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결혼식
나는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레나와 로나에게 몸을 맡겼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그것조차 기다릴 만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내 인생에 한 번뿐일, 결혼식 날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방 한쪽에 걸려 있는 웨딩드레스를 보며 작게 웃었다.
처음 디자인되었던 웨딩드레스는 흰색으로만 이루어져 조금 밍밍했던 것에 반해 지금은 푸른 장미와 보석이 추가되어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필레의 의견이었다.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코로셋은 기본이요, 철사로 된 지지대를 올리고 속치마까지 세 겹이나 입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이겨 낼 수 있었다.
근데 다시는 안 입을 거야.
굳게 다짐하며 나는 거울을 바라봤다.
흰 피부와 푸른색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 그리고 나의 백발과 푸른 눈은 마치 하나처럼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필레와 아이들이 왜 그렇게 푸른색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쳤다. 정말로 미친 수준이었다.
아이돌이나 배우들을 보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의상이 하나씩은 있었다.
슈트나, 제복, 점프슈트나 원피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피오라의 경우, 그런 의상이 웨딩드레스가 분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모 배우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쁜 건, 최고이며, 짜릿하고 늘 새로운 것이었다.
로나와 레나도 같은 생각인지, 나를 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쉴 시간은 없었다.
씻고 드레스를 입는 대에만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화장과 머리도 해야 했고 다른 장신구들도 착용해야 했다.
정신을 찾은 그녀들은 다시 나를 치장해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로나가 머리를 레나가 화장을 맡아 진행하기 시작했다.
달라지는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예쁜 애는 꾸미면 더 예뻐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던 그 순간, 레나가 아이섀도우를 꺼냈다. 무려 펄이 들어간 파란색의 아이섀도우를 말이다.
저걸 소화할 수 있으려나?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섀도우는 적당한 하늘색이 아닌 깊은 바다 같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바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푸른 섀도우는 상대적으로 흰 피부 그리고 내 푸른 눈과 매우 잘 어울렸다.
역시, 예쁜 게 최고인가.
거울을 보던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라면 레나가 푸른색의 립스틱을 사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피오라여도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레나는 다행히도 붉은색의 립스틱을 꺼냈고 그것은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했다.
진하게 발린 붉은색의 입술은 전체적으로 희고 푸른 분위기를 내고 있던 나와 오묘한 언밸런스를 이뤄내며 잘 어울렸다.
레나가 왜 푸른색의 아이섀도우를 골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나는 머리를 크게 건들지 않고 하나하나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넣은 뒤, 그 위에 면사포와 티아라를 함께 씌워 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나는 얇은 레이스로 만들어진 장갑을 낀 뒤, 구두를 신었다.
높은 굽의 구두와 불편한 코르셋이 많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못 걷거나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방 밖으로 나가자, 언제 온 것인지 아필레와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완전 예뻐!!”
“진짜 잘 어울리셔요.”
아이들은 돌아가며 내게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민망함과 동시에 기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작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내 대답에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레이안은 울먹이며 내 손을 잡았다.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그 모습에 아필레가 웃음을 참았고 토마가 그를 때어내려는 것을 레몬이 말렸다.
그리고 리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 아는 눈치였지만 나는 레이안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고마워, 레이안.”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레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그 모습에 아필레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 크림슨이 다가왔다.
“마님,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며칠 전부터 크림슨은 나를 황녀님이 아닌 마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나를 황녀라 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데이먼 제국의 황녀가 아닌, 차일드 가의 안주인이자 공작부인이 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크림슨을 따라 신부 대기실로 내려갔다.
신부 대기실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기에, 영애들과 귀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내 등장에 차례대로 다가와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몇 명과 인사를 나눴을 때쯤, 맨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실비아와 미렐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 개학한 거 아니었니? 여기서 이래도 괜찮아? 고삼이라며!
정확히는 졸업반이었지만 그거나 저거나 의미는 같을 거 같았다.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두 소녀를 바라보자 고마움과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개학한 거 아니었어요?”
내 질문에 두 소녀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황녀님, 아니 공작부인의 결혼식인데 꼭 참석해야죠!”
“맞아요!”
아니, 그래도 출석 일수 채워야 할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둘을 바라보자 미렐이 입을 열었다.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출발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같이 기쁜 날에 축하해주러 온 사람 앞에서 걱정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다고 생각하며.
“네, 방문해줘서 고마워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오늘도 둘의 주접이 시작되었다.
실비아는 내 부케를 양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부케에 꽃 한 송이가 부족한 것 같은데, 들어가시죠?”
“그럼 결혼은 누가 하니?”
작게 웃으며 말하자 이번에는 미렐이 옆에 있는 장미 나무를 가리켰다.
“이렇게 된 김에, 저거 세워 놓고 저희랑 도망가시는 건 어떤가요?”
둘의 귀여운 주접에 결국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네요.”
“이렇게 된 거, 아카데미에 입학하시죠.”
“그럴까요?”
내 말에 두 영애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미렐과 실비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영애는 아쉬운 표정을 하며 내게 작별 인사를 했고 나는 대기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에 들린 부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혼자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과 놀거나 아필레와 수다를 떨었지.
갑자기 혼자 남자,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흰색의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사람은 딱 봐도 체형이 여성 같지 않았다.
바리다스인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 같지는 않았다. 바리다스가 키도 조금 더 크고 어깨도 좀 더 넓었다.
밖에서 경비병이 대기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내가 경비병을 부르려는 순간, 그 남자가 로브를 벗었다.
“잘 지냈나, 황녀?”
그를 알아본 나는 깜짝 놀라 부케를 떨어트릴 뻔했다.
“폐, 폐하!”
와, 방금 생각 얼굴에 티 안 났겠지?
저거도 황족 모욕죄에 해당이 되나, 고민하며 나는 황제에게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말에 작게 웃은 황제는 시선을 낮춰 내 손에 들린 부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반갑군.”
그는 미렐과 실비아의 주접을 다 들은 것이었다.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자, 바리다스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부케를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신 건가요?”
“내가 이 제국에서 못 갈 곳은 없네.”
분명 멋진 말이었다, 근데 신부 대기실에서 폼 잡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뻔뻔한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소리쳤다.
“황후마마, 대기실에 태양이 떨어졌어요!”
다른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외침이었다.
내 말에 황제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작게 웃었다.
두고 보라고.
“저는 방문한다는 말씀을 들은 게 없는데.”
아필레와 리리안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황제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괜찮았다. 제국 서열 이 등과 삼 등을 등에 업고 있었으니까.
“너무 지엄하셔서 진짜 태양인 줄 알았어요.”
내 말에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미 황제의 앞까지 다가온 아필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왜인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내가 분명, 황궁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말에 황제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잠시만, 아필레. 들어봐.”
“아니, 나랑 얘기 좀 해요. 리리안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실례했어요, 황녀.”
아필레는 공격적으로 황제에게 망토를 씌운 뒤,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나 저거 알고 있어.
결혼한 남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 일 순위.
리리안도 저 말에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인지 얌전히 내 옆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저래 봬도 사이좋으셔.”
어른스러운 리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리리안이 철이 일찍 든 건,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그린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레몬이 불러요.”
표정을 보아하니, 레몬이 리리안을 데려와 달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리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가자.”
라고 말하며 그녀는 그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린은 이걸 왜 잡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둘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린과 리리안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는 순간, 문고리가 앞으로 당겨지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문에 그린이 균형을 잃고 휘청였지만, 들어온 그 누군가가 무릎을 굽혀 그린의 몸을 받아냈다.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나는 그린을 완전히 일으켜 세워준 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에게 다가갔다.
“라스.”
내 부름에 바리다스는 시선을 위로 올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햇빛보다 더 밝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 미소에 보답하듯, 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결혼식을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