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쌍둥이의 생일
“앗, 황녀님!”
리리안의 존재를 발견한 레몬도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평소라면 리리안을 ‘언니’라고 불렀겠지만, 공적인 자리였기에 ‘황녀님’이라는 호칭으로 예의를 차렸다.
“생일 축하해, 레몬.”
그 사실을 아는 리리안은 딱히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 레몬에게 선물 상자를 내밀 뿐이었다.
“고마워요!”
레몬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서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때,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뒤늦게 도착한 레이안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생일 축하해.”
레이안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선물을 내밀었다.
그의 선물은 브로치였는데, 그린과 레몬의 머리 색을 닮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두 아이에게 인사를 받은 레이안은 웃으며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뒤 바로 토마에게 다가갔다.
렌과 대화를 하고 있던 토마는 레이안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왔냐?”
“그래, 오셨다.”
“끝나도 연무장이나 가자, 지루해 죽겠다.”
작게 한숨을 내쉰 토마가 소곤거리자 레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좋지.”
토마는 동생들의 생일 파티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검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대화에 도저히 낄 수 없었던 렌은 자리를 옮겼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을 만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렌은 케이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몬과 그린, 리리안을 바라보았다.
자신만 빼고 다들 친구라 부를 만한 존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그렇게 좋나?
잠시 망설이던 렌은 케이크 한 조각을 모두 먹은 뒤, 마침 지나가고 있던 분홍빛 머리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곧 두 사람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렌 언니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는 거 처음 봐.”
“나도.”
그런 렌의 모습을 쌍둥이가 신기한 듯 바라보자, 리리안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
“테이튼 후작가의 영애군, 음악 쪽으로 조예가 깊은 곳이니 대화가 잘 통하겠어.”
그 말에 둘은 놀랍다는 눈빛으로 리리안을 바라봤고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녀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레이안과 달리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 관심이 많았던 리리안은 수많은 가문과 그 가문의 인물들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그때, 아까 레몬과 대화를 하고 있던 영애들이 레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사이에 꽤 친해졌는지 그들은 순식간에 하나가 되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리안은 그들과 함께할 생각이 딱히 없어 보였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린은 작은 목소리로 리리안에게 속삭였다.
“저는 사교활동에 관심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린의 말에 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거짓말이었다. 리리안은 예전부터 사교계를 계속 동경해왔으니 말이다.
“친구는 만들어 두는 편이 좋습니다.”
정말로 그린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리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너는?”
“저는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한 명.
그 한 명이 누구인지, 리리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린의 말에 리리안은 왜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하지만 좋은 분위기도 잠시,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린은 리리안이 준 선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지금 열어봐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리리안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린은 망설임 없이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푸른색의 만년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저건 색을 사용자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는 만년필이었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신제품이었지만 다행히 리리안은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만년필이라 해도 그린은 만족했을 것이다.
그는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는 그 말에 리리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리리안은 어제 열심히 선물을 고른 보람을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레몬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을 기다릴까 봐 대화를 빠르게 마치고 달려왔는데, 자신이 없는데도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연회장에 오래 있어서 답답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한 레몬은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면 이 이상한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레몬이 막 연회장 밖으로 나온 그때, 누군가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레몬이 뒤를 돌아보자 루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
루이는 그녀를 보며 한 번 짖더니 근처에 떨어져 있는 공을 물고 달려왔다.
던져달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레몬은 드레스를 한쪽으로 잡아당긴 뒤 공을 주워 앞쪽으로 던져주었다.
불편해.
예쁜 드레스나 보석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움직일 때는 불편하단 말이지.
무거운 드레스와 보석 때문에, 레몬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지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에 비해 루이는 지치지 않는 것인지 계속 공을 가지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우리 조금만 쉬고 하자.”
잔디 위에 주저앉은 레몬이 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물고 있던 공을 바닥에 떨어트린 루이가 어딘가로 달려간 것은.
“루이?”
깜짝 놀란 레몬이 루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루이가 향한 곳에는 레이안이 서 있었다.
레이안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루이를 익숙하게 쓰다듬던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둘이 놀고 있었구나.”
그의 말에 레몬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둘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기에, 그 뒤로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레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루이랑 놀고 있었구나.”
“네.”
“선물은 마음에 드니?”
“네.”
레몬답지 않은 딱딱한 대답이었다.
예전부터 레몬은 알게 모르게 레이안을 불편해했으니 말이다.
레이안은 그 이유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
루이 때문이겠지.
레이안은 루이가 레몬보다 자신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레이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또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던 그때 토마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레이안을 찾느라 헤맨 것인지, 그의 이마에는 몇 개의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레몬과 레이안을 번갈아 돌아본 토마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연무장으로 오라니까. 왜 여기 있어.”
토마의 말에 레이안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길을 헷갈려서.”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몬은 루이의 목줄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다시 들어가 볼게요.”
하지만 루이는 레몬의 마음과는 다르게 레이안과 더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레이안은 루이의 목 아래를 쓰다듬는 것으로 그를 달래주며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셋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을 때쯤, 멀리서 레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일 축하해, 레몬.”
그 목소리에 레몬의 귓가가 붉게 달아오른 것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비밀일 것이었다.
쌍둥이의 생일 파티는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둘에게 미묘한 감정만을 남기며, 그렇게 끝이 났다.
* * *
그 시각, 서재에서 자스민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던 바리다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 말이다.
그는 자스민에게 읽어주던 동화책에서 시선을 떼고 정원을 바라봤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그런 바리다스의 행동에 무릎에 앉아 있던 자스민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란다.”
다정하게 대답한 바리다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잔뜩 상기된 표정의 크림슨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답지 않은 모습의 그를 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바리다스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무슨 일이지?”
바리다스의 질문에 자스민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드미트르님께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크림슨의 말에 바리다스의 손에 들려 있던 동화책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마음을 정리한 그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당장 마차를 대기시켜.”
그동안은 드미트르의 강한 거부로 인해, 그를 데려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바리다스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바리다스는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자스민에게 남은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다 읽었을 때쯤, 마차가 준비되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자스민의 말에 바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저택 밖으로 나간 그는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그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날씨가 조금 추워졌다고 느끼며, 그는 마차에 올라탔다.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