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89)화 (89/207)

90. 결혼식

바리다스가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안과 그린은 먼저 가겠다는 말과 함께 식장으로 달려갔고 나는 바리다스와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를 밝게 비추는 햇살은 따스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정원의 경비를 맡은 칠드런과 그레이가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들 중 칠드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정말로 실감이 나는 듯했다.

정원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흰 카펫이 깔린 잔디밭이 보였다.

그 끝에는 지난번에 일레든 백작의 결혼식에서 봤던 신관이 서 있었다.

우리의 등장에 귀족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바리다스가 함께 있으니 괜찮았다.

나는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갈까요, 신랑님?”

“그러죠.”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함께 카펫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황제 가족이었다.

리리안과 레이안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맨 끝에 앉은 레이안의 머리를 아주 잠깐,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방문을 알리지 않기 위함인지, 황제의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곁눈질로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황제가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아필레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펫을 따라 계속 걷자, 미렐과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사이좋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한 나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길게 이어지던 카펫이 끝이 났고 나와 바리다스는 신관 앞에 멈춰 섰다.

신관은 앞에 놓여있던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신랑 신부는 서로 준비해 온 예물을 교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예물을 전달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토마와 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바리다스에게 다가왔다.

둘은 같은 흰색의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토마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는 아필레가 선물한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리다스가 토마의 상자에서, 나는 렌이 들고 있는 상자에서 반지를 빼내었다.

그가 먼저 내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걸로 그에게 받은 반지만 세 개였다.

내가 부순 반지까지 더하면 네 개였고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열 손가락이 부족해지겠네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타노스도 다섯 개밖에 안 꼈어!

그런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리다스한테는 이 반지 말고도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가 있지 않나?

시선을 돌려 토마가 들고 있는 반지를 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반지가 차일드 가의 가보이긴 했으나, 정확히는 반지에 달린 마정석이 가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바리다스는 반지를 부수고 보석만 빼내어 나와 한 쌍인 결혼반지를 만든 것이었다.

“이거… 가보 아니었어요?”

그에게 손에 반지를 채워주며 내가 중얼거리자 그는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보석이 가보죠.”

초대 공작님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못난 손자며느리라 죄송합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초대 공작에게 사과하며 그의 손가락 끝까지 반지를 밀어 넣었다.

이제 할 일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바리다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나를 덮고 있던 면사포를 부드럽게 넘겼다.

햇빛을 가려주던 얇은 천이 사라져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뜬 내가 바리다스를 바라봤을 때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내 얼굴에도 절로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바리다스의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위로 올렸고 공중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게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소설 속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여기가 소설일 리 없었다. 이 감정을, 당신을 향한 사랑은 절대로 글로 표현할 수 없을 테니까.

바리다스와 나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우리의 입술이 떨어지자 커다란 박수 소리가 정원을 채우기 시작했다.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그의 입술에는 내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

오늘따라 진한 색을 발라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손으로 입술을 훑었고 그 때문에, 흰 장갑이 붉게 물들었다.

별것도 아닌 행동에 왜 이리 부끄러운지.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부케를 던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눈을 감고 부케를 던졌다.

* * *

하지만 힘 조절을 실패한 예린의 부케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바로 앞에 앉아있던 토마에게 향했다.

다행히도 운동신경이 좋은 토마는 빠르게 부케를 피했고 그 덕에 부케는 그린의 품으로 들어갔다.

“형….”

부케를 받은 그린에게 박수가 쏟아졌고 그린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토마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방금 부케를 받았더라면, 자스민이 여기서 결혼하자고 졸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토마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려 하는 소년은 그런 수치스러운 사건은 한 번으로 족했다.

“미안….”

하지만 다행히도 일편단심 토마 바라기인 자스민은 그린에게는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부케를 받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레몬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린과 부케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헐, 너 결혼 일 년 내로 못하면 마흔 살까지 결혼 못 하는 거 알지?”

“안 해도 돼.”

단호한 그린의 대답에 레몬은 재미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요즘 들어 그린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몬은 놀려도 별 반응을 하지 않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린은 그런 레몬의 마음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이 부케를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며 부케를 바라봤다.

미신 따위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형님의 결혼식에 사용된 부케를 함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려서 방에 걸어 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조금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케를 든 채 고민하기를 한참, 그린과 리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부케를 가지고 싶은 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린은 부케를 들고 리리안에게 향했다.

리리안이라면 자신보다 그들의 부케를 잘 보관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지시겠습니까?”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 리리안은 그에게서 부케를 받아 들었다.

여러 가지 색을 띠는 푸른 장미로 만들어진 부케는 리리안의 진한 푸른색 눈과 잘 어울렸다.

그린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려는 순간 리리안이 푸른 눈을 반달로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보답으로, 네가 마흔 살까지 결혼을 못 한다면 내가 신부가 되어 줄게.” 

그녀의 말에 그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안 합니다!”

“그래, 후회하지 마라?”

부케를 받아 만족한 리리안은 사뿐거리며 그들에게서 멀어져갔고 둘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레몬의 눈이 사악하게 반짝였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린은 그런 레몬의 생각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다.

“그냥 드린 거야.”

“누가 뭐래?”

“혹시나 오해할까 봐.”

하지만 저렇게 반응하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레몬은 언젠가 그린을 놀리겠다 생각하며 이 사실을 머릿속에 잘 입력해 놨다.

* * *

나와 아필레는 그린과 리리안의 모습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일단 나는 찬성하겠네.”

“저도 기쁘죠.”

나와 아필레는 서로를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우리 중 유일하게 아킬레스의 표정만 좋지 못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반짝거리는 백금발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카락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황제임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인지 그를 알아본 귀족에 의해 정체가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하객으로 결혼식에 왔다는 소식에 결혼식장이 발칵 뒤집힐 뻔했으나, 그래도 황제는 황제인 것인지 그는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신부와 신랑이라는 말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바리다스도 마찬가지로 결혼식장에서만큼은 다 같은 하객이니, 신경 쓰지 말고 피로연을 즐기라 했고 말이다.

두 사람 덕분에 나는 귀족들에게 더 인사할 필요 없이 가만히 앉아서 아필레와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귀찮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처음으로 아킬레스가 황제답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는 오늘도 내 환상을 깼다.

“짐은 아직 딸을 보낼 생각이 없네.”

단호한 그의 말에 아필레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니, 차일드 공작가보다 좋은 집안이 어디 있다고?”

“이웃 나라 황태자가 와도 안 보내.”

아킬레스의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아필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차일드 공작가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습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아필레는 웃음을 터트렸고 아킬레스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백작위를 약속하지.”

“그렇다면 저희는 델아트 근처에 있는 페리어드의 영지를 드리죠.”

“리리안이 좋은 시댁을 뒀군.”

정말로 둘의 결혼이 성사되기라도 한 것처럼 패물까지 언급하며 아킬레스를 놀리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딸은 란, 아들은 리안 어때요?”

그러니까, 지금은 주접 좀 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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