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90)화 (90/207)

91. 결혼식

분명 방금까지 해가 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공작가 정원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대부분의 하객들이 바로 옆에 있는 연회장으로 들어가 피로연을 즐기고 있는 반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객들에게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계속 인사만 했으니 말이다.

결혼식에 참석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람인 내가 지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너무 오래 신은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아팠다.

…조금 이따가 춤도 춰야 하는데.

이 발로 춤을 출 생각에 벌써 막막해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튼을 살짝 들어 밖을 훑어보자 바리다스가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쉬어도 되겠지.

나는 바리다스 몰래 가져온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의 피로연은 다른 연회들과는 다르게 술이 빠질 수 없었기에, 지난번 무도회처럼 아이들을 참석시켜 주기는 힘들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아필레와 황제가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피로연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겠다 말했다.

자신들이 피로연에 참가하면 다른 귀족들이 피로연을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둘이 적당한 이유와 함께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아이들은 더 이상 우리를 조르지 않았다.

오늘 두 번째로, 그가 황제처럼 보인 순간이었다. 

속으로 둘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며 나는 구두를 벗고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았다.

조금 위험한 행동이긴 했으나. 은근히 도는 취기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뭐, 설마 떨어지겠어.

그리고 떨어진다 해도 약혼반지가 있었으니 걱정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불빛 아래 반지를 비춰 보였다.

푸른색의 보석이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정말로 예쁜 보석이었다.

아필레는 이 마정석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석 그 자체로도 가치가 매우 높다고 했다.

그럴 만하네.

나는 오색빛깔로 반짝이는 마정석을 보며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언제 다 마신 것인지 어느새 와인 잔은 비어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 수 있나?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나는 머리를 저었다.

일차적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에 마법을 낭비하는 것이 아까웠고 이차적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은 소위 말하는 기적에 가까운 형태였으나, 기적 그 자체는 아니었다. 마법으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었다.

죽음에 관한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소망만으로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것도 기적의 형태였기에.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인간이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신성력을 꼽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바리다스가 날 치료한 것처럼 간단한 것들은 마법으로도 할 수 있었으나, 심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마법으로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은 오직 신만이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런 신의 힘을 빌리는 것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은 신앙심에 비례해 강해지며, 그런 신앙심은 선한 마음과 모시는 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신관은 악한 마음을 먹었을 때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세계의 신관들은 거의 청렴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 세계에 신은 실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이 세계로 데려온 것도 신이 아닐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빈 와인잔을 매만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바리다스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난간에서 내려 맨발로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내가 와인을 마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리에 멈춰서 삐뚜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몰래 와인을 마셨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내가 그의 눈치를 보던 순간,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위험하니, 그렇게 앉아 계시지 마시죠. 테라스마다 의자를 배치하라 시키겠습니다.”

와인이 아니라, 난간 때문이었구나.

조금은 간섭해도 괜찮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리다스는 내 맨발이 신경이 쓰이는 것인지 나를 안아 들었다.

“낮은 굽의 구두도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리다스는 앞으로 예린이 술을 적당히 마실 수 있도록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손만 잡아도 벌써 얼굴이 붉어졌을 예린이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가 먼저 스킨십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조금 마음에 들었다.

바리다스의 부름에 시종 한 명이 테라스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시종에게 굽이 낮은 구두와 의자를 가져오라 시켰다.

“와인도 두 잔만 가져다주세요.”

피오라의 말에 바리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마시자는 겁니까?”

“싫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린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시는 건 상관없었지만 오늘은 결혼식 첫날 밤 아닌가.

내가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물론 어지간한 술로도 취하지 않았고 그 정도로 절제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그냥 재울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술에 취해 잠들어도 깨울 겁니다, 예린.

바리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마시죠.”

그런 생각을 모르는 예린은 바리다스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기뻐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 * *

“카나페도 가져다주세요.”

나는 안주로 먹을 카나페까지 부탁한 뒤, 나를 안고 있는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조금 있으면 의자랑 구두가 올 것이니, 이제는 내려줘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음에도 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내려주세요.”

말로 의사 표현을 해도 그는 나를 내려주는 대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왜 또 웃는데!

나는 바리다스의 어깨에 올리고 있던 양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웃지 마요.”

“그럼 울까요?”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특유의 표정 있잖아. 예전에 나한테 자주 하던 그거, 눈빛만 싸늘한 그거.

나는 최대한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거 있잖아요, 무표정인데 눈만 싸늘하게 바라보는 거.”

그런 내 모습에 바리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나요.”

“이거 아니에요? 완전 똑같을 거 같은데.” 

거울이 없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비슷할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다.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표정의 붉은 눈동자는 예전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한쪽 손을 어깨로 내리고 반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눈동자와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역시 원조는 다르네요.”

볼 때마다 신기했다.

어떻게 눈빛 하나로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는지.

원래 피오라라면 저런 눈빛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나한테는 아직 무리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커튼이 걷어지고 시종이 의자와 구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와인과 카나페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인은 바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두 잔 말고, 한 병 전부 가져다주세요. 샌드위치도요.”

안주와 술을 추가로 시키기 위함이었다.

오늘 마시면 또 당분간 못 마실 것 같은데, 오늘 많이 마셔 둬야지.

나를 의자에서 내려주는 바리다스는 묵언으로 긍정했고 시종은 테라스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리다스가 내게 신발을 다 신겨줬을 때쯤, 시종은 와인과 안주를 함께 가져왔다.

오늘 피로연에서 사용된 와인은 꽤나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벌꿀 와인이었다.

아까도 마셨지만 정말로 향이 좋단 말이지.

진하고 달콤한 벌꿀 와인이 목을 부드럽게 축여 주었다.

안주가 없어도 맛있었는데, 안주와 함께하니 술의 맛이 더 살아나는 것 같았다.

“짠!”

슬슬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바리다스에게 잔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바리다스는 말리지 않고 묵묵히 잔을 맞대 주었다.

그렇게 어느새, 병이 반쯤 비워졌고 바리다스는 내게 술을 더 이상 따라주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그를 바라보자 한숨을 내쉰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만 마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기분 좋은 만큼 잘 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우리 춤춰야 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번은 추는 게 예의에 맞지 않나?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한 번은 추는 게 예의에 맞긴 했지만 공작이 안 추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바리다스의 말에 안심이 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뒤꿈치가 저리고 아팠기에, 춤을 안 춰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딸딸한 것이 졸음이 쏟아졌다.

조금은 자도 괜찮지 않을까?

졸음을 이겨 낼 수 없었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조금만 자도 되나요?”

“그래요.”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있다가 깨워 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피오라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그녀의 옆으로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시계를 보자, 피로연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바리다스는 예린을 안아 든 채,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꽤나 높은 위치였음에도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는 그 상태로 저택으로 향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지치지 않은 것인지 예린을 안은 상태로 저택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잠든 것인지, 저택은 조용했다.

아킬레스가 아이들을 일찍 재워야 한다는 이유로 사용인들까지 자러 가게 한 덕분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리다스는 왠지 모르게 안도하게 되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리다스는 잠이 든 예린을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리다스는 예린을 침대 위에 눕힌 뒤,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깨어날 때까지.

깨워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피오라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고 내 팔에 입을 맞추고 있는 바리다스와 눈이 마주쳤다.

작은 빛을 내는 스탠드와 함께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마치 유혹하는 것 같은 야한 눈빛이었다.

그와 동시에 연한 민트 향이 느껴졌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바리다스의 방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잠과 술기운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그는 내가 깨어났음에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내 팔을 잘게 깨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만!”

계속에서 내게 입을 맞추는 그의 얼굴을 붙잡는 것으로 저지하자, 이번에는 얼굴을 돌려 내 손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 상태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피할 수 없는 진득한, 시선이었다.

“첫날밤인데, 그냥 재우실 건가요?”

그의 말에 내 얼굴은 불게 달아올랐다.

…이걸 보고도 어떻게 자.

각오하고 있었고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아뇨.” 

그런 내 대답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손짓하자, 커튼이 처졌고 스탠드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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