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수도로
칙칙 소리를 내며, 붉은색의 기차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기차가 신기했는지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동안 바리다스는 델아트와 수도를 연결하는 기차역을 건설하는 데 바빴다.
그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기차역은 그는 완공 예정이었던 가을에서 한참 앞당겨진 봄에 완공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애쓴 이유가,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기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했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웃어 버릴 뻔했으나,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요.”
바리다스는 나와 아이들을 놀래주고 싶다는 이유로 나에게도 기차역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내 손에 살짝 입을 맞췄다.
“유념하죠, 부인.”
진짜, 저 얼굴은 봐도 봐도 적응할 수 없었다.
미인계 쓰면 용서해 줄 거 같아요?
“좋아요.”
당연히 해 드려야죠.
내 대답에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때 기차의 문이 열렸고 깜짝 놀란 나는 그에게 붙잡혀 있던 내 손을 빠르게 빼냈다.
그리고 문에서 검은색의 제복을 맞춰 입은 두 명의 승무원이 내렸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에 올랐고 그렇게 아무런 죄도 없는 승무원은 바리다스를 안내해주며 묘한 살기를 느껴야만 했다.
기차의 내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한 칸을 아예 빌려서 그런 것인지 구석에는 이층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한 가운데에는 우리 모두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소파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소파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기 전에도 이런 기차는 못 타본 거 같은데.
“이 칸은 제가 구매했습니다.”
그렇구나.
아니, 잠시만 빌린 게 아니라 샀다고요?
깜짝 놀란 내가 바리다스를 돌아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준비된 차를 아이들에게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철도를 연결할 때 조금 투자를 많이 해서요.”
“그렇군요…….”
아니, 뭘 그걸 장난감 기차 사듯이 말해?
대체 얼마나 투자를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레몬과 자스민은 별생각 없는 것인지 기차를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는 강아지들 방도 준비해 줘.”
“나눈 인형들!”
“그래, 알았다.”
여기서 일 년 정도 살았지만 아직도 이 사람들의 금전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닌가, 이런 기차에 자연스럽게 타는 거 자체가 이해한 건가?
이해는 모르겠지만 적응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덜컹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칙칙거리는 소리나, 열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기차 자체는 덜컹거리지 않고 매우 안정감이 있었다.
“얼마나 가면 되나요?”
“3일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요.”
도착 시간이 거의 반 이상 단축된 것이었다.
그 점은 좋았으나, 이번에는 드미트르씨를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수도에서 조금 정리가 되면, 드미트르씨를 뵈러 갈래요?”
내 질문에 바리다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죠.”
바리다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놀고 있던 자스민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이거 하자!”
그녀가 내민 것은 바로 트럼프 카드였다.
그것을 본 바리다스의 표정이 굳어갔다.
“너희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지구에서는 문구점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장난감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트럼프 카드는 도박을 할 때만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도둑잡기나, 원 카드 같은 걸 하면 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건전한 게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내가 바리다스를 설득하려는 순간 옆쪽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와 바리다스가 그 방향을 바라보자 승무원이 아이들에게 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트럼프 카드보다 몇 배로 위험하고, 손등이 박살 나는 것 같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무서운 게임. 바로 할리갈리를 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손등이 아픈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바닥에 바나나 다섯 개가 깔렸고 토마와 렌의 손이 동시에 트럼프 카드로 향했다.
쾅!
얼마나 세게 친 것인지, 종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렌보다 토마가 더 빨랐고 그 때문에 렌에게 손등을 맞은 토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토마는 멍하니 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렌… 너 검 다시 배워 볼래?”
그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렌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정도 힘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아이들 중에 바리다스의 얼굴을 가장 닮은 것은 토마이지만 귀신같은 눈치까지는 닮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눈치 없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겠지.
“…다시 하죠?”
렌은 토마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다시 게임이 재개되었고 토마가 카드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딸기 다섯 개가 그려진 카드가 바닥에 놓였고 당연히 이번에도 토마가 더 빨랐다.
하지만 들린 소리는 종이 울리는 ‘딸랑’이 아니라 ‘쾅’이었다.
다시 또 렌에게 손등을 맞은 토마의 손등이 이제는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토마는 정말로 바리다스의 눈치를 반도 못 닮은 것이 분명했다.
“속도는 좀 아쉽긴 한데, 이 정도 힘이라면 분명 가능할 거야.”
토마의 말에 렌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땡!
이번에는 타격음 대신 종소리가 들렸다.
바닥에는 포도 세 개와 한 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렌이 토마가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종을 친 것이었다.
“오빠도, 속도가 좀 아쉽네.”
게임은 어느새 둘의 싸움이 되었다.
같이 게임을 하고 있던 승무원은 차마 아이들의 손을 때릴까, 종을 건들지도 못했고 레몬과 그린은 저 둘… 아니 렌에게 손등을 맞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그렇게 둘을 제외한 사람들이 한 명씩 탈락했고 결국 토마와 렌 둘이 남게 되었다.
둘은 계속해서 카드를 주고받았고 쾅 소리와 땡 소리가 번갈아 가면서 들렸다.
그들 중 가장 먼저 탈락한 그린은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는 가끔 형의 눈치가 신기해요.”
나도 그래.
한 명은 너무 빨라서 문제였고 한 명은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그렇게 카드를 주고받기를 한참, 역시 둘만 남은 경우에는 속도가 빠른 쪽이 유리한 것 같았다.
“이겼다!”
렌의 앞에 카드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토마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눈가는 촉촉했고 손등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봤을 땐 렌이 이긴 거 같은데.
“잘하네.”
렌의 말에 토마는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토마 네가 좋으면 됐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두면 누구 한 명이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말고 다른 게임은 없나요?”
내 말에 승무원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빠르게 뛰쳐나가 다른 게임을 가져왔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다칠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가 가져온 게임은 다치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게임인 젠가였다.
차라리 이걸 하는 것이 가장 낫겠다고 생각한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쌓아서 쓰러트린 사람이 지는 거야.”
내가 게임 방법을 설명해 주자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자스민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보기 좋게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바리다스의 참전 때문이었다.
자스민의 울먹임에 강제로 게임에 참여하게 된 그는 엄청난 속도로 맨 아래 깔려있던 젠가 두 개를 동시에 쳐냈다.
툭.
짧은 소리와 함께 젠가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바닥으로 사뿐하게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과 승무원 그리고 나는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박수를 쳤다.
남주는… 젠가도 잘해야 하는구나.
못하는 게 없는 바리다스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젠가를 넘어트린 레몬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다른 게임 하자.”
레몬의 말에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랑 속도 안 쓰는 안전한 게임으로.”
그의 말에 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승무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체스랑 바둑도 있나요?”
“아, 네! 있습니다.”
그는 게임들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건 괜찮지?”
내 말에 레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체스는 할 줄 아는데, 바둑은 뭐야?”
그때 승무원이 체스판 두 개와 바둑판 하나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에 그것들을 올려놓은 뒤, 그는 입을 열었다.
“다른 자리에서 모두 사용하고 있어서 남은 것이 이것뿐입니다.”
“충분해요.”
아이들은 체스는 알고 있지만 바둑은 처음 보는 듯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렌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흰 돌과 검은 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으며 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바둑이 아닌, 오목을 말이다.
“이렇게, 다섯 개를 먼저 잇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그렇군요.”
렌은 자신의 옆에서 같이 설명을 듣고 있던 토마를 바라봤다.
“오빠, 이거 해볼래?”
그녀의 말에 토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둘 다 처음 하는 것일 텐데,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둑판이 가득 차버렸고 둘의 바둑알 모두 동이 났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요?”
내게 묻는 토마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 너희랑 게임 안 할래. 다 잘하는 것이 기특하고 예쁘긴 한데! 이런 거까지 다 잘할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