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마탑
하지만 우리가 손을 잡고 걸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탑의 꼭대기 층에는 단 하나의 문만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는 문은, 웅장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자,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매튠과 한 은빛 머리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그들은 차례로 우리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마탑 소속 마법사, 매튠 테리아입니다.”
“마탑주 펠 아르키스라고 합니다.”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젊고 잘생긴 마탑주의 모습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방이 드러났다. 화려하고 넓은 방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사이, 의자와 찻잔이 저절로 날아와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와, 이건 신기하네.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에, 나는 오랜만에 동심을 찾고 감탄할 수 있었다.
우리가 모두 자리에 앉자, 펠은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마탑으로 초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막내 공녀님께서 각성하셨다는 이야기를 매튠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자스민의 각성이, 마탑주가 이렇게 나설 정도의 일인가?
내가 알기로 마탑주는 제국에서 준 귀족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직접 방문을 요청하다니. 혹시, 자스민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혹시 그 사건 때문에, 너무 빨리 각성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펠이 한 이야기는 내 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차일드 가의 마법사이기 때문에 직접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펠은 자스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자스민은 손을 뻗으려다 말고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꼭 잡아야 하는 건가요?”
자스민의 경계에 펠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더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펠이 다시 손을 폈을 땐, 그 위에 딸기 초콜렛이 놓여있었다.
자스민을 향해 뻗어져 있는 손 위에 놓인 초콜릿은 마치 자스민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넘어가지 않는 것인지 자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콤한 유혹에도 함부로 넘어가지 않는 자스민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초대를 받고 방문한 것이고 펠이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검사를 위해서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자스민을 설득하려는데 갑자기 펠의 손 위에 초콜릿이 두 개로 늘어났다.
그 모습에 자스민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동요를 포착한 펠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초콜릿의 개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펠의 손 위에는 초콜릿이 가득 늘어났다. 하지만 자스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펠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내가 나서는 게 낫겠어.
나는 자스민을 설득하려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때, 부드럽게 미소 지은 펠은 입을 열었다.
“제 손을 잡는다면, 초콜릿 마법을 바로 사용하실 수 있으실 텐데요.”
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스민은 그의 손을 잡았다.
펠의 승리였다.
그렇게 둘이 손을 잡은 지 삼십 초 정도가 지난 뒤, 펠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정말로, 대단한 마나량이네요.”
그의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스민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탑주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기분이 좋았다.
“그렇군.”
바리다스도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도 사실 기뻐하고 있다는 걸.
렌도 마찬가지로 밝게 웃으며 기뻐하고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자스민은 초콜릿 말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나가 많으면, 그러면 초콜릿 마법 많이 쓸 수 있어요??”
“그렇지.”
하지만 나는 저 말에 약간의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마법은 초콜릿을 다른 곳에서 손 위로 순간이동 시키는 마법이지 초콜릿을 만드는 마법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자스민은 펠의 대답에 환하게 웃으며 그가 내민 딸기 초콜릿을 받아먹을 뿐이었다.
자스민이 초콜릿을 세 개째 까먹을 무렵, 바리다스가 그녀를 말렸다.
“아까도 많이 먹었잖니, 이제 그만 먹으렴.”
하지만 아직 초콜릿이 더 먹고 싶은 것인지, 자스민은 바리다스의 소매를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
“하나만 더 머그면 안대?”
“안 돼.”
단호한 바리다스의 대답에 자스민은 볼을 부풀렸다.
그런 자스민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초콜릿을 하나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로 안 된단다.”
그의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서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자스민이 초콜릿을 입 안에 넣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녀 쪽으로 날아왔다.
그것은 그대로 자스민의 손에 올려져 있던 초콜릿을 낚아챈 뒤, 렌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삐이!”
파랑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렌의 품 안에 자리를 잡은 푸른색의 새를 바라보았다.
장담컨대, 그 새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새보다 신비로웠다.
생김새도 신비로운데, 초콜릿까지 먹는 새라니 안 신기할 수가 없었다.
마탑에서 키우는 새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새를 바라보던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스민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렌의 팔에 달라붙었다.
“초콜릿이랑 언니 둘 다, 내 거야!”
하지만 새는 자스민의 말을 무시하며 초콜릿을 먹을 뿐이었다.
그런 새의 행동에 자스민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때, 펠이 자스민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닌데. 공녀님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펠의 말에 렌은 자신의 품 안을 파고드는 새를 내려다봤다.
“마탑에서 키우는 새인가요?”
렌의 질문에 펠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타는 새가 아니라, 정령입니다.”
펠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리타를 바라봤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왔던 정령이 실제 내 눈앞에 있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스민은 리타가 정령이라는 사실보다, 렌의 품에 안겨 자신의 초콜릿을 빼앗아 먹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나는 쟤 싫어.”
작게 중얼거린 자스민은 펠이 준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리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렌은 리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다정한 손길로 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렌의 행동에 자스민의 표정은 더더욱 구겨졌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렌과 펠은 리타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데, 저같이 평범한 사람도 정령을 볼 수 있나요?”
렌의 말에 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리타가 원하지 않는다면 볼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펠의 대답에 렌은 리타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고 그녀의 행동에 자스민의 볼은 더 부풀려졌다.
나는 그런 자스민을 달래주기 위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초콜릿 하나 더 줄까?”
하지만 내 말에도 자스민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렌의 품에 안긴 리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렌의 품에서 빠져나온 리타가 나에게 달려들더니, 내 손에 들려있던 초콜릿을 낚아채 다시 렌에게 돌아갔다.
“삐이, 삐!”
기분 좋게 짹짹거리며 초콜릿을 먹는 리타를 보며 자스민은 소리쳤다.
“내 거야!”
방금까지 안 먹는다며!
나는 내 품에서 버둥거리는 자스민을 붙잡으며 새 초콜릿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자스민은 초콜릿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리타를 노려봤다.
그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펠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리타의 주인으로서,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차나여.”
펠의 사과를 받긴 했으나, 자스민의 기분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렌이 리타를 안아 들고 자스민 쪽으로 다가왔다.
“민, 너도 쓰다듬어 보렴.”
렌의 다정한 말에도 자스민은 고개를 저을 뿐, 선뜻 리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 리타도 마찬가지로 렌에게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의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오가던 그때, 바리다스가 자스민을 안아 들며 입을 열었다.
“본래 목적은 달성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네.”
그의 말에 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펠은 렌에게 다가와 리타를 데려가려 했지만 리타는 렌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반 강제로 렌에게서 떨어진 리타는 계속 버둥거리며 렌에게 돌아가려 했다.
“나중에 올게.”
렌의 말에 리타는 그제야 반항을 멈추고 펠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렌의 손을 잡고 마탑에서 나온 뒤에야, 자스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래 가지곤 렌이 아카데미에 입학이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나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렌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자스민을 바라봤다.
어차피 몇 년 뒤니까, 그때쯤이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자스민은 집에 도착한 뒤에도, 렌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녁을 먹을 때도, 강아지들을 산책시킬 때도.
그리고 잘 때까지.
늦은 밤 렌과 함께 바리다스와 나의 방으로 들어온 자스민은 인형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다 같이 자자!”
“그러자꾸나.”
자스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진짜지? 그러면 특별히 내가 형수님 옆자리는 양보해 줄게.”
내 옆자리에 누우며 바리다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원래 내 거고.”
“그런 거야?”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데.
애들 앞에서 그러지 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