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02)화 (102/207)

103. 드미트르

“드미트르.”

바리다스의 부름에 드미트르는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그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 바리다스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왜 자신에게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일까?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드미트르에게 다가갔다.

“알고 있습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드미트르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리다스가 그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도 바리다스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진작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의 병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르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 그 순간까지 바리다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바리다스는 이제 더 이상 그를 혼자 둘 생각이 없었다.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 간절해 보이는 그의 말에도 드미트르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드미트르의 대답에 바리다스는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그를 강제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그에 대한 자신의 존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바리다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저택에 방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바리다스의 말에 드미트르가 다시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바리다스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언제나, 박하 향이 날 것이고 방 한구석에는 검과 책들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또 나무 블록이 놓여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제는 지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 드미트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 그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그래도 힘들 것입니다.”

드미트르의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저건 드미트르 나름의 허락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바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쓸쓸한 미소였다.

* * *

바리다스가 드미트르 씨를 모시러 간 지 벌써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남편이 출장을 떠나면 이런 기분일까.

하루 이상 그와 떨어져 본 적이 없기에 한 번씩은 외롭긴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외로움을 길게 느낀 적은 없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나는 정원에서 토마를 제외한 아이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미트르씨와 바리다스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커다란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고 마차에 새겨진 차일드 가의 문양을 확인한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춘 마차 안에서는 예전에 봤던 것보다 수척해진 드미트르씨와, 바리다스가 함께 내려왔다.

“어서 오세요.”

아이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내 이마에 입부터 맞춘 바리다스는 아이들에게 인사한 뒤 말했다.

“내 손님이란다.”

바리다스의 말에 아이들은 한둘씩 앞으로 나가 드미트르 씨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인사가 모두 끝나자, 드미트르 씨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들과 도련님. 드미트르라고 합니다.”

아이들과 그가 인사를 마치자, 바리다스는 내 손을 놓고 드미트르 씨에게 다가갔다.

“저택을 안내해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 순간, 나와 드미트르 씨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까,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을래요?”

“나도 그편이 좋을 것 같네.”

나와 드미트르 씨의 의견이 겹쳤고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조금 있다가 봬요.”

우리의 말에 아이들은 바리다스의 손을 잡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곧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조금 이따가 봐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바리다스는 벌써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나는 드미트르 씨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리다스가 말을 하고 떠난 덕분에 그를 위한 손님방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곳으로 천천히 향하던 도중, 드미트르 씨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드미트르 씨는 잘 지내셨나요?”

“저야, 괜찮게 지냈습니다.”

그의 말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드미트르 씨의 방으로 들어가자, 바리다스와 같은 박하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를 위해 방 한쪽에 박하 차를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르 씨도 향을 맡았는지,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방 안에는 욕실과 침실이 있었고 거실에는 소파와 여러 가지 책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내 질문에 드미트르 씨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제에 차고 넘치는 방입니다.”

드미트르 씨의 말에 조금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에게 소중한 사람은,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에게 어떤 분인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내 말에 드미트르 씨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드미트르 씨에게 방을 안내해준 나는 뒤를 이어 저택을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정원을 마지막으로 내가 저택을 모두 소개해준 그때, 드미트르 씨가 입을 열었다.

“연무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연무장?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이 안 좋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연무장을 사용하셔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실례가 될까, 차마 되묻지 못하고 그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훈련을 마치고 연무장에서 나오고 있던 토마와 마주쳤다.

내게 인사한 토마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드미트르 씨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분간 함께 지낼 손님이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토마는 드미트르 씨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토마 차일드라고 합니다.”

“예, 드미트르라고 합니다.”

그때 토마의 시선이 드미트르 씨의 손으로 향했다.

아주 잠시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던 토마는 고개를 들었다.

“실례지만 혹시, 기사이신가요?”

“어디서 자랑하기 부끄러운 옛날 일입니다.”

그의 말에 토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드미트르 씨의 허리춤에 찬 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와 대련해 주실 수 있나요?”

토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드미트르 씨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병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환자가 몸을 막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대신 거절을 하는 것도 드미트르 씨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드미트르 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라도 괜찮다면, 영광이지요.”

내게 허락을 구한 드미트르 씨는 토마와 함께 바로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아니, 드미트르 씨 몸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으신가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질문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발만 동동 구르며 연무장에서 둘의 대련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련이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의 검이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드미트르의 검은 바리다스와 비슷한 속도였다.

토마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한 번만 더 가능할까요?”

“그렇게 하지요.”

말이 한 번이었지, 토마는 그와 다섯 번을 더 겨뤘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 우리가 연무장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바리다스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드미트르 씨에게 달려간 바리다스는 표정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무리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래 봬도, 몸은 건강하다네.”

바리다스는 드미트르 씨의 고집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의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보던 토마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드미트르 씨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인 드미트르 씨는 토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정말로 좋은 기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드미트르 씨의 말에 토마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나의 의문은 저녁이 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되었고 자리에 앉은 드미트르 씨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둘째 도련님의 실력이 대단하더군요.”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한 말이지만,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의 말에 드미트르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때 드미트르 씨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마님께서는 마나라는 것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혹시나 도련님이나 아가씨들이 마나를 사용하게 된다면, 너무 과하게 사용하지는 않도록 주의를 꼭 주셔야 합니다.”

“네?”

“마나를 과다하게 사용하게 된다면, 몸에 무리가 가기 때문입니다.” 

설마.

나는 그제야 드미트르 씨의 병에 대해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몸에 평범한 병이 아니라, 마나와 관련된 병을 앓고 있었다.

조금은 불편했던 식사가 끝난 뒤, 드미트르씨와 헤어진 우리는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드미트르 씨가 앓고 있는 병이 정확히 뭔가요?”

“마나 과남용이라고 불리는 병입니다. 말 그대로 마나를 여러 번 과하게 사용하게 되면 발생하는 병으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을 천천히 갉아먹기 시작하는 병입니다.”

“그렇군요.”

드미트르 씨가 걱정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 중에도 마나 사용자가 둘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눈에 바리다스가 들어왔다.

아니, 셋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리다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도 무리하지 마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0