니,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 보이는군.”
“저도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역시, 형수님한테는 은보다 백금이 더 잘 어울려요.”
그들의 말에 핼쑥해진 유명 세공사 제이미는 푸른 다이아를 메인으로 만든 백금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걸로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네, 그걸로 해 주세요.”
대답하면서도 사실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제이미 못지않게 기가 많이 빨려 있었다.
백금이나, 은이나…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오늘 아침, 완성된 웨딩드레스와 구두 그리고 악세서리들이 차례로 공작저에 도착했다.
나는 다 만족스럽게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아필레와 리리안 그리고 레몬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웨딩드레스는 이제 와 고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아필레가 몇 가지 장식을 추가하는 선에서 끝났으나, 다른 것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것저것 따져보며 내게 가장 어울리는 악세서리를 골라 주려고 했다.
그래, 솔직하게 내 잘못이었다.
처음 웨딩드레스를 준비할 때, 귀찮다는 이유로 대충 몇 가지를 골라 돌려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귀걸이도 비슷한 디자인으로 보여주게.”
아필레의 말에 제이미는 조수들과 함께 준비해온 귀걸이를 우리 앞에 펼쳐놓았다.
화려한 보석들은 대부분 푸른 색의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는 사파이어보다는 블루 에메랄드가 낫다고 생각해요.”
레몬의 말에 아필레와 리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은 파란색 아니야?
아무리 봐도 색이 조금 다른 것을 제외하면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귀걸이를 구경하고 있던 리리안이 무언가 뒤늦게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어머니 그건 전해 드렸나요?”
“…어머,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고맙구나. 리리안.”
아필레는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시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녀는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상자를 가져왔다.
아필레는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아니, 뭘 또 줘.
리리안까지 알 정도라면 꽤나 중요한 선물일 것 같아, 불안해졌다.
내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자, 한가운데에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티아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막눈인 내가 봐도 다른 것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제이미도 그 보석의 가치를 알아본 것인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에스트의 눈물 아닌가요?”
그의 말에 리리안과 아필레, 레몬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모르는 거야?
무언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다이아라 불리는 에스트의 눈물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설명 고맙네요, 제이미….
더 부담스러워졌다.
심지어 그냥 보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티아라였다.
이 세계에서는 티아라와 같은 왕관은 오직 황족, 그것도 황제와 황후만 착용 할 수 있었다.
티아라의 경우 황족이 결혼식을 할 때 황실에서 선물 해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나는 황족이…네…?
잘 생각해보니, 이 정략혼으로 데이먼과 크레센트가 우호적인 관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는 했다.
줄만 해서 준 거구나. 근데, 너무 부담스럽다고.
에스트의 눈물에 묻혀 잘 보지는 못했지만, 주위에 있는 다른 보석들도 모두 비싸 보였다.
저것들도 다 다이아겠지? 이거 완전 저택 하나를 쓰고 다니는 거잖아.
“소중한 친우이자, 귀한 손님이 결혼하시는 건데 이 정도는 해 줘야죠.”
아필레는 내게 티아라를 내며 말했고 나는 손을 부들거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소중한 친우한테 이런 거 선물 해 줘야 하면, 저는 지구에서 친구 없어요.
“써 봐요.”
아필레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나는 손을 떨며 티아라를 들어, 머리에 올렸다.
가벼웠으나, 무언가 다른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완전 잘 어울려, 형수님!”
“역시 아름다우시네요.”
리리안과 레몬의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 머리에 올라가 있는 저택, 아니 티아라가 떨어질까 온몸에 신경을 머리에 집중한 상태였다.
지금도 이런데, 이걸 쓰고 결혼식까지 하라고?
아필레를 바라보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고예요, 황녀.”
“고마워요….”
나는 티아라를 벗고 다시 상자 안에 돌려놓았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아필레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고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절친한 친우에게 이런 귀한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네요. 고마워요.”
지금 내 기분을 설명하자면 같은 반, 가끔 인사만 하는 친구에게 내 생일 선물로 에X팟을 받은 기분이었다.
물론 아필레와는 친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귀걸이는 티아라와 가장 어울리는 디자인을 한 것으로 정해졌고 나는 드디어 이 끔찍한 쇼핑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스무 가지 종류의 구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중에 뭘 신어야 가장 빨리 도망칠 수 있을까.
기다란 드레스 때문에 거의 보이지도 않을 구두가 뭐 그리 중요한지, 아필레와 레몬 그리고 리리안은 재질과 장식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레몬이 입을 열었다.
“구두는 신어봐야 알긴 하는데….”
그녀의 혼잣말에 나는 바닥에 깔린 구두들을 바라봤다.
저걸 다 신었다간 내 발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빠르게 가장 무난해 보이는 흰색 구두를 골랐다.
“저는 저게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내 말에도 구두 장인 드리테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아필레와 리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부장님과 사장님 그리고 회장님 사이에 낀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저씨는 무슨 죄가 있겠어요. 마음 편하게 눈치 봐요.
다행히 아필레와 리리안은 드리테의 피가 다 마르기 전에 대답을 해 주었다.
“흠, 사실 저도 저게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황녀가 원하는 것이니, 저걸로 해요.”
그들의 대답에 드리테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그러면 저 구두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고른 거지?
드레스랑 악세서리 그리고 구두까지 모두 골랐으니까.
네가 드디어 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기댄 순간, 아필레가 다가왔다.
“고생했어요.”
그녀의 말에 긴장이 풀렸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드디어 이 힘겨웠던 쇼핑에서 해방이 된 것이 기뻤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자스민과 렌 그리고 그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스민은 응접실 가득 찬 보석과 구두를 보며 눈을 반짝였으나, 그린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필레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렌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드레스,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고마워.”
그 순간, 리리안과 그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자스민, 그거 쓰면 안 돼!!”
깜짝 놀란 나와 렌이 그 방향을 바라보자, 자스민이 왜 그러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티아라가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왜 안 돼?”
자스민의 질문에 그린과 리리안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 채, 아필레의 눈치를 봤다.
이곳에서 티아라를 착용 할 수 있는 것은, 허가를 받은 피오라와 황족인 아필레 둘 뿐이었다.
그것이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 순간, 정적을 깨고 아필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웃으며 리리안과 자스민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 미안해요. 리리가 떠올라서.”
그녀의 말에 리리안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
리리안이 타박하듯 아필레를 불렀지만 한 번 터진 그녀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필레는 자스민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짝이는 게 좋을 나이지.”
그녀의 말에 리리안의 얼굴이 더 붉어졌고 나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리리안이 티아라를 가지고 무슨 짓을 했길래 아필레가 저렇게 웃는 것인지.
하지만 아필레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티아라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단다.”
“아라써요.”
조금 시무륵해지긴 했으나 자스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티아라를 벗어 원래 자리에 올려놓았다.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넘어가 준 아필레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했고 나는 시선이 벗어난 틈을 타 아필레를 불렀다.
“리리안이 티아라로 뭘 했길래 그래요?”
“말도 마요, 리리안이 세 살이었나? 티아라를 머리에 쓰는 걸로도 모자라 팔이랑 목에 걸고 나타난 거에요. 귀족들 다 있는 회의실에.”
…자스민보다 더 심했구나.
확실히 리리안은 레몬과 같은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완전히 뒤집혔죠.”
아닌가…?
“리리안에게 황녀의 자격이 없다질 않나, 레이디로서의 예의가 없다는 않나, 별 같잖은 소리를 하길래, 그냥 싹 갈아엎었죠.”
갈아엎어…?
“세 살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아필레가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생각했다. 역시 엄마는 건들면 안 된다고 말이다.
“저희야 귀엽지만, 리리안 입장에서는 부끄러울만하네요.”
내 말에 아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멀리서 놀고 있는 걸 확인한 뒤,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속옷은 준비했나요?”
아니, 말이 왜 갑자기 그렇게 돼?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뻐끔거리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얼굴이 달아올라 붉어진 것이 느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강하게 흔드는 걸로 대답했고 그런 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아필레는 입을 열었다.
“어머나, 같이 고르러 갈래요?”
“괜찮아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크게 소리쳐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아필레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절교에요, 아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