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결혼식 일주일 전
그렇게 아필레는 다시 한참을 웃다가 나를 바라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대체, 뭘…?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필레를 바라봤다.
“나도 결혼식 때 엄청 긴장했어요.”
그 얘기였구나.
아필레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준 것이었는데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아필레는 나를 놀리려는 의도로 한 것이 맞았는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나빠요.”
내 말에 아필레는 웃음을 멈추고 내 손을 붙잡았다.
“왜, 공작이 그렇게 반했는지 알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아필레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많이 힘들 거예요.”
그녀의 눈에 비친 걱정을 읽은 나는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으니, 괜찮아요.”
아필레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할 만했다.
며칠 전부터 크림슨한테 배우고 있는 내부 재정 관리 같은 것들은 조금 지출이 큰 가계부 느낌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바로 옆 제국의 황녀와 공작부인이라는 타이틀 덕에 사교계에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소설에서 뭐, 칼 없는 전쟁이다. 여자들의 싸움이다.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에 비해 대부분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한 어두운 일면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사교계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보다 고위 귀족들이 많은 수도는 조금 다르려나.
그렇다면 아필레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씩씩하게 말해줘서 다행이네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아필레는 싸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다 혼내 줄 테니까. 남편이든, 어떤 귀족이든, 누구든.”
“…넵!”
순간적으로 아필레에게서 강한 위압감이 느껴졌고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역시 아무나 황후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대답에 아필레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황녀. 당신은 제국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로 권력이 강한 사람들을 등에 업은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여친 자리는 비었지? 나도 여친 자리 비었어.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든든하네요.”
“그렇죠?”
그 순간, 방 문이 열리고 토마와 레이안 그리고 바리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안의 등장에 유독 그를 잘 따르던 루이가 그에게 달려갔다.
어째, 사람이 점점 늘어나네.
아이들 일곱 명에, 강아지 세 마리, 성인 세 명까지.
나는 어느새 가득 찬 응접실을 바라봤다.
토마와 레이안은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강아지들과 놀기 시작했고 바리다스는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앉았다.
대기하고 있던 레나가 찻잔을 가져와 그에게 따라 주었지만 바리다스는 차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아필레는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나는 애써 그녀의 웃음과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훈련은 잘하고 왔어요?”
하지만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얼굴이 터질 것 같아, 도와달라는 의미를 담아 아필레의 손을 붙잡았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아필레는 바리다스에게 말을 걸었다.
“황태자는 좀 어떤가?”
그제야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래에 비해 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토마는 레이안이 공작 저에 온 뒤로 하루에 한 번씩, 그와 토마와 대련을 해 주었다.
방금도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다 온 것이겠지.
바리다스의 말에 아필레의 얼굴이 맑아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 폐하를 닮아 좋은 황제가 될 것 같군요.”
그의 말에 아필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제 황제의 편지를 잘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때 나를 바라보는 아필레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조금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둘이서 산책이라도 하고 와요.”
나는 아필레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싫은 건 아니지만 여기서 둘만 나가기는 조금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붙잡았다.
“네, 감사합니다.”
“뭘, 감사까지야.”
그렇게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스민이 우리랑 함께 가고 싶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린의 손에 저지되었다.
“방해하면 안 돼.”
그의 말에 자스민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가도 돼.
하지만 여기서 괜찮다고 했다간 바리다스가 싫어할 것이 분명했기에, 결국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천천히 방 밖으로 나섰다. 등 뒤로 속삭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두 분의 시간을 존중해 줘야 해.”
그린이 말했고.
“나는 내 앞에서 뽀뽀해도 이해해 줄 수 있어!”
자스민이 대답했다.
“하더라도 네 눈은 가리고 하시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리안이 받아쳤다.
아필레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내 철판은 맥없이 부서진 뒤였다.
어디까지 아는 거야, 리리안!
내 얼굴이 붉어졌고 그 모습을 본 바리다스가 키득거렸다.
“기대에 보답해 줄까요?”
“아니요!!”
내 단호한 대답에 바리다스는 흠, 하고 낮게 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닌데, 원하는 거 같은데.”
얄미운 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손을 놓고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나가자,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지난번 약혼식을 한 것과 같은 위치였지만, 정원을 꾸미고 있는 것들은 그에 두 배, 아니 세 배로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다리에 올라가 장미 나무를 정리하고 있던 정원사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사다리에서 급하게 내려오려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나는 바리다스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에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저쪽으로 가죠.”
그런 나를 바라보며 바리다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나는 일하던 사용인들의 모습이 작아진 것을 확인하고 속도를 늦췄다.
그때 내 눈에 흰색의 벤치가 들어왔다.
“여기서 얘기할까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벤치 위에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래.
“고마워요.”
내가 그 위에 앉자 바리다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근데, 무슨 얘기를 하지?
일단 등 떠밀려 나오긴 했는데,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오랜만에 둘만 있는 것 같네요.”
“그러게요.”
지난번, 내가 바리다스의 방에서 잠든 이후로 둘만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바리다스가 바빴던 데다가, 황실 남매와 아필레가 왔기 때문이었다.
잠깐, 근데 바리다스 나랑 놀아도 괜찮아? 일할 거 많잖아!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일 안 해도 괜찮아요?”
“잠깐은 괜찮아요.”
사실 안 괜찮았다.
토마와 레이안을 가르쳐 주는 것도 겨우 짬을 내서 한 시간 정도 봐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능한 집사 크림슨이 있었다.
야근시키고 월급 조금 더 얹어주면 된다.
악덕 고용주 같은 바리다스의 생각을 모르는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피오라.”
“네?”
“그곳에서의 당신의 이름은 뭐였나요?”
나는 바리다스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이름을 물어봐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예린, 이 예린이에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더듬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에…닌…?”
이곳과의 발음과는 조금 다르기에 부르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외국인 같은 발음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예.린.”
한 글자씩 말해 주자 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다.
여기서 내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자로 지은 것이 아니라 딱히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소중한 이름이었다.
“예린.”
이제는 내 이름만큼은 완벽한 발음을 자랑하는 그의 부름에 나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네.”
“예쁜 이름이네요, 예린.”
“고마워요.”
내 이름을 다시 듣게 해 줘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웃자 바리다스도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예린인 건, 저밖에 모르는 건가요?”
라고 말하는 그의 붉은 눈이 반짝거려, 왜인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죠?”
“마음에 드네요, 예린.”
그런 내 시선을 집요하게 쫓으며, 미소 짓는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어졌다.
그 모습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와, 진짜.
유혹 만렙이야, 이 사람.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예린으로 불러도 될까요?”
바리다스의 말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세계의 피오라라는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예린이라는 이름은 내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불러줌으로써, 내가 피오라가 아닌 예린으로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에게는 그 말이, 어떠한 다른 말보다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너무… 좋아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바리다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는 사실을.
“안 울어요.”
다행히도 눈물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고 그는 작게 웃으며 내 뺨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에 나는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사실 스물다섯 살이에요.”
죽을 때 스물네 살이었고, 여기서 깨어난 후 다시 일 년을 살았으니까 스물다섯 살.
스스로 계산하면서도 조금 이상한 계산법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 내 말에 장난스럽게 웃은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누나라고 불러달라는 거예요?”
“아니요!!!”
바리다스 입에서 누나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내 무덤을 내가 판 꼴이 되어버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린.”
“왜요….”
내 대답에 작게 웃은 그는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제, 애칭으로 불러주세요.”
남편이 될 사람인데.
속삭이듯 덧붙이는 말에 귓가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다스… 리다? 바다? 리스?
으음, 딱히 좋은 느낌이 드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것이 바다인데, 조금 더 좋은 거 없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스.”
내 말에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에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알겠어요.”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고 나와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햇볕이 밝게 내리쬐는 따스한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