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수도 나들이
“다 준비했으면, 출발할까?”
내 말에 아이들은 입을 모아 ‘네’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에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옷과 상태를 점검했다.
안 꾸며도 귀여웠는데 꾸몄더니 두 배로 귀여웠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이들을 마차에 태웠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황실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내가 황궁에 방문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필레와 황실 남매를 만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소문을 내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나, 그리고 황실과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차일드 가의 인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공작가의 인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토마와 렌은 시종들에게도 무시당하고 반푼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미리 보여주려는 것이다. 차일드 가의 아이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황궁은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정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질러 중앙에 있는 대리석 건물로 들어서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차일드 가의 문양을 본 기사들은 아무런 확인도 없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와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황금 사자 동상에 자스민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화려한 황궁과 거대한 정원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뜬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창밖을 바라봤다.
“진짜 예쁘다.”
“저게 다 우리가 낸 세금이야.”
“엄청 화려하네.”
…감탄사 중에 이상한 게 끼어 있는 것 같은데?
최근 그린은 좋게 말하면 성숙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차가워졌다. 웃는 일도 줄어들었고 레몬과 같이 다니는 일도 적어졌다. 하루의 일 대부분을 책을 보며 지내는 데다가, 조금 쉴 때는 리리와 같이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공부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지금은 더 놀기를 바랐다. 토마와 렌을 포함해서 말이다.
…잘 생각해보니까, 너희 왜 공부만 해? 노는 게 가장 좋을 나이 아니야?
왜 하루 종일 검 휘두르고 악기 연주하고 책만 읽어.
아이들이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 딱히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공부만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른 친구들을 만들어 줘야겠어.
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왔다.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앞장서서 걷는 시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난번에 바리다스와 함께 왔던 응접실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필레와 리리안 그리고 레이안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잘 왔네, 공작부인.”
레이안과 리리안은 내게 인사를 한 뒤 바로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그래, 너희끼리 놀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필레 앞에 앉았다.
아이들이 뛰어놀 것을 예상했는지 테이블에는 두 개의 잔만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남은 하나는 렌 것이겠네.
렌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토마 그리고 레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묘한 뿌듯함이 들었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 차를 마시던 내 눈에 평소보다 화려한 아필레의 드레스와 화장이 들어왔다.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건가?
“오늘 어디 가시나요?”
내 질문에 아필레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함께 시내에 가야지, 내가 자주 가는 살롱에 미리 예약을 해 놨네.”
“…꼭 가야 할까요?”
지난번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아필레는 이미 내가 쇼핑을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작게 웃었다.
“대부분의 소문은 살롱에서 시작되지.”
아필레는 내가 황궁에 온 다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역시 황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쇼핑은 싫었지만, 정말 싫었지만 아필레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대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죠.”
내 말에 아필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가 살롱으로 가기 위해 아이들을 부르려는 순간 레이안과 토마가 동시에 소리쳤다.
“저희는 연무장에 가고 싶습니다!”
그들의 말에 나와 아필레는 시선을 교차했다.
레이안과 함께 간다면 무시당할 일도 없을 것이고 기사들 대부분도 귀족이니 그쪽으로 소문을 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필레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린도 입을 열었지만,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랑 같이 쇼핑하기 싫은 거야?”
리리안 때문이었다.
서운한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리리안은 청초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속은 달랐겠지만.
“…아뇨, 갑시다.”
그린이 긍정의 대답을 하자마자 리리안의 눈빛이 바로 변했으니 말이다.
레이안이 곰이라면 리리안은 여우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린의 손을 잡았다.
“응!”
“손은 왜 잡으시는 거죠?”
“그냥, 왜?”
리리안은 그린뿐만 아니라 레몬의 손도 잡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그린은 리리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붉게 물든 리리안의 귀가 들어왔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린은 리리안보다 연하고, 공작가의 자제인데다가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완전 리리안의 이상형이잖아.
그린도 그렇게 싫은 눈치는 아니니까, 힘내라 리리안.
그때, 내 쪽으로 다가온 렌이 입을 열었다.
“저도 오빠들이랑 있을래요.”
의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은 연무장에서 검이나 휘두를 텐데?
설마, 다시 검을 배우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체력과 몸, 모두 약한 렌이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어?”
“네, 무리하지 않을게요.”
걱정이 되긴 했으나, 단호한 렌의 말에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명을 제외한 모두는 마차에 타 아필레가 말한 의상실로 향했다.
그녀가 예약한 곳은 수도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의 의상실이었는데 가게 안에 무려 카페가 마련되어 있어, 많은 귀부인들이 찾는 장소였다.
마차가 도착함과 동시에 의상실에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온 남자는 마차 아래에 레드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아뜨리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에게 인사를 한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져서 허리를 숙였다.
아니, 여긴 또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데?
우리가 무슨….
잘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황후, 황녀, 공작부인, 공작가 자제들.
…카펫 깔만하네?
아니 근데, 한국에서 살다 온 내 기준으로 레드카펫은 연예인이나 밟는 거였다고.
막 플래시 터지고, 웃으면서 손 흔드는 그런 거였다고!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카펫 위로 발을 올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맨바닥과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막 푹신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딱딱했다.
환영의 의미나, 상징적인 거였구나.
조금 오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결혼 선물로 국보급 다이아까지 받아놓고 무슨 레드카펫 정도로 긴장을 했을까.
근데 솔직히 이건 긴장 아니, 부담스러워할 만했다.
나는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살면서 해본 VIP라고는 배X의 민족이랑 요기X가 전부라 그러는데 그냥 평범하게 대우해주시면 안 되나요?
이런 혜택은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하게 장식된 드레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어느 나라든 수도가 가장 발전하는 건 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두 명의 종업원이 내게 다가왔다.
그들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차일드 공작부인 맞으신가요?”
“맞기는…한데요…?”
“황후 폐하께서, 예약하셨습니다.”
…어?
깜짝 놀란 내가 아필레를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당했다.
그렇게 나는 두 사람에게 끌려 아필레가 미리 예약해 둔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예약했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의상실에 예약을 했다는 건, 누군가 옷을 맞춘다는 얘기잖아.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 동안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흐르고 드레스를 입은 내가 밖으로 나가자, 아필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예쁘네요!”
아필레, 혹시 소문 얘기는 그냥 핑계였나요. 당신 나 옷 입히려고 여기 데려온 거죠, 그죠?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아필레의 말대로 귀부인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아닌가?
의상실을 예약하는 김에, 내 옷을 맞춰 주려고 한 건가?
결백한 아필레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나는 양 팔을 들어 앞을 가렸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입을 때는 몰랐는데 드레스의 앞이 시원하게 파여 있었다.
혹시나 하며 뒤를 돌아보자, 등도 마찬가지로 깊게 파여 있었다.
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아필레를 바라봤다.
“근데 너무 파이지 않았나요?”
하지만 내 말에 아필레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평범하죠.”
이게 평범이라니, 내 안의 유교걸이 우는 거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 드레스를 위로 올리던 그때, 아필레에 이어 리리안과 레몬이 입을 열었다.
“와, 형수님. 완전 예뻐.”
“그러네, 오늘 잠 못 자겠다.”
잠시만, 뭐라고?
리리안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필레를 돌아보자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리리안 어디서 그런 거 배운 거야? 반년 전만 해도 몰랐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필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궁 도서관에 음란물 가져다 둔 사서, 누구인지 걸리기만 해 봐라….”
…그렇게 된 거였구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했네.
근데, 이런 디자인 고른 아필레도 잘못했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선물 받은 옷을 바로 벗기도 조금 그랬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 순간,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