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수도 나들이
찬란한 백금발이 조명 아래 반짝였다.
아킬레스였다.
그의 등장에, 의상실에 모인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실망하고 말았다.
당연히 바리다스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건가.
조금 민망하다고 생각하며 아킬레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움직이던 순간, 바리다스가 렌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와 마주친 바리다스의 눈동자는 떨리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바리다스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직접 고르신 겁니까?”
“아뇨, 황후 폐하가 선물해 주셨어요.”
내 말에 떨리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왜인지 안도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날이 추우니, 가디건이라도 걸치시죠.”
지금 여름인데…?
춥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부담스러운 디자인이기에 가디건을 입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알겠어요.”
바리다스의 말에 아필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가디건을 구매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입은 의상과 같은 검은 색상의 가디건들이 앞에 진열되었고 나는 그들 중 얇은 레이스로 만들어진 가디건을 골라 입었다.
단추를 두 개쯤 채우고 손을 떼자, 바리다스가 손을 뻗어 가디건을 붙잡았다.
그대로 남은 단추를 모두 채운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춥습니다.”
수도는 여름에도 춥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맨 위의 단추 하나만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디저트를 구매하러 갔던 그린과 자스민이 접시를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자스민은 바리다스를 보자마자 달려와 접시를 그에게 넘김과 동시에 팔을 붙잡았다.
“오빠도 같이 먹자!”
“나도!!”
레몬이 일어나자 리리안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렇게 다섯 명은 옆 테이블로 이동해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바리다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은 나는 아필레의 옆에 앉았다.
“수도는 여름에도 춥나 봐요.”
내 말에 아킬레스는 웃음을 참았고 아필레의 표정은 흔들렸다.
“네… 그렇죠, 춥죠….”
아필레의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린 아킬레스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추워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용히 해.”
아필레의 말에 아킬레스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아필레의 만류에도 결국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작이 참 힘들겠어.”
아필레도 동의한 것인지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나, 뭐 잘못 한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 순간, 아킬레스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둘째 공자는 오늘 황태자와 함께 황궁에서 자겠다고 하더군.”
아킬레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벌써 외박을 하다니,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외박을 하는 장소와 친구 모두 매우 안전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 순간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뒤를 돌아보자, 레몬과 리리안이 나를 안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킬레스의 말을 들은 것인지 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언니랑 자면 안 되나요?”
“제 방에서 같이 잘 테니까, 허락해 주세요.”
나한테만 허락을 받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필레와 아킬레스를 바라보자 그들도 괜찮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두 아이는 손을 붙잡고 환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필레가 내 손을 붙잡았다.
“공작부인도 황궁에서 자고 가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바리다스가 아필레는 아킬레스가 서로의 반대쪽으로 당겼기 때문이었다.
“안 됩니다.”
“안 돼.”
그리고 언제 온 것인지 자스민도 나를 붙잡으며 볼을 부풀렸다.
“형수님은 저랑 잘 거예요.”
“그것도 안….”
자스민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가던 바리다스는 아차 싶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필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공작.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그대의 아내를 데려가는 것이니, 자네도 내 남편을 데려가게.”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와 아킬레스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그리고 나를 잡은 바리다스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말려보라는 의미를 담아, 아필레를 바라보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키득거리며 나에게 윙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국 서열 1위는 아필레가 분명했다.
저 두 사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유일할 테니 말이다.
“농담일세.”
아필레의 말에 바리다스의 팔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힘만 약해졌을 뿐 나를 잡은 팔은 여전했다.
아킬레스도 마찬가지로 아필레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말이다.
그렇게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던 그때,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렌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오늘 마탑에 방문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렌의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나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레몬과 토마를 잘 부탁드립니다.”
마탑이라면, 자스민 때문이구나.
지난번 매튠과의 만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는 자스민을 일으켜 주었다.
레몬도 자고 간다고 했으니, 그린만 데려가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옆 테이블에 있는 그린에게 시선을 옮기자, 레몬에게 팔이 붙들려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린도 안 간대!”
레몬의 말에 그린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린은 가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내가 그린을 데려가기 위해 레몬을 달래려는 그 순간, 리리안이 그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 온다면, 황족 전용 도서관에 들어가게 해 주지.”
리리안의 말에 그린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표정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은 그린은 레몬의 팔에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
“저도 황궁에서 자고 가겠습니다.”
그린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리리안의 설득에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허락은 바리다스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렴.”
그렇게 세 아이를 제외한 나와 렌 자스민만이 마탑으로 가게 되었다.
넓은 마차는 빈자리가 많아 오늘따라 휑해 보였다.
마탑은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마탑의 분위기는 내 예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마탑은 약간 우중충한 분위기에 검은색의 탑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푸른 지붕이 있는 흰색의 성이었다.
내가 마탑을 올려보고 있던 그때, 정문이 저절로 열리고 가로등의 불이 자동으로 들어왔다.
“우와!”
신비로운 광경에 자스민은 감탄사를 내뱉었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다 마법인 거지?
우리가 정문을 지나가자, 문은 또다시 저절로 닫혔다.
그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잘 생각해 보니, 이런 자동화는 전생에서는 당연한 거였다.
왜 나 이런 걸로 놀라고 있었지? 이제는 아니지만 나 21세기 사람이었는데?
스스로가 퇴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탑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올려다보자, 작은 새처럼 생긴 기계가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목소리는 아무래도 수정구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자스민 뿐만 아니라 렌도 놀란 것 같았으나, 동심이 사라져 버린 나는 이제 놀랄 수 없었다.
저건 뭐, 드론이네.
“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새를 따라, 마탑의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나 마정석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내 눈에는 평범한 회사로 보일 뿐이었다. 그저 많이 바쁠 뿐인 회사 말이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아 새는 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바리다스도 놀란 것 같았지만, 나는 놀랄 수 없었다. 이 기계는 엘리베이터와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느려…. 이 속도라면 육삼빌딩도 오르는데 한 시간은 꼬박 걸리겠는데?
역시 현대 과학은 마법만큼이나 대단한 것 같았다.
천천히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마지막 층에서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자스민과 렌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또 타고 싶어!”
“그러게, 재밌다.”
지구 데려가고 싶네.
두 아이를 놀이공원에 데려가 하루 종일 놀이기구만 태워주고 싶었다.
그때 자스민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형수님, 나 안아조.”
자스민이 적당히 귀여웠으면 좋겠다.
여기서 더 귀여우면 내 심장이 위험해.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스민을 안으려 한 순간, 바리다스가 먼저 자스민을 안아 들었다.
“제가 안을 테니, 편하게 있어요.”
위를 올려다보니, 바리다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 가족 진짜로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요.”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번에는 렌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형수님은 저랑 손잡아주세요.”
그녀가 너무 귀여워,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렌의 손에 깍지를 쥔 그 순간, 이번에는 바리다스가 내 반대 손을 잡았다.
시선을 옮기자 한 팔로 자스민을 안은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당신들 표지판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심장에 위험하다고 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